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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人/오피니언

평화경제를 위한 관계론

대선주자에게 보내는 평화담론[6]

 

요한 갈퉁이 말하는 평화경제의 목표(하단 박스 참조)를 달성하기 위해 평화로운 관계(이하 ‘평화 관계’), 평화지향적인 생산관계(이하 ‘평화적인 생산관계’)를 이룩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인간사회의 평화 관계, 경제주체(주주·경영자·노동자·소비자)간의 평화적인 생산관계를 수렴하는 관계론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필요에 따라 ‘평화경제를 위한 관계론’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간디의 비폭력적인 경제관계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녹색평론사, 2006)의 저자인 마하트마 간디는 마을 스와라지(Village Swaraj)의 비폭력 경제에 관하여 역설한다. 그는 비폭력적인 경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산업주의?중앙 집중화된 산업체들 그리고 불필요한 기계들을 배제하였다. 그는 산업주의의 온상인 도시를 마을 착취의 매개체로 보았다. 그는 강제와 무력이 없고 모든 활동이 자발적인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작고 평화롭고 협력적인 ‘마을 스와라지’(마을 자치)를 꿈꿨다. 그는 판차야트(선출된 몇 명으로 구성되어 마을 일을 돌보는 마을회의) 라지, 즉 완전한 정치권력을 가진 비폭력적이고 자족적인 경제단위인 마을 스와라지의 프로그램을 구상했다. 마을 스와라지는 재산 중심인 서양경제와 달리 인간 중심이다. 그것은 생명의 경제이다.

 

인도의 70만개의 마을들은 하나의 공화국(마을 공화국) 혹은 전권을 가진 판차야트로서 농업·수공업(마을 산업)을 통해 독립적이고 자급자족하는 비폭력(Ahimsa) 경제공동체를 이룬다. 정치적 독립·경제적 자립 기반 위에 세워질 마을 스와라지의 기본 원칙은 △사람우위의 완전고용 △생계를 위한 노동 △평등 △신탁(信託) △탈중심화 △스와데시(민족해방운동의 목표로서 제창된 국산품애용) △자급자족 △협동 △불복종 △종교의 평등 △판차야트 라지 △나이탈림(수공업 일을 통한 국민교육)이다.  

위와 같이 간디는 마을 스와라지의 비폭력 경제가 잘사는 평화의 핵심임을 강조한다. 그는 마을 스와라지의 잘사는 평화를 위해 무소유의 경제학을 설파한다. 간디의 경제관을 기술한 아지뜨 다스굽따의 저서 ‘무소유의 경제학’(솔, 2000)의 주요부분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간디는 스와라지에서 자립·자존의 경제관을 정립했다 △경제와 윤리의 관계는 양방통행으로 같은 것이다. 경제적 개념들에 윤리적 의미가 부가되어야 하며 윤리 역시 고상한 곳에서 내려와 ‘좋은(善) 경제학’이 되어야 한다 △이웃의 원리(principle of neighbourhood)에 입각한 스와데시 △참다운 인도적(humane) 경제학 △참된 경제(true economics) △농촌 실업을 해소하기 위한 물레 잣기 △다르마와 아르카(富)의 합일 △‘인간은 이마에 땀을 흘리고 나서야 자신의 빵을 가질 수 있다’는 ‘빵-노동설(the doctrine of bread-labour)' △ ‘내 것이란 내가 잠시 맡아둔 것일 뿐이다’는 보관인 정신론(the theory of trustship) △ 노동자와 자본가는 동반자이다 △토지는 모두의 것이다 △촌락산업의 진흥 등이다.

필자는 위와 같은 간디의 발상이 노자(老子)의 ‘소국과민(小國寡民) 평화공동체’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이 문제 제기한다.

△소유 중심의 자본주의를 넘어 잘사는 평화의 길로 나아가는 무소유 경제학의 과제가, 한국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나? △무소유 경제학의 기반이 되는 마을 스와라지를 한국에서도 이룰 수 있나? △신자유주의-한미 FTA의 재앙이 몰아쳐오는 한국 농촌·농업·농민이 잘사는 평화를 구가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마을 스와라지를 도입할 필요는 없을까? △마을 스와라지를 통해 마을(지역 자치체)의 평화를 보장할 길은 없을까? △간디의 비폭력적인 인간관계(비폭력 관계)를 통하여 한국 사회구성체가 변혁의 길로 나아가고, 더 나아가 한반도가 평화통일의 길로 나아갈 방도는 없을까?  

마을 스와라지의 잘사는 평화를 위한 간디의 무소유 경제학이 (불평등한 소유체계로 짜인) 한국 자본주의를 지양하는 평화경제의 밑거름이 되길 희망한다. 이러한 희망을 실현하는데 한국 자본주의의 소유체계·생산관계의 변혁이 선결과제이며 이 과제를 논의하기 위한 방편으로 마르크스의 생산관계를 거론한다.
  
마르크스의 생산관계

인간은 그들의 생활을 사회적으로 생산함에 있어서, 자신의 의지와는 독립적으로 불가피하게 일정한 관계, 즉 물질적 생산력의 일정한 단계에 조응하는 제 생산관계에 들어선다.(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

생산관계는 생산력의 경제적인 소유관계에 의하여 구성된다. 자본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노동력만을 소유하는 반면 부르주아는 생산수단을 독차지한다. 소유관계는 역사적으로 사적소유(개인적 소유)와 사회적 소유의 두 형태로 존재해왔다. 부르주아지의 사적소유는 폭력(Gewalt)을 낳기 때문에, 이 폭력을 지양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강력(Gewalt)에 의한 계급투쟁-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전쟁이 불가피하다는 게 마르크스의 지론이다.

김상택 기자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은 20일 한미연합사 전쟁지휘소 앞에서 을지포커스렌즈 연습 중단과 평화실현 촉구 반전평화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와 같은 마르크스의 지론을 평화 문제와 연결시킨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 ‘마르크스가 본 전쟁과 평화’의 일부를 발췌하면서 약간의 해설을 곁들인다;

자본주의의 사적소유가 개인적 소유를 부정하는 단계(본원적 축적에 성공한 자본가 계급이 독립생산자?무산대중을 수탈하는 단계)에서는 부르주아지에게만 평화가 약속되므로 대중들에게서 평화의 가능성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무산대중이 소수 횡령자(자본가 계급)를 수탈하는 ‘부정의 부정’ 단계의 계급투쟁(프롤레타리아트 해방전쟁)에서 평화의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다. 즉 부정의 부정을 통하여 ‘모든 생산수단의 공동점유에 입각한 노동자의 개인적 소유를 재건’함으로써 평화를 쟁취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마르크스의 ‘전쟁과 평화의 변증법’을 인지할 수 있다. 이처럼 부정의 부정 단계의 계급투쟁(프롤레타리아트 해방전쟁)을 통하여 얻은 평화가 진정한 평화임을 마르크스는 강조한다.

마르크스는 진정한 평화를 위해 자유인의 연합인 ‘Assoziation’(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결사)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자유인들의 연합’(Verein freier Menschen), 자본주의의 노동방식인 통합노동(combined labour)이 아닌 연대노동(결합노동, associated labour)을 수행하는 ‘노동자의 자유로운 결사(die freie Assoziierung der Arbeiter)’ 즉 ‘Assoziation’으로서의 ‘공산주의’는 세계적 규모로 실현될 수밖에 없다. 공산주의의 실현에 의하여 국가는 사멸하고 인간의 자기소외가 극복되어 땅(지상)에 평화가 깃든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평화구상은 ‘(세계공산주의) 혁명에 의한 평화’이며 ‘Assoziation’이 이러한 평화의 담지자(Tr?ger)이다.

요한 갈퉁의 평화경제

평화학자인 요한 갈퉁(Johan Galtung)이 언급한 ‘평화 경제’를 아래와 같이 풀이한다.

인간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고 상품으로 취급하는 서양식 경제에 평화가 깃들기 어렵다. 평화가 깃들게 하려면 인간의 경제활동에 평화적인 발상을 도입하는 평화 경제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평화 경제를 에워싸고 세 가지 차원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①세계경제의 흐름을 전체적으로 보는 시각 ②개개인이 살아가는 데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basic needs)’은 무엇인가? ③이 중간(세계경제와 개인의 중간)에 있는 기업이 평화를 지향하는 경제활동을 벌이고 있나?

평화경제를 말할 때 우선 ‘이게 없으면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는 것 즉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에 관하여 검토해야한다. 평화란 모든 인간이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무엇이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인가? 예를 들어 먹는 것, 타인과의 의사소통, 안전 등을 거론할 수 있다. 돈은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한 수단이다. 돈이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인식시키는 게 자본주의의 마술이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을 크게 나누면 ①생존 ②행복 ③귀속성 ④자유이다. ‘생존’은 물론 육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식료품?물?주거?위생 등)인데, 전쟁?고문이 이러한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이다. ‘행복’은 가난해도 가족이 사이좋게 지내는 것, 쾌활한 기분으로 지내는 것이다. ‘귀속성’이란 지역이나 여러 인종들 사이에서 안심하는 모습으로 함께 지내는 감각을 지닌 상태이다. ‘자유’란 부당하게 체포되거나 구속되지 않고 사상과 신조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의 네 가지(생존·행복·귀속성·자유)를 두루 만족시키는 (평화로운) 경제 체제가 이상적이다. 가난했던 봉건시대 사람들은 나름대로 생존·행복·귀속성을 확보했으나 자유는 누리지 못했다. 현대사회(자본주의 체제)에서 자유는 확보되지만 이는 보장되지 않는다. 자유의 경우에도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격차가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4가지 요소의 균형을 이루는 평화경제에 비교적 성공한 사례가 1970년대 이후의 북유럽이다. 이처럼 평화경제를 선도하는 지역의 '평화지향적인 기업경영(peace business)’ 모델-평화로운 관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평화경제를 생각할 때 기업차원의 ‘피스 비즈니스’(peace business)가 중요하다. 이는 ‘기업 안의 평화로운 관계’와 ‘사회 속에서의 평화로운 관계’를 상정할 수 있다.

기업 안의 평화로운 관계는 주주·경영자·노동자·소비자가 서로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을 침해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 위해 주주·경영자·노동자·소비자 사이의 대화·소통이 필요하다. 피스 비즈니스의 두 번째 덕목으로 ‘사회·다른 기업과의 평화로운 관계’를 들 수 있다. 이윤추구를 생각하면서도 평화적인 제품을 만들고 평화적인 거래를 하는 게 성공하는 길이자 평화경제의 조건이다. 거래관계가 평화적일지라도 무기를 제품으로 내놓으면 평화경제라고 말할 수 없다. 평화적인 제품을 취급해도 거래관계가 착취이면 안 된다. 평화경제에는 인간적인 거래관계가 필요하다.

리카도(Ricardo)라는 경제학자는 ‘제3세계가 선진국에 값싼 노동력·값싼 원료를 제공하며 교역하면 제3세계의 경제적 이익이 늘어난다’고 말했지만 노동자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노동자의 고통은 노동자의 소비력 감소를 가져와 결국 기업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소비자로서 자신들이 만든 것을 살만큼의 임금을 벌게 하는 체제를 구축하는 게 평화경제의 목표이다. 

 

김승국 평화운동가

 

제17호 10면 2007년 8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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