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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人/정창수ㅣ색깔있는 역사스케치

운하는 흘러간 옛 노래

색깔있는 역사 스케치 [4]

사람이 물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런데 물은 필수적인 넘쳐도 문제이고 모자라도 문제이다. 그래서 홍수조절을 위한 관개시설은 원시농경사회부터 아주 중요한, 생존을 위한 사회적 활동일 수밖에 없었다. 나일강의 홍수에 시달렸던 이집트나 벼농사를 위한 대단위 수리시설이 필요했던 중국에 대도시가 발달하고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가 성립될수 있었던 것도 물로 인한 자연조건이 사회적인 배경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처음에 인류는 물길을 파서 홍수조절을 위한 인공적인 관개를 했다. 여기에는 막대한 인력이 필요했다. 그러다가 물길을 보다 넓고 깊게 만들어서 배를 띄우면서 운하가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의 대운하는 서기 5세기에 시작해서 20세기 초에 완공됐다. 우리가 흔히 아는 수양제는 그 과정에서 백성들의 반발로 몰락한 황제이다.

국가체제가 약했던 유럽에서는 12세기에 이르러서 베네치아가 바다에 면한 늪지대에 운하를 파서 훌륭한 도시국가를 건설했다. 타국가들로부터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한 생존을 위한 노력이었다. 그 후 영국은 1770년대 들어 하천을 잇는 운하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프랑스도 지중해와 대서양을 연결하는 운하를 건설했다. 미국도 건국 초 부터 대규모의 운하를 건설하였다.

하지만 이런 운하건설 붐은 1830년 들어 수그러들었다. 그것은 새로운 대규모 교통수단인 철도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운하로 운송되는 물량은 대폭 감소했고, 운하들이 방치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늘날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 운하는 손꼽을 정도이고 관광용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론적으로 운하는 그나마 관광용으로 사용되는 정도이고 이마저 비경제적이어서 상당수 국가가 적자상태에 있다. 그나마 새로 건설된 것은 없고 역사유물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재미있는 것은 도로와 자동차가 발달하자 경쟁력을 상실했다는 점이다.

우리역사에서도 운하가 등장한다. 태종때 신하들이 한강부터 남대문까지 운하를 파자고 주장하자 “우리 땅이 운하를 파기에 맞지 않아서 중국처럼 운하를 팔수 없다”라고 거부했다. 하지만 관료들이 기술적으로 가능하고 1만명이면 충분하니 일단 한번 시험해보자고 하자 재차 주장하자 백성들의 고통이 원래 거부하는 이유라면서 끝내 듣지 않았다고 한다.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진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경제성은 중요하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나 통하는 경제성은 없다. 자동차나 도로마저도 이제는 경제성논란에 휩싸여 철도가 보완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운하에서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파나마운하의 증축이 결정되었다. 그런데 예상밖으로 파나마운하를 통과하는 선박은 하루 기준 38~40대에 불과하고 2005년도 파나마정부에 4억8900만달러 수익을 준 것이 전부이다.

가난한 파나마에서야 이정도 돈이라면 환경이던 어떤 문제건 상관없이 추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 이유없이’ 전 국토를 파헤치자고 하는 시대착오적인 건설족들을 보노라면, 그나마 국가인프라 건설이라는 부분만큼은 진정성을 가졌던 수양제가 위대해 보이기까지 하다.


정창수 역사기고가

 

제7호 10면 2007년 6월 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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