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조사는 처음 시장조사에서 시작되었다. 마케팅을 위한 자료를 제공했다. 그러다 미국에서 대통령선거결과를 사전에 예상하는 모의투표가 시작되면서 여론조사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최초의 여론조사는 1824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본격적으로는 20세기초가 되어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15세기 조선서도 했다
처음에는 ‘리터러리 다이제스트’사가 가장 유명했는데 전화나 자동차등록명부를 이용하여 대량의 모의투표용지를 송부해 회수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 회사는 1936년 루스벨트 대통령 당선시에는 큰 오차를 발생시켰다. 1천만부를 발송한 이 회사는 예측이 크게 틀리고 3천장의 소수 표본 중심으로 예측한 ‘갤럽’ 등이 정확한 결과를 도출하면서 신생회사가 새롭게 떠오른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지만 이후 현대인의 모든 생활에서 여론조사는 생활에 끼치는 영향이 지대해졌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여론조사를 먼저 시작했었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12년인 1430년 17만2천468명의 의견을 묻는 최초의 여론조사가 있었다. 이때 조선인구를 대략 6백만으로 보는데 절반이 노비인 것을 감안하면 3가구 중 1곳은 조사에 응한 것이다.
여론조사는 공법이라 불리는 세법시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당시에는 담험손실법으로 관리가 직접 논밭을 돌면서 수확량을 확인하여 세금을 물리고 있었다. 하지만 관리의 자의적인 판단으로 백성들의 피해가 많았다. 그래서 이것을 1결당 10두의 정액세로 바꾸려고 한 것이었다.
결과는 찬성 9만8천657명, 반대 7만4천149명으로 찬성이 57%였다. 조사기간은 무려 5개월이었고 조사방법은 1대1면접일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이한 것은 상대적으로 땅이 비옥한 영호남은 찬성이 반대를 압도하였고, 척박한 서북지역은 정반대였다. 또한 3품이하 하급관리들은 찬성이 많고 고위관리들은 반대의견이 많았다. 지역별, 계층별로 이해 관계에 따라 의견이 갈린 것이다. 이후 관료들의 반대로 속도가 늦어지기도 한 공법은 연분9등법 등으로 절충되기는 했지만 우리세법의 기본이 되어서 대한민국 성립 때까지 이어진다.
세종이 이렇게 대규모의 여론조사를 실시한 이유는 백성들의 뜻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 뜻으로 정책의 방향을 잡으려고 했던 것이다. 세종도 역시 성군이었지만 여론조사가 무리 없이 진행되고 반대도 자유스러웠다는 점에서 놀랍다.
숫자는 숫자에 불과
아무튼 여론조사는 여론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기재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여론이라는 것은 숫자로 측정하기 어려운 여러 문제가 있다. 때로는 잘못 반영하기도 하고 조사결과가 판단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현재 우리 정치의 모든 판단에 영향을 끼치는 여론조사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는 소리가 높다. 투표는 숫자에 불과할 수 있다. 종합적으로 판단할 뿐만 아니라 찬반으로 가르기 어렵기 때문이다. 숫자는 숫자에 불과하다.
제20호 10면 2007년 9월 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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