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말기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친러파 내각이 성립되자 때 각 열강들은 이권쟁탈전이라는 또 다른 전쟁을 치루었다. 러시아가 한국에서 각종 이권을 차지하게 됨에 따라 다른 열강은 한국정부를 상대로 이권쟁탈에 경쟁적으로 열을 올리게 되었다. 그 결과 1896년 3월 미국인 모스가 경인(京仁)간 철도 부설권을 얻어냈다.
열강 이권쟁탈의 역사
모스는 본국에서 자본주를 찾다가 실패하자 1899년 그 권리를 일본에게 팔아넘겼고, 그 해 9월 일본은 경인철도주식회사(京仁鐵道株式會社)를 통하여 제물포~노량진 사이 33.2km 철도를 완성하였다. 이것이 한국철도의 시초이다.
이것은 우리 역사의 근대화의 여명을 알리는 기적소리였다. 그러나 그 기적소리는 희망의 빛과 절망의 그림자를 갖고 있었다. 그 후 일본은 계속하여 경부선의 부설권도 획득하여 경부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고 1903년 경인철도주식회사를 흡수하였다. 이 비용은 고스란히 우리의 국가 부채가 되었다. 이 빚은 일본이 우리를 합병할 때 주요한 근거가 되었다.
1907년 당시 조선은 일본에 1천300만원 가량의 부채가 있었다. 이중 대부분이 철도 부채였다. 그래서 철도보상운동이 국채보상운동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대구의 대한매일신보를 중심으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2천만이 3개월간 흡연을 끊고 그 돈으로 부채를 갚자”고 주장했다. 그 결과 4만여명이 참여해 230만여원을 모금했다. 당시 쌀 한 가마가 3원이었으니 엄청난 돈이다. 고위관료나 부유층이 참여하지 않은 상태에서 가난한 민중들과 기생들까지도 참여하였다.
국채보상운동 계기로
물론 일본은 국채보상운동을 탄압하고 유야무야 시켜버린다. 국가부채를 이유로 합병했지만 그들의 목적은 빚을 받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 확보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금유용을 이유로 대한매일신보의 베델과 회계책임자인 양기탁에게 30만원을 횡령했다면서 구속한다. 이후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기는 했지만 탄압과 분열로 운동은 무산되었다.
일본은 철도운임에서도 차별정책을 시행했다. 철도운임정책은 단고원저(短高遠低)정책인데 단거리 승객(50마일미만)은 높게 받고 장거리 승객은 낮게 받는 정책이었다. 당시 단거리 승객은 승객의 80%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주로 조선인들이었다. 장거리 승객은 주로 일본인들이었다. 이것은 의도된 정책이었다. 당시 일본철도의 간부인 니시노 게이노스케(西野惠元助)는 조선인 차별을 철폐하라고 강력히 주장하기도 하였다.
도로와 철도의 균형을
다시 교통대란이 예상되는 추석이 다가왔다. 이럴 때는 교통의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철도의 의미가 더욱 부각되기도 한다. 도로교통과 철도교통의 균형을 생각하면서 철도의 역사를 짚어봤다.
제21호 10면 2007년 9월 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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