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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人/정창수ㅣ색깔있는 역사스케치

공포가 만든 미국의 인종차별

색깔있는 역사스케치 [17]

 

인종차별문제는 어느 사회에서나 있을 수 있는 문제이다. 하지만 미국의 문제는 더욱 특별하면서도 심각하다. 첫째, 흑인들은 처음에는 노예가 아니었다. 이 당시 영국은 공식적으로는 노예제도를 부정한다. 문명국가에 노예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계약직노동자였다. 대부분 기본적으로 7년을 노예처럼 일해야 했는데 영국의 가난한 농민들인 백인들이 대다수였고 흑인이라는 이유의 차별은 아직 적었다. 이때에는 같은 처지에 있던 백인과 흑인의 폭동이 많이 발생했다. 더군다나 1670년대 이후에 흑인의 수가 20%를 넘어가자 기득권에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노예제도를 합법화 하고 통제를 시작한 것이다. 백인을 분리시킨 것이다.

둘째, 미국독립전쟁당시 노예제도에 관한 언급이 없었다. 독립전쟁 당시 많은 흑인들이 군인으로 복무했는데 이것은 백인들이 징병을 피했기 때문에 어쩔수 없는 고육책이었고 이미 독립전후로 북부의 주들은 노예제도를 폐기했다. 노예제농장이 주축인 남부 버지니아 출신인 워싱턴이나 제퍼슨 같은 사람들이 독립혁명이념에도 어긋나는 제도이기는 하지만 굳이 없애려는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노예제도가 저절로 없어지지 않겠느냐는 기대도 있었다. 다른 나라들도 노예제도 금지가 대세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갈등을 봉합하는 차원에서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다.

이런 조건 속에서 아메리카에서 두 번째로 독립한 흑인공화국 아이티의 독립은 백인 지주들에게 공포가 되었다. 흑인들이 공화국을 세운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흑인을 지지한 북부와 이를 저지하려는 남부는 이미 남북전쟁의 불씨가 만들어지고 있었던 셈이다.

이러다 20세기 들어 대규모의 유럽난민이 들어오면서 흑인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감소한 결과를 가져와 흑인차별은 지속되었지만 사회문제는 표면적으로 다소 완화되었다. 더구나 뉴딜정책이후에 좌파적인 정책의 시행결과 사회에 다원적인 요소가 상당히 신장되었다. 더구나 1960년대 민권운동과 흑인국가가 생겨난 국제정세도 한 몫을 했다.

아무튼 표면적으로는 차별이 다소 완화 되었지만 빈곤의 굴레를 벗어나는 근본적인 혁명이 되지는 못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미국의 흑인 젊은이가 가장 많이 종사하는 직업 3가지는 교도소와 대학, 군대라고 한다. 2000년 기준으로 각각 80만, 60만, 31만이 이 3가지 일을 하고 있다. 이들의 현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미국은 다시 인종문제에 관한 공포에 휩싸여 있다. 그것은 소수인종이 다시 20%를 넘은 것이다. 흑인을 넘어선 히스패닉계가 대표적이고, 아시아계도 만만치 않은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다시 보수적인 분위기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소수민족우대정책(인종우대법)이 폐지되는 것도 이런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일찍이 없었던 영어만을 공용어로 인정한다는 법을 만드는 주들도 생겨났다. 최근 미국에는 6명 중에 1명이 영어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이에 대한 보수적인 대응이다. 미국은 다시 이유 없는 공포에 빠져들고 있다.


정창수 역사기고가

 

제22호 10면 2007년 10월 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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