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늦자락 아카시꽃 향 지천으로 날리는 산비얄에 황금빛 햇보리가 한창이다.
최근 들어 보리밥과 보리가 건강을 위하는 웰빙 식품으로 각광받으면서 농촌의 들녘에서 보리밭을 만나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
보리는 늦가을에 파종을 해서 그 해 겨울을 넘긴 뒤 이듬해 여름에 수확을 하는 1년생 먹거리용 농작물이다.
60~70년대 농촌에서 학교를 다녔던 많은 사람들은 겨울방학이 시작할 무렵 학교 가는 길 양편에 파릇파릇 새순을 피워 올리는 보리밭의 기억을 쉽게 떠올릴 것이다.
특히 겨울방학을 마치고 새 학년으로 오르는 봄방학 무렵, 어린 학생들이 선생님과 함께 ‘보리밟기’에 나서는 일은 주요한 학사일정의 하나였다.
당시 아이들은 언 손을 호호 불며 보리밟기를 하면서 추운 겨울 언 땅을 뚫고 세상에 초록의 생명을 피워 올리는 보리의 강한 의지를 가슴 속에 새기곤 했다.
황금빛 보리알에 묻어 나오는 지독한 가난의 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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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효선 기자 |
보리는 먹을거리가 턱없이 부족했던 6,70년대, 지독하게 가난했던 보릿고개의 서러운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오늘날에는 웰빙작물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 보리는 이처럼 강인한 생명에 대한 기억만 제공해주는 것이 아니라, 먹을거리가 부족해 늘 주린 배를 움켜쥐고 유년의 시절을 보낸 지독한 가난의 기억도 함께 두들겨 주곤 한다.
24절기 중, 소만 무렵인 3월 그믐부터 4월까지는 보릿고개길 중에서도 가장 넘기 어려운 시기였다. 한 해 동안 힘들여 지은 농사를 갈무리해 놓은 뒤주(독) 속 식량은 밑이 보일 만큼 바닥이 나 있다.
몇 됫박 남지 않은 쌀은 조상제사 몫으로 손도 댈 수 없었다. 조상모시기에 쓰일 먹거리를 갈무리하는 일은 산 사람의 먹거리를 충당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우리네 풍속이자 규율같은 것이었다. 이 무렵 허기진 우리네 밥상을 독차지 하는 먹거리는 좁쌀과 보리쌀과 감자였다. 좁쌀 한웅큼에 감자를 듬성듬성 꼽아 허기를 채우는 잡곡밥이 주식이었다.
1940년대에서 60년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빼놓을 수 없는 먹거리가 꾹죽이다. 꾹죽은 '국'과 '죽'의 합성어로서 '국처럼 끓인 죽'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좁쌀이나 보리쌀 한 줌에 갖은 산나물을 넣어 끓인 꾹죽. 60년대 우리 어버이들은 이 꾹죽으로 보릿고개를 힘겹게 넘어왔다.
꾹죽은 적은 양의 곡식으로 많은 식구들의 허기진 배를 다독일 수 있는, 늘여먹는 먹거리이기도 했다. 지독한 가난을 살아 온 우리 어머니들의 지혜가 듬뿍 묻어 있는 먹거리인 셈이다. 곡식 한 식기로 밥을 지으면 서너 명밖에 먹을 수 없었지만, 곡식 한 식기에 지난해에 산으로 들로 다니며 장만해 놓은 묵나물이나 어쩌다 어렵게 장만한 생선을 넣고 물을 넉넉하게 부어 끓인 꾹죽은 적어도 열 명 정도는 허기를 때울 수 있는, 온 식구의 성찬이었다.
꾹죽도 마을마다 차이가 난다. 산간농촌마을에서는 주로 좁쌀이나 쌀에 나물을 넣어 끓인 반면, 바닷가마을에서는 좁쌀에 미역이나 생선을 넣어 끓였다. 그나마 이는 농사께나 짓는 집의 얘기이고 부칠 땅뙈기 하나 없는, 꾹죽도 못끓여 먹을 형편인 집에서는 아카시꽃이나 감꽃을 따다가 '꽃죽'을 끓여 먹었다.
꽃죽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꽃을 따다가 밀가루나 콩가루를 무친 뒤 끓는 물에 넣어 죽처럼 끓인 것이다.
어미들은 하루종일 남의 밭일과 방아일을 거들어 주고 디딜방아 공이에 남아 있는 보릿겨와 쌀겨를 얻어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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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효선기자 |
꾹죽으로 넘기던 보릿고개길이 4월이 되면 더욱 가팔라진다. 매일 밭에 나가보아도 보리는 좀처럼 익을 기미가 없다. 아껴 아껴 먹던 좁쌀은 이미 바닥이 훤하다.
우리네 아버지들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거름에 낫을 들고 풋보리를 한 땀씩 베어왔다. '짝두보리'라는 무시무시하고도 서러운(?) 이름이 탄생하는 무렵이다. 낟알을 누르면 하얀 물이 물컹 나오는 덜 익은 풋보리를 손작두로 잘게 썰었다. 이삭과 함께 보리대궁도 함께 썰었다.
6·70년대 개발주의의 버팀목은 ‘짝두보리’ 짝두보리는 이렇듯 작두로 썰었는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일단 작두로 썰은 풋보리는 디딜방아로 빻았다. 디딜방아로 빻으면 허연 물이 툭툭 터져 나왔다. 이렇게 빻은 보리를 볕에 말린 뒤 그 가루를 디딜방아로 빻았다. 다시 빻은 보리가루는 눅눅한 기운을 없애기 위해 솥에 넣고 바삭하게 볶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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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효선기자 |
보리가 채 익기도 전, 먹거리를 장만하기 위해 풋보리 한 줌을 베어 '작두보리범벅'을 해먹었다. 작두보리범벅은 작두로 보리를 썰어 먹거리를 장만한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
이렇게 볶은 보리가루를 감자와 함께 쩌서 먹거나 뭉글하게 끓여 범벅을 해 먹었다. 꾹죽을 먹기도 어려운 집에서는 울며겨자먹기로 '짝두보리'를 먹을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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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두보리로 힘겹게 4월 보릿고개를 넘긴 5월 무렵이면 산비얄을 일군 밭은 찬란한 황금빛으로 보리가 팬다. 이 때 쯤이면 지긋지긋한 꾹죽과 짝두보리에서 조금은 멀어질 수 있다. 햇빛이 쨍쨍하게 내리쬐는 여름의 밥상은 감자를 으깨어 넣은 꽁보리밥과 매운 풋고추와 고추장과 우물에서 갓 길어 올린 샘물 한 그릇이 전부였다. 그래도 꾹죽이나 짝두보리범벅보다는 훨씬 나은 먹거리이다. 가끔씩 집 주변의 빈터에 뿌려놓은 열무니 오이, 가지, 상추, 애호박, 고구마줄기로 장만한 나물무침이 곧잘 밥상에 오르기도 했다.
5~6월에는 점심을 굶는 경우는 드물었다. 한창 바쁜 농사철이어서 점심은 반드시 챙겨먹어야 힘을 쓸 수 있었다. 줄곧 보리만 먹다가 7월이 되면 보리쌀이 바닥난다. 이 무렵이면 다시 지긋지긋한 꾹죽으로 배를 채워야 했다. 때문에 이 무렵을 '꾹죽고개'라 불렀다.
여름철 아침에 먹고남은 보리밥은 고지바가지에 담아 삼베보자기로 덮은 뒤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보관해 두었다. 고지바가지가 물기를 잘 빨아들이기 때문에 한 낮에 먹어도 뽀송뽀송한 보리밥맛을 그대로 살릴 수 있었다. 우리네 어버이들은 '햇보리농사'를 거둬들이는 단오 무렵에 잘 익은 보리를 조금베어다 메밥을 지어 '4대조상에게 올리는 단오제'를 지냈다. 보리밥이라도 제 때에 먹게해 준 것은 순전히 조상님 덕이라는 생각에서이다.
"보릿고개를 지나고 햇곡식이 나기 전이 '꾹죽고개'라는 거야. 이때는 한여름이지. 8월달이 되야 햇곡식이 되거든. 그래서 3-4월은 보릿고개고 7-8월은 꾹죽고개야. 고 다음에야 논에서 햇나락을 거두기 때문에 그 때 가면 태평하지."
농삿꾼으로 평생 농사만 지으며 보릿고개를 힘겹게 넘어 오면서 질긴 생명력으로 후손들을 일군 농부의 기억처럼, 보리에 대한 애틋한 기억이 우리들 가슴 속에 오롯이 남아 있는 것은 아무리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자식을 훌륭히 키워내는 우리들의 어머니가 바로 보리를 닮았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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