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주로 계몽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중국의 과거제도를 소개하고 이를 시행할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시 귀족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의 관료제도를 이상적으로 생각하였다. 황제를 제외하고는 평등한 사회로 생각한 것이다. 과장되었지만 출신계급이 아니라 시험을 통한 실력으로 관직이 열려 있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영국에서도 1853년에는 문관시험을 시행해 나가게 된다.
조선도 족집게 과외 선생
동양에서 과거제도가 시행된 나라는 중국과 한국, 베트남 정도이다. 그런데 발상지인 중국보다 조선이 과거제도가 더 활발했다. 중국은 조선시대에 상응하는 명&청시대에 과거 합격자수가 5만1천여명에 불과했다. 조선5백년간에는 합격자수는 사람마다 조금 기준에 차이는 있지만 14,000여명이 넘었다. 인구가 20배정도 차이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조선의 과거합격자의 수는 중국에 비해 5배나 많았다고 볼수 있다.
그런데 조선은 숫자가 많을 뿐만 아니라 집중현상도 심했다. 3백명 이상의 합격자를 배출한 집안이 전주이씨 843명을 비롯해 다섯이나 되었다. 1백명이상은 38가문에 7천502여명에 이른다. 약 1%의 동족집단이 과반수이상을 차지한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경제력 때문이다. 과거는 서울에서만 시행되었고 임시시험이 잦았다. 그래서 지방수험생들은 매우 많은 비용이 들었고 서울에 있어도 항상 시험을 볼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불리했다. 경제력이 시험을 좌우하고 그렇게 해서 관직에 오르면 경제력이 보장되고 그래서 세습되고 이런 악순환이 생겨난 것이다.
제도자체도 문제였다. 중국은 사서오경43만자를 외우면 됐고 우리나라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원래의 목적은 기능적인 것보다는 철학적인 통치자로서의 관료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었지만 암기시험으로 전락하고 무능한 관료만을 양산해낸 결과가 되었다. 조선에서는 ‘거벽’과 ‘서수’라는 족집게 과외선생까지 활동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과거가 쓸모없다는 한탄과 상소가 줄을 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공감했지만 변화하지 못하고 갑오경장때까지 과거는 계속되었다. 중국과 조선의 쇠락에는 과거제도의 문제도 있었던 것이다.
고시촌 전락한 대학
정조때에 10만이나 시험을 볼 정도여서 서울은 과거시험으로 먹고산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10만이 다른 일도 안하고 이후 쓸모도 없을 과거만 보고 있었으니 ‘과거 망국론’이 나올만하다. 과거시험은 지금의 고시이다. 최근 고시의 선발인원을 증가시키니 응시자도 더 늘어났다. 아예 대학은 고시촌으로 전락해버렸다. 과거제도를 본떠 현대세계의 관료집단을 만들어갔던 서구도 탄력 있게 관료충원시스템을 개혁하고 있다. 우리도 이제 역사가 준 교훈을 생각해본다면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획일적인 고시제도는 나라를 망하게 할수 있다. 고시를 없애야 나라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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