중국의 지난역사에서 가장 강한 국가로 평가 받는 것은 청나라이다. 물론 현재 중국은 성당시대라고 하여 당나라를 제일 평가하고 있으나 이것은 한족이 세운 국가로서일 뿐이다. 이민족의 지배를 받은 역사를 자랑스러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 청나라는 지금이 중국보다 넓은 영토를 차지했고, 경제적으로도 가장 강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세력이 진행한 아메리카 식민지의 부는 유럽에는 인플레이션을 가져왔지만 중국에는 경제부흥을 가져왔다.
고도의 경제력을 가진 중국은 세계를 주름잡았고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이 상황에서 유럽 특히 영국이 생각해낸 것은 아편을 통한 삼각무역으로 이 무역역조를 해결하려고 하게 되고 그 문제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 아편전쟁이었다.
아무튼 이때 유럽에서는 중국붐이 일어서 볼테르같은 지식인들이 유럽을 이상적인 국가로 묘사하기까지 하였다. 무능한 귀족들이 지배하는 유럽보다 선발된, 황제에 의해 임명된 관료들의 지배가 훨씬 효율적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배경에는 이성적인 군주인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의 삼황제가 있다. 100여년을 통치한 이들은 실질적인 통치력을 유지하려 했다. 우리나라의 암행어사 같은 밀정들을 통해 끊임없이 감시하였다.
원래 중국의 부패문제는 뿌리가 깊다. 그래서 부패문제가 왕조교체의 주요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양렴은’(養廉銀)제도인데, 이름자체가 ‘청렴을 배양하는 돈’이니 간단히 ‘청렴결백수당’제도이다. 부정으로 받을 돈을 아예 주어버리는 제도였다. 그래서 부패에 들어갈 돈을 세금으로 걷으면 된다는 생각을 했다. 주로 지방에 파견가는 공무원에게 지급했는데 200배를 지불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 제도도 실패로 끝났다. 초기에는 먹혀들다가도 시간이 흐르면 사람들은 적응력이 생겨서 더 큰 규모의 부정을 저지른 것이다. 건륭제의 총애를 받던 화신이라는 권력자가 있었는데 2천채의 집에 2억평이 넘는 논과 밭 등 8억냥이 나왔다. 당시 중국의 연간 예산은 7천만원이었다. 그리고 50년이 되지 않아 아편전쟁으로 나라는 무너지게 된다.
우리도 과거에 역시 같은 문제에 봉착했다. 청백리제도를 두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달리 반대가 심했다. 일종의 허위로 본 것이다. 그래서 조선시대 내내 8차례밖에 선정하지 못했다. 전반적인 부패방지에 기여하지 못하는 일종의 이벤트로 본 것이다.
결론적으로 돈을 더 주거나 훌륭한 영웅을 만든다고 해서 해결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마찬가지로 돈 있는 사람이 부패하지 않을 거라는 환상도 인류가 가지는 영원한 환성이지만 마찬가지로 그런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도 인류가 경험한 진실이다.
최근 대통령선거에서 불거지는 부패논란을 보면, 우리사회의 부패가 다소 감소하면서 사람들은 부패의 심각성을 망각해가는 것 같다. 그래서 부패가 국가에 얼마나 해악을 끼치는지의 심각성도 잊고 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지만 홧김에 또는 기억상실 때문에 커다란 선택을 내버리듯 하면 우리의 미래도 내버려진다는 것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제16호 10면 2007년 8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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