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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人/오피니언

‘시민’은 있는가?

[시론]

 

“이랜드 불매운동! 시민의 힘으로 나쁜 기업 퇴출하자!”

이랜드 집회장에서 볼 수 있는 피켓 내용이다. ‘시민의 힘’이란 표현이 눈길을 끈다. 한국사회에 시민의 힘이란 것이 있는가. 아니, 시민은 존재하는가.

이랜드 사태가 출구를 찾지 못한 채 장기화되고 있고 당사자인 700여명 여성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고 있다.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노동계가 전력투구를 하고 있지만 이렇다 할 돌파구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이랜드 매장에 전경을 배치시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역할을 못하고 있고, 이랜드 사용자 쪽은 경총의 코치를 받으며 총자본의 대리전을 충실히 치루고 있다. 시민사회단체는 이랜드의 부당해고조치를 비판하며 불매운동을 선언했지만 별 다른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적 의제에 대한 사회적 문제해결능력이 매우 낮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풍경이다.

좀 더 큰 시각으로 보자. 이랜드 문제는 ‘월급 80만원의 비정규직 아줌마들’이 겪는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1970년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아무런 희망의 결실을 맺지 못한 채 2000년대에 더 많은 난장이로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우리 사회가 나아가는 방향이 어떠한가를 ‘난장이’와 ‘아줌마’가 보여주고 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는 있되 노동하기 좋은 나라는 오간데 없다. 노동 문제는 언제나 경제의 하위변수일 뿐이다. 전 국민을 경제적 동물로 만들고 있는 무제한의 경쟁논리는 사회적 약자 운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렇듯 승자독식의 사회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고 있는 사회적 흐름을 제어할 시민의 힘은 존재하는가.

이랜드 사태는 회사가 유통매장 계약직 계산원을 외주화하기 위한 고용조정에서 발단이 되었다. 지난 7월부터 시행된 비정규법의 사용자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고용을 ‘외부화’ 하려고 한 것이다. 계산원을 외주화할 경우 노동법상 사용자책임을 직접 부담하지 않아도 되고 고용조정이 쉬워지며 외주업체간의 경쟁입찰을 통해 비용을 절감할 수도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꿩 먹고 알 먹는 경우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노동자가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이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용은 더 불안해지고 임금은 더 낮아지지만 유통매장의 지시를 받으며 업무를 수행하는 것은 지금이나 외주화된 후나 동일하다.

말이 좋아 아웃소싱이지 형식만 바뀔 뿐 노무제공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일을 부리는 사람이 고용에 대한 책임도 부담하는 것이 당연한 상식이다. 문제는 이러한 기업 행태를 규제할 만한 법제도가 마땅치 않다는 데에 있다. 한 사회의 법제도는 그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들의 의식을 반영하게 마련이다. 기업의 비상식적 행태를 제어할 제도가 없다는 것은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이 왜곡되어 있거나 미발달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삼성처럼 무노조 경영으로 유명하며 노동문제로 구설수가 끊이지 않는 세계최대기업 월마트도 매장 계산원을 아웃소싱한 경우는 전 세계 4천500여 개 매장 단 한곳도 없다는 얘길 며칠 전에 들었다. 월마트의 이윤추구 욕구가 이랜드보다 덜 하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여성차별, 노동시간 위반, 수당 미지급 등으로 5천여 건의 소송이 진행되고 있을 정도로 월마트는 충분히 탐욕스럽다. 다만 그들이 또는 그들 사회의 시민들이 가진 최소한의 상식으로도 한국의 외주화는 인정되기 어려운 상식 이하의 것이다.

작년 초 프랑스를 뒤흔들었던 최초고용계약법이라는 것이 있었다. 26세 미만을 고용할 경우 고용 후 2년 동안은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이었다. 프랑스 정부가 청년실업을 해결하기 위해 도입한 법에 대해 신자유주의 철학에 기반한 노동유연화제도라며 노동자, 학생뿐만 아니라 시민들까지 나서서 1968년 이후 최대의 시위를 벌이게 되었고 결국 만들어진 법은 며칠 못가서 폐지되었다.

노동의 승리라기보다는 시민의 승리였고, 신자유주의에 맞선 사회연대의식의 승리였다. 당시 프랑스와 유사하게 한국에서도 비정규법안을 놓고 노동계와 정부 간에 치열한 공방이 오고갔다. 노동계가 힘겹게 싸웠지만 전 사회적 반대여론을 만들어내지 못했고 결국 그 후과가 이랜드 사태로 돌아오게 되었다.

실종된 상식을 복원해야 하고 마비된 시민의식을 곧추 세워야 한다. 대다수 국민이 일하는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일하는 자로서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경영 논리가 사회 전체를 휩쓸고 있는 사회, ‘의식이 존재를 배반하는 사회’를 극복하기 위해 보다 치열한 ‘전투’가 필요하다. 이랜드 사태를 노동의 영역을 넘어서 시민사회의 성숙을 위한 성찰의 계기로 삼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남우근 관악주민연대 공동대표

 

제17호 18면 2007년 8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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