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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人/오피니언

민주공화국의 세 시민

한 농부가 살고 있었다. 예순아홉 살에 이르도록 평생 남의 땅에서 농사를 지었다. 초등학교 ‘기본권’조차 누리지 못했다. 소년 시절부터 소작을 해야 풀칠을 할 수 있었다. 일흔을 앞둔 어느 날, 아스팔트 위에 섰다.

“농민도 사람답게 살고 싶다”며 농민대회에 참석했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이었다. 신고 된 집회장소 안에서 지켜보던 늙은 농부에게도 경찰의 진압봉과 방패는 살천스레 찍혔다. 머리, 입, 코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고통 속에 병원으로 실려 갔다. 하지만 등뼈와 목뼈가 손상되었다. 뇌와 몸을 이어주는 척수가 다쳐 사지가 마비됐다. 10시간이 넘는 수술을 받았으나 끝내 숨졌다. 그렇다. 언론인으로서, 조금도 보탬 없이 쓴다. 늙은 농부는, 대낮에 ‘공권력’에 맞아 죽었다.

늙은 농부가 참혹하게 숨진 뒤 열 달도 지나지 않아서다. 대한민국에 한 노동자가 살고 있었다. 마흔다섯 살 이르도록 건설 현장에서 일했다. 화장실도, 구내식당도 없는 일터에서 비바람 맞으며 비정규직 일용노동자로 애면글면 살아갔다. 대한민국 대표기업인 포스코 앞에서 부당노동행위에 항의하는 집회에 참석했다. 그곳이 삶의 마지막이었다. 공권력에 에워싸여 온 몸에 피멍 들도록 발길질 당했다. 방패에 찍혔다. 갈비뼈와 두개골이 골절되었다. 그렇다. 한 점 과장 없이 쓴다. 중년의 노동자를, 공권력은 때려죽였다.

다시 열 달이 채 지나지 않아서다. 대한민국에 50대 민중이 살고 있었다. 그 분을 잘 아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중처럼 생긴 민중, 농민처럼 생긴 노동자, 말수 없는 실천가, 어디서나 똑똑한 척 하지 않고 소처럼 빙긋이 웃는 그 모습, 마음 깊은 곳에 심장에 남는 미소, 무공해 중에서도 가장 무공해 민중.”

누구든 그 분과 마주친 사람은 공감할 터다. 평범한 농부의 9남매 가운데 다섯째로 태어났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중국집 배달을 비롯해 생활전선에 내몰렸다. 쉰 네 살까지 홀로 살았다. 달동네 지하 단칸방에 살면서도 월급 120만원을 쪼갰다. 진보정당은 물론, 여러 시민단체에 회원으로 꼬박꼬박 회비를 냈다. 사납금에 쫓기면서도 틈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철원군 농민들이 경찰에 연행 당했을 때다. 주름이 깊은 택시노동자는 경찰서 앞에서 새벽까지 농민들을 기다렸다. 대중교통이 끊어진 시각이기에 기다렸다가 철원군까지 태워줬다. 결코 녹록치 않은 생업으로 언제나 피곤했지만 집회와 시위 현장에 꼬박꼬박 참여했다. 저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반대 집회에서도 누구보다 열정을 쏟았다. 바로 그 대통령이 살아나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강행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싸우던 그는 협정 타결이 임박하자 기어이 자신의 몸을 살랐다. 불덩이가 되어서도, 구급차에 실리면서도 마지막까지 외쳤다. “한미 FTA 중단하라.”

더러는 지금이 분신자살 할 때냐고 사뭇 눈을 흘긴다. 하지만 그 분의 유서는 윤똑똑이들을 날카롭게 고발한다.

“토론을 강조하면서도 실제로 평택기지 이전, 한미FTA에 대해 토론한 적 없다. 숭고한 민중을 우롱하지 마라. 실제로 4대 선별조건, 투자자 정부제소건, 비위반제소건을 합의해주고 의제에도 없는 쌀을 연막전술 펴서 쇠고기 수입하지 마라. 언론을 오도하고 국민을 우롱하지 마라.”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 살았던, 그러나 지금은 지상에 없는 세 분의 존함은 홍덕표, 하중근 허세욱이다. 농부, 노동자, 민중이다. 앞에 두 분은 어느새 잊혀졌다. 대다수 신문과 방송이 모르쇠 한 탓이다. 50대 택시노동자도 어느새 잊혀가고 있다. 그 분이 몸을 불사르며 호소했지만, 바로 다음날에 노 정권은 미국과 협정 타결을 발표하며 의기양양했다. 대다수 신문과 방송은 찬가를 합창했다. 마치 곧 선진국이라도 될 듯이 곰비임비 나팔을 불었다.

신자유주의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정신이라는 허구를 저 부라퀴들은 마구 퍼뜨리고 있다. 신자유주의 아닌 ‘새로운 사회’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진실을 저들은 은폐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로 고통 받거나 죽어가는 노동자, 농민, 빈민, 바로 그들이 시민임을, 시민의 절대다수임을, 우리도 시나브로 망각하고 있다. 세 시민의 영전 앞에 새삼 통곡하는 까닭이다.



 

 

손석춘(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장)

 

제1호 27면 2007년 4월 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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