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뭐라 해도, 그동안 시민사회운동의 역사는 ‘고행’의 역사였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지금만큼의 인권·복지·투명성을 실현하는데 90년대부터 2000년대의 시민사회운동의 기여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죠. 낮은 급여와 복잡한 고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온 시민사회 활동가들께 시민의 한사람으로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최근 다들 ‘시민운동이 큰 위기’라고 이야기합니다.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대체로 그렇다고 여기는 것 같고 필자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기의 원인에 대해서 제대로 된 진단을 접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참여통로의 다양화, 시민운동 반대 세력의 점증, 참신성의 약화, 1인 NGO(UCC)의 출현, 진보정당의 진출과 정당정치의 변화, 정부에 의한 개혁의제의 흡수…. 다양한 진단이 나오고 나름대로 다 근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문제에 우선하는, 시민운동의 위기를 관통하는 핵심은 빠져 있다고 봅니다.
저는 시민운동 위기의 가장 큰 이유는 ‘시민들과 함께 하려는 치열함과 진정성의 부족’ ‘활동가들의 패기와 능동성의 후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들 좋은 뜻을 가지고 모였지만 최근 시민운동이 민중·서민으로서 고통 받는 시민들과 얼마나 함께 했는지, 제대로 치열하게 노력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사회의 많은 발전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많은 시민들이 제기하는 수백 수천가지의 문제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부동산·집 문제로 고통 받는 서민들의 고통을 과정에서도, 결과적으로도 시민운동은 풀지 못했고 시민사회가 전면적으로 대응한 적도 없습니다.
수백만 명의 자영업자들이 호소하는 과도한 신용카드사의 수수료 문제에 적극적인 시민단체를 보지 못했습니다. 시민의 삶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대중교통 이용의 문제, 아파트에서 삶의 문제, 각종 공공서비스의 문제, 핸드폰 등 정보·통신 분야의 문제에 누가 천착하고 있습니까? 몇몇 단체가 애를 쓴 것까지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시민사회 전반이 이런 문제에 대해서 매우 초라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지적을 드리는 것입니다.
또 감히 묻겠습니다. 그 많은 시민들의 억울한 이야기, 하소연, 고충 호소에 귀 기울이고 낮은 자세로(이건 ‘내 문제다, 우리 문제다’라며) 치열하게 함께 한 적이 있는지요. 정부나, 지자체의 각종 고충민원 또는 국민제안 사이트에는 1년에도 수만 건의 글이 올라가고 있는데 시민단체들은 시민상담을 활성화하거나, 제안이나 고충민원을 제기할 수 있는 코너나 그 해결 프로세스를 운영하고 있는지요.
다음에는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주로 만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성찰해봐야 합니다. 평범한 이웃들인가요? 그게 운동을 위해서겠지만, 주로 기자·언론인, 정·관계 인사들, 교수·변호사 등 전문가들, (특히 고액의)후원자들, 동료 활동가들(아마 동료 활동가들을 제일 자주 만나겠죠)일 것입니다. 그런 만남들 속에서 시민운동가들이 평범한 이웃들과 ‘물리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함께 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시민운동의 위기는 이처럼, ‘시민들과 너무 많이 떨어져 있다’는 것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시민’운동인데도 말입니다. 이 같은 ‘시민들과의 거리’가, 흔히들 시민운동의 위기의 원인이라고 말하는 ‘사회의 전반적인 보수화’ ‘시민단체의 영향력 축소’ ‘현안에 대한 시민단체의 대응력 부족’ ‘새로운 이슈 발굴 미흡’ ‘비판·반대세력의 증가’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시민운동에 시민들이 없다는 수구냉전기득권 신문들의 비열한 공격에 분노하면서도 정반대로 ‘시민운동’에 ‘시민’들이 얼마나 있는지 깊이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짜 평범한 시민들이 단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나요? 주요 시민사회단체의 의사결정과정, 문화, 소통 방식은 어떻습니까? 시민들은 후원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기를 바라고, 거의 100% 중요한 결정은 이른바 교수·변호사·활동가·고액 후원자 등 ‘전문집단’의 고유영역이 되어버리지 않았나요? 그 많은 훌륭함과 선의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의 명백한 진실, 시민운동과 시민이 가까이 있지 않다는 것에 가슴 아픕니다. 이건 보통의 시민들께 물어보면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도 그러했는데, 그것이 위기의 원인이 되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잘 나갈 때’는 객관적 상황의 호조 속에서 이 중대한 주체의 문제가 가려져 있었습니다. 객관의 변화 속에서 드디어 문제와 위기의 본질이 제대로 드러난 것이죠.
그럼에도 한국사회의 희망은 시민사회운동에 있습니다. 제 자신도 이 이야기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제 스스로 시민사회의 활성화를 위해 더욱 치열하게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으로 글을 마칩니다. 시민의 바다로 ‘퐁당’ 뛰어듭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