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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人/정창수ㅣ색깔있는 역사스케치

엄청난 떡 값, 조상들은 알까?

색깔있는 역사스케치 [6]

박정희 정권시절인 제3공화국때 공무원들에게는 추석과 설 명절이면 ‘효도비’라는 명목으로 소액의 보너스가 지급되었던 적이 있다. 이것이 일부의 사람들에게는 ‘떡값’으로 불렸다. 명절의 차렛상은 조상들에게 효도하는 의미에서 중요한데 이 소액의 효도비는 차렛상을 차릴때 올릴 떡을 맞추면 끝났기 때문이다.

또 자녀의 혼례나 이사 같은 경우에도 떡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럴 때 같은 부서의 사람들이나 주변사람들은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으로 부조하면서 떡값으로 쓰라고 했다. 실제로 가장 많이 들어가는 돈은 단연 떡값이었다. 그래서 상호부조의 뜻이 들어 있었다.

우리 속담에 ‘밥 위에 떡’이라는 말이 있다. 이미 가진것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데 더 주어서 더 바랄것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만큼 떡은 별식이었다. 그래서 우리조상들은 정월 초하루에는 가래떡을 먹기 시작해 초삼일에는 싱검초편, 삼색주악, 각색단자를, 보름에는 약식을 먹었다. 음력 2월 중화절에는 솔떡을 먹었는데 이는 본격적인 농사철을 앞두고 노비들에게 주는 보너스 떡이었다.

3월 삼짓날에는 진달래와 개나리가 만발한 들판에서 부녀자들만 모여 진달래 화전을 지지면서 하루를 즐겼다. 단오에는 수리지떡과 쑥떡을 먹으면서 모내기의 노동을 이겨냈다. 8월 한가위에는 햅쌀로 송편을 빚고, 무나 호박을 섞은 시루떡, 인절미, 밤단자, 토란단자를 만들어 먹었다. 10월에는 선산에 올라 햇곡식으로 고사떡을 만들어 조상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렇듯 우리의 조상들은 일년 내내 떡이 늘 함께 있었다.

떡이 이렇게 우리 삶에 배어 있는 것은 농경생활 때문이다. 그 전까지는 주로 가축을 잡아 제사를 지냈는데 농경을 시작하면서 가축이 중요한 노동력이었기 때문에 고기대신 떡을 제사상에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동물모양으로 떡을 만들었다가 점차 오늘날과 같은 모양으로 바뀌었다.

굿을 할 때도 떡은 중요한데 백설기와 시루떡은 중요한 제물로 쓰였다. 또한 각종의례에도 떡은 중요하다. 돌상에는 백설기와 수수떡을 올리는 데 백설기는 아이에게 혹시 있을지 모르는 재앙을 막고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고자 100명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처럼 우리조상들에게 떡은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한 음식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음식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떡은 뇌물을 은근하게 말할 때 이용되고 있다. 그리고 ‘떨어진 떡고물을 챙긴다'는 표현도 있다.  고물을 엊은 시루떡을 먹을 때 가장 맛있는 부분이 고물이다. 하찮은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요즘은 떡을 잘 먹지 않아서 인지 아니면 떡값 받는 풍토가 사라져서인지 아예 ‘커미션(구전)’으로 이 부분을 말하기도 한다. 아직도 검찰에서는 얼마 이하면 수사를 하지 않는 떡값 관행이 남아 있다. 또한 얼마전 모 의원 및 재벌회사에게 엄청난 액수의 떡값을 받은 검사들이 드러나기도 했다. 일단 액수를 봐도 엄청난 떡값이다. 그 돈으로 매일 제사를 지낼 리는 없고, 문제는 그 개인의 치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막대한 사회적 비용으로 국민들에게 돌아올 현실이 안타깝다.


정창수 역사기고가

 

제9호 12면 2007년 6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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