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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人/정창수ㅣ색깔있는 역사스케치

'서울 공시생'

색깔있는 역사스케치 [8]

 

공시생이라는 말이 있다. 국어서전에도 등장할 정도로 이미 일반어가 되어버린 이 말은 ‘공무원시험준비생’의 약자이다. 이미 공무원시험은 사회현상의 하나로 자리잡았고 많은 사람들의 에너지가 공무원시험에 몰려있다.

공무원시험은 과거제도의 연장선상에 있다. 조선시대에 과거제도가 중요했던 것은 조선은 군주국가가 아니라 양반관료국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선의 양반은 과거에 합격해야만 했다. 과거에 합격해야만 관직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야 양반신분이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공신이거나 3품이상의 고위관료일 때는 자식이나 사위 중에서 간단한 시험을 통해 관리에 임용해주는 제도가 있었으나 대부분 하위직에 머물렀다.

그러니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은 지금의 공무원시험 스트레스와 비교할 수 없었다.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은 항상 과거시험 중 이었다. 당시 학당과 향교 등에 있는 학생이 1만에 달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생원진사가 되기 위해서도 경쟁률이 100대 1에 이를 정도였다.

그래서 정조시대에는 일시적으로 2만4천명이나 되는 과거 응시생이 몰려들었다. 당시 서울인구가 16만명 정도에 불과하였으니 서울은 수험생으로 만원이었던 셈이다. 이들은 시험기간 뿐 아니라 여력이 되면 한양에 눌러앉아 시험준비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력이 없는 경우는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고 그들에게는 한양에 한번 다녀오는 것도 커다란 부담이었다. 따라서 빈부격차가 과거시험결과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보통 35세 정도가 생원사시 합격의 나이였다. 조선초기에는 평균 25.72세였으나 19세기에 이르러서는 37.81세가 되었으니 그 나이에 과거에 합격하는 것은 양반이라는 신분증을 얻은 것에 불과 한 것이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생원, 진사 급제자가 4천649명이었고 문과 급제가 수가 1만4천607명이었는데, 이들의 성관(가문)은 1천442개와 748개였다. 당시 세종실록 지리지에 나온 전국 성관수는 4천447개였으니 양반이란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수 있다. 더구나 100명이상 배출한 가문은 39개에 불과했다. 그중에서 전주이씨 왕족만 7백여명에 이르렀으니 소수가문에 의한 집중은 매우 심하였다.

서울공시생이라 불리우는 현상이 생겨났다. 서울시가 몇년 전부터 모든 지역 출신자들에게 시험응시를 할 수 있게 해준 결과 엄청난 수의 수험생이 서울로 몰려든 것을 보고 생겨난 신조어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얻은 것은 무엇인가. 예전에는 신분이라는 것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무엇 때문인가?  공무원사회에 대한 막연한 동경도 아니다. 안전한 직장이라는 것, 상대적인 특권들 때문이다.

무엇이 이렇게 사회를 만들어 가는지 우리들은 알고 있지 않은가. 조선 때는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지만 지금은 다르지 않은가? 더 이상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도 이러한 기현상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정창수 역사기고가

 

제12호 10면 2007년 7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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