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이라는 매체는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진다. 기록상 가장 오래된 것은 로마시대 원로원의 소식을 전했던 『악타디우르나』이다. 기원전 59년 집정관이 된 케사르는 원로원의 의사록과 민회의 의결을 공시하게 했다. 일종의 게시판에다 알리는 형태였는데 역사가들은 이 자료를 인용해 역사책을 만들었다. 일종의 포퓰리스트인 케사르는 대중들에게 권력 내부의 내용을 상세히 알려서 귀족들의 원로원을 견제하려는 의도를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일방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관보였기 때문에 최초라 하지 않는다. 이런 신문은 중국 등 다른곳에도 존재했다. 뉴스는 사회를 이루는 인간들의 기본적인 욕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1660년 독일에서 발행된 일간지『라이프치히 자이퉁겐』이고 이것을 근대신문의 효시로 삼고 있다. 명나라에서도 1638년에 신문이 발행되었다는 기록정도만 있다.
조선에는 개국 초기인 1400년경에 이미 일간 신문이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기별이라고도 불리던 조보朝報라는 일간 관보가 있었다. 삼국시대부터 관보 형태의 신문이 있었다는 기록은 있다.
조보는 승정원에서 만들었는데 국왕의 명령과 지시, 유생과 관리들의 임명 등의 정치 기사가 기본으로 들어가고 날씨나 강우량, 농사의 작황, 천재지변 등 일반 기사에 해당되는 것들도 실어서 서울과 지방의 관서, 그리고 상류계급의 사람들에게 돌렸으며, 1520년(중종15)에는 상공 관계인에게도 배포했다. 때에 따라 분발分撥이라는 호외를 발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사의 뒤에 잘잘못을 평하는 내용이 들어 있어서 단순한 관보는 아니었다.
이렇게 ‘조보’는 1894년(고종31) 갑오개혁까지 매일 발행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관보인 조보가 구독료를 받았다는 것이다. 매달 4냥에서 1냥5전을 지불했다. 이것은 당시에 노비 한명의 연봉이 되는 큰 돈이었다. 하지만 돈을 얼마든 구독대상이 되는 것이 중요했고 또 되려고 했다.
특이한 것은 조보는 인쇄본이 아니라 필사본이었다는 점이다. 내용유출을 막기 위해서다. 이런 논리는 민간의 신문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1577년(선조10) 8월에는 이를 본떠서 식자층 30여 명이 모여 신문을 발간한다. 매일 인쇄·발간해 독자에게서 구독료도 받았다. 이것이 활판으로 인쇄된 세계 최초의 일간신문이다. 그런데 선조가 이를 금지시켰다. 이것이 이웃 나라에 흘러나가면 나라의 기밀을 알리는 결과가 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몇 개월 만에 금지되고 관계자들은 처벌을 받았다. 이 때문에 근대적 인쇄 매체로 발전하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권력자나 지배세력은 정보를 백성들과 나누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정치권력에 더하여 자본권력이 언론을 독점하면서 이런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제 새롭게 시민사회신문이 창간되었다. 진정한 뉴스를 권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의미있는 매체중의 하나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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