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있는 역사스케치 [6]
국민이 직접 투표를 하는 직접선거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지 않다. 특히 투표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으로 인정받고 난 다음에도 직접·평등선거가 진행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니 고대 민주정치의 대명사로 불리는 그리스에서도 아테네는 전체 24만 명 중 노예와 여자, 미성년을 뺀 성인남자 3만5천 명만이 유권자였고 스파르타는 22만 명 중 성인남자 1,500여 명만이 유권자였다.
만시지탄, 세계화 초석
2천여 년이 지난 후 영국에서는 백 년에 걸친 차티스트 운동을 통해 평등선거권을 획득했다. 처음 영국은 1689년 명예혁명때 처음으로 선거법을 만들었다. 그런데 산업혁명이 치루고 나서 1832년에 이르자 상황이 바뀌었다. 인구가 크게 바뀐 것이다.
그래서 50명이 한 의원을 뽑는 일까지 생겼다. 반대로 인구 10만이 넘는 멘체스터와 버밍햄 등에서는 1명의 의원도 선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전통이며 합법이라는 이유로 변화를 거부했다.
하지만 폭동까지 일어난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선거법을 개정하게 되고 비상식적인 선거구는 폐지되었다. 하지만 재산에 따른 선거제도로 인해 선거권을 가지지 못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차티스트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후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에서 여성에게도 선거권을 주어지자, 1928년에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고 1948년에는 부자들이 2표를 행사하던 복수투표제까지 폐지함으로써 마침내 선거법 개정을 완성했다. 이때서야 비로소 1인1표의 시대가 온 것이다.
300여 년에 걸친 영국의 선거법 개정은 시민과 노동자의 투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직접 이해가 걸린 국회의원들이 국민의 이익을 대변해서 선거법을 올바르게 개정하는 선한 마음씨를 가질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평등선거는 1948년이지만, 선거는 일제시대부터 있었다. 일본은 3·1운동이 일어난 후 이른바 ‘문화정치’라는 개량화 정책을 편다. 그 중 주목할 만한 것이 ‘지방자치제’의 실시였다. 병합 이래 참정권획득운동을 끊임없이 전개해온 친일세력과 개량주의자들의 불평불만을 들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1920년부터 지방제도를 대폭 개편하여 부附·도道·면面에 의회나 협의회 같은 의결기관과 자문기관을 설치했다.
재외동포까지 확대해야
그러나 이 제도의 진정한 본질은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적 지배계급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지방세 5원을 납부한 사람에게만 투표권을 주었기 때문에 유권자는 전체 조선인 중 1.17%(1920년)인 1만여 명에 불과했다. 선거 결과 1931년 결과 부회(14개 부)는 일본인이 62%, 읍회는 일본인이 49%를 차지했다.
28일 헌법재판소가 재외국민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역사적인 판결을 했다. 매우 늦었지만 다행이고, 이 기회에 재외동포들까지도 기회를 주었으면 좋겠고 안으로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도 주었으면 한다. 그것이 진정한 세계화가 아닐까?
제10호 10면 2007년 7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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