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하루는 스포츠로 해가 뜨고 스포츠로 해가지는 사회가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된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근대 스포츠는 대한제국시기부터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110여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처음부터 스포츠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접근되었다.
단적으로 1896년 12월 독립신문은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기를 조선이 암만하여도 나라가 안되겠다고 하여도 우리는 말하기를 조선이 암만해도 나라가 되겠다고 하노라.’ 그 이유로 첫째는 학생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고, 둘째는 축구를 하는데 일본학생보다 1백배 낫고, 미국·영국 아이들과 비슷하다 논리였다.
스포츠는 그처럼 우리와 서구를 비교하는 잣대였다. 또한 스포츠는 서쪽의 문명국으로부터 바다를 건너온 가지여서 선진문명 자체와 동일시 되었다. 따라서 초기의 스포츠는 황실의 적극적인 후원아래 진행되었고 선진문명으로 기독교를 바라본 YMCA같은 기독교신자들이 보급에 열심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895년에 공포된 첫번째 학부령(현 교육부령)에는 체조가 법정과목에 포함되었다. 근대교육의 시작을 체육이 함께한 것이다. 그들에게 스포츠는 무와 충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한일합방이 되었을 때에도 구 한국군들은 각종 학교의 체육교사가 되었다. 3천개의 각종 사립학교들이 그 자양분이 되었다.
그래서 1915년의 조선총독부는 사립학교령을 개정하여 체육교사는 무조건 일본인들로 대체되도록 하였다. 따라서 독립군에도 참여하지 않았던 한국군 출신들까지 만주로 떠나게 되었다.
일본은 체육을 통하여 양 민족의 우호와 통합을 이루려 하였으나 오히려 승부에 집착하는 수준 낮은 일본인들 때문에 조선인들에게는 스포츠를 통해 공동체성을 만들어간 좋은 계기가 되었다. 이것이 극대화된 사건이 손기정의 올림픽 마라톤 우승으로 인한 신드롬이었고, 우발적인 일장기 말소사건 같은 일도 일어나게 된다.
세계 10대 강국이 되었지만 아직도 더 강국들에게 둘러싸여 여전히 약소국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그에 따른 민족주의적 열정을 우리는 스포츠를 통해 발현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쿠베르텡 남작마저도 국민국가의 열망 속에 패전에 좌절한 국민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올림픽을 개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최근 또다시 혹은 떠나는 것이 당연시된 베어벡 전 감독을 보면서 지나친 감을 느낀다. 그래서 월드컵 끝난 후에 박지성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한국 사람들은 축구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것을 좋아 한다’는 말이다. 월드컵 당시 세계를 놀라게 하는 열풍이 불었지만 평상시에는 축구에도 스포츠에도 별 관심 없는 국민들에게 던지는 솔직한 말이다.
스포츠든 정치든, 아직도 구한말의 콤플렉스에서 못 벗어 난 것인지, 아니면 한번 응원하고 혹은 투표하고 나머지 모든 시간은 열심히 욕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답답하다.
최근 냄비근성의 장점이 부각되고 있다. 장점으로서의 냄비는 그 순간의 실망감을 빨리 잊고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보다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를 다시한번 뜨겁게 생각하는 것이다. 정치도 마찬가지이다. 대책 있는 냄비와 대책 없는 냄비의 차이는 우리공동체의 미래를 좌우하는 척도가 될 것이다.
제14호 12면 2007년 8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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