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시민사회신문> 이유경 특파원이 지난 3월 말 송고한 아프간 발 기사입니다. 최근 아프간 한국인 납치 사건과 관련해 탈레반의납치 전술의 맥락을 현장에서 발로 뛰며 진단한 기사였습니다. |
<시민사회신문>은 지난달 탈레반의 폭정과 외세의 침탈 이후 깊은 내홍에 빠진 아프가니스탄을 찾은 전 민언련 간사 이유경 객원기자의 현장르포를 연재합니다. 이유경 객원기자는 현재 현지에서 여성과 이방인이라는 악조건 속에서 납치위협을 무릅쓰고 아프가니스탄의 생생한 현장을 취재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 외세와 내전의 볼모 된 아프간 민중 어제의 적, 오늘은 손잡고 ‘합법 폭정’ “포로와 민간인 머리 못 박던 기억 진저리”
끝날 듯 끝날 듯 끝나지 않던 추위에 좀처럼 기를 펴지 못하던 카불이 이제야 완연한 봄을 만난 것 같다. 한 낮 거리에는 남정네들이 팔뚝을 드러내고 활보하는가 하면 지방 취재를 마치고 돌아온 카불의 호텔 방안에는 난로가 사라지고 없었다. 한 때 내 몸에 휘어 감기느라 바빴던 두꺼운 이불은 이제 완전히 필요 없다.
|
이유경 특파원 |
아프가니스탄 내 적잖은 여성들은 부르카를 벗지 않았다. 특히 탈레반의 태생지인 칸다하르는 ‘모든’ 여성들이 부르카를 두르고 다닌다. |
하지만 아직도 봄은 오지 않았다. 적잖은 여성들이 여전히 부르카를 뒤집어쓰고 다니는 아프카니스탄 전역으로 보자면 각종 한파들이 곳곳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최근 몇 주 동안에는 탈레반의 새로운 전술, '납치'까지 그 한파에 가담하고 있는 중이다. 탈레반이 왕성한 생명력을 과시하는 남부에서는 이 전술이 여러 사람 발목을 붙들어 매고 있다. 안 그래도 교전 지역이 많아 어려운 현장이 되고만 남부에서는 최소한의 사실보도도, 최소한의 인도적 구호활동도 '납치공포'라는 변명거리를 만나 몸을 사리고 있는 중이다.
“(아편 작물 수확기에 접어든) 요즘 현장을 찾아 일(아편 박멸 캠페인)을 해야 되는데 말이야… 나 조차도 갈 수가 없다니까.”
탈레반의 태생지인 칸다하르에서 '안티 마약 프로젝트' NGO 소속으로 일하고 있는 아스카르 칸(가명)은 아편을 연신 피워대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자살 실패, 납치 성공(?)
탈레반의 납치 전술의 배경을 짧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지난 3월 19일 약 2주 동안 탈레반에 납치되어 있던 이탈리아 기자 다니엘 마스트로지아코모가 5명의 탈레반 포로와 맞교환 형식으로 풀려난 바 있다. 거물 사령관과 전 대변인 등 탈레반 5명을 풀어주며 아프간 정부는 “이탈리아와의 관계를 고려한 아주 예외적인 조치”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다시는 이런 교환이 없을 거라 여러 번 못을 박았다.
그러나 ‘1대 5’라는 거래에 재미를 본 탈레반이 납치를 ‘전술’로 이어갈 우려가 있다는 비판이 거세게 제기되었고, 다니엘과 함께 납치되었던 통역이자 아프간 기자인 아즈말을 인질 석방 협상에서 고려하지 않은 ‘비인도적’ 태도 역시 거센 비판을 불러들였다. ‘예상대로’ 탈레반은 아즈말을 놓아주지 않은 채 아즈말과 맞바꿀 2명의 동지석방을 더 요구했다. 그 요구에 귀동냥도 받지 못하자 4월 8일, 탈레반은 자신들이 설정한 데드라인 48시간 전에 기어이 아즈말을 참수시키고 말았다.
|
이유경 특파원 |
아프카니스탄에 약 2천명의 군인을 파병 중인 이탈리아는 자국 기자 납치 사건이 파병에 반대하는 자국 국민들의 분노를 자극한다는 걸 알고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
탈레반은 같은달 27일 남부 칸다하르 지역에서 피난민(IDPs: Internally Displaced Persons) 캠프로 가던 아프간 의료팀 5명을 납치한 데 이어 지난 2일에는 님로즈 지방에서 프랑스 구호단체 직원 2명과 그들의 아프간 동료 3명을 더 납치했다. 탈레반은 이들 인질범과 수감중인 탈레반 동지들의 맞교환을 계속 요구하고 있다.
이렇듯 납치는, 지난해부터 불붙기 시작한 자살 공격과 함께 탈레반의 새로운 전술이 되어 가는 듯 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자살공격은 연이어 실패하고 있지만 납치는 먹히는 분위기다. 실제로 2천여명의 자살공격 대원을 보유하고 있다며 올해 초반 엄포를 놓았던 탈레반은 그 동안 자살공격에서 애꿎은 민간인을 더 많이 죽이거나 다치게 했다. 혹은 자살공격자 자신만 죽는 미숙한 공격을 해왔다.
“더 훈련을 하든지 원… 탈레반의 자살 공격 때문에 결과적으로 죽는 건 죄 없는 아프간 시민들이라구.”
지난 3월 초 동부 잘랄라바드시 인근에서 발생한 자살공격 직후 놀란 미 해병들이 총기 난사를 벌였을 때 잘랄라바드 시민 나지브(21)는 미군의 만행은 물론 탈레반의 미숙함도 꼬집었다. 당시에도 자살공격자 혼자만 죽었고 그 공격에 대한 미군의 즉각 반응, 즉 총기 난사로 10여명의 민간인이 죽고 40여명이 부상했다. 나토 동맹군의 공습이 이따금 탈레반 혐의자 하나 잡겠다고 마을 전체를 무차별 때려 붓는 것과 달리 ‘적’을 겨냥한 탈레반의 공격은 분명 과정에 차이가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양 쪽 모두 민간인을 희생양 삼고 있는 모양새다.
희생양은 민간인
그러나 실패 중인 자살공격과 달리 납치 전술은 심리전과 프로파간다전을 벌이며 섬세하게 이어가고 있다. 고도의 심리적 공포감과 압박감을 가중시키면서 탈레반은 자신들이 세를 넓혀가는 남부지역에서 ‘외국인’, ‘외세’의 접근봉쇄를 진행 중이다. 그 외국인과 협조하는 (통역, 가이드, 운전자, 현지 기자나 NGO 직원 등) 현지인들에 대한 협박도 거침없이 던지며 결과적으로 취재나 구호작업에 장애물을 설치해놓고 있다. 현지인의 도움 없는 취재나 구호활동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탈레반이 대상으로 싸우고 있는 아프간 정부나 외세의 도덕성을 건드리고 있다는 점이다. 아즈말 참수 이후 탈레반에 동정적이었던 사람들조차 '무슬림이 아닌 외국인은 풀어주면서 무슬림 형제를 죽인' 탈레반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비판이 아프간 정부와 ‘외세’를 향했다. ‘1대 5’ 협상을 ‘2대 5’ 정도로도 만들지 못한 무능함과 무관심 그리고 자국민의 신변은 나 몰라라 한 아프간 정부와 자국민 석방에만 신경 썼던 이탈리아 정부(‘외세’라는 코드로 전이될 만한)를 향해 반감과 분노는 지난 5년 반 동안 소위 ‘아프간 재건작업’에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 국제사회와 부패가 극심한 자국 정부를 향한 비판의 연장선에서 가속화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탈레반은 이런 국민들의 정서와 관통하는 성명을 시의 적절하게 날리고 있다.
|
이유경 특파원 |
이제 막 5살 정도 먹은 아프간 저널리즘은 수많은 도전과 위험에 직면해 있다. 아즈말의 사례에서 보듯 자국 정부도, 반군 탈레반도 모두 아프간 기자들의 안전에 무관심하거나 위협적인 세력으로 존재하고 있다. 사진은 국제치안보조군(ISAF) 기자회견장에서 질문하는 아프간 기자모습. |
“아프간 정부는 다니엘의 현지인 통역의 석방을 위해 단 한 개의 노력도 하지 않았다… 단지 이탈리안 저널리스트만 신경 썼다.” 무섭게 떠오르는 탈레반 사령관 물라 다둘라가 찌른 핵심이다.
이에 맞서 지난 15일 아프간 외무부장관 스판타 박사(Dr. Rangeen Dadfar Spanta)는 기자회견을 통해 “탈레반의 납치가 산업화되는 걸 막아야 한다”며 인질 맞교환이 더 이상 없음을 거듭 강조한 바 있다. ‘합법적 수단’으로 인질석방에 노력하겠다고 그는 덧붙였다. 프랑스의 자크 시락 대통령이 현재 탈레반에 잡혀 있는 프랑스 인질과 관련 카르자이 대통령에게 특별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한 직후였다.
이런 아프간 정부의 구호가 아프간 시민들 사이에서 얼마나 설득력을 가지며 탈레반과의 심리전을 이겨낼 수 있을지는 조금 의문이다. 왜냐하면 ‘납치 산업화론’은 ‘X묻은 개가 X묻은 개 나무라는’ 식의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이 속담을 이해하기 위해, 1992년부터 1996년까지 각 무자헤딘 정파들이 각기 다른 외세를 등에 업고 카불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내전을 벌이던 그 시절로 들여다보자. 그 시절은 무자헤딘 사령관들에 의한 민간인 납치가 진짜 ‘비즈니스화’ 현상을 보였던 시절이다.
납치 비즈니스의 원조
“화가 치밀어. 그때는 서로 치고 박고 싸우던 인간들이 이제는 손 맞잡고 웃고… 그걸 볼 때마다 극심한 두통이 몰려와. 라바니, 칼릴리. 그 놈들이 바로 번갈아 내 아들을 납치했던 인간들이야.”
|
이유경 특파원 |
아프간 여성 무니라(45)는 30년 전쟁에 절은 아프간 여성의 전형이다. 무자헤딘 정파들에게 납치당한 아들을 빼내기 위해 거액을 들였던 그는 지금 요직을 두루 점하고 있는 무자헤딘 리더들을 TV에서 볼 때마다 참을 수 없다고 말한다. |
지난 30년간 전쟁에 푹 절은 인생을 읊으며 흥분과 한숨을 교차하는 무니라(가명·45)는 납치 비즈니스의 희생양이다. 소비에트 점령 시절인 87년 강제로 군 복무 중이던 27살 남편이 판쉬르에서 마수드 저항군에게 목숨을 잃은 후 그녀는 아프간 기혼 여성의 4분의 1에 이르는 과부 중 한 명으로 살고 있었다. 그리고 1994년,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던 15살 아들 이크람(가명)이 두 개의 각기 다른 무자헤딘 정파에 납치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한번은 히즈비 와흐닷 (Hizb-i-Wahdat: 동 아시아계 얼굴을 한 아프간의 소수민족 중 하나인 하자라 족의 무자헤딘 정파)에게 또 한 번은 자미아떼 이슬라미(Jamiat-i-Islami: 아프간의 최대 무자히딘 정파 중 하나로서 내전 기간 정권을 잡고 있던 정당. 아프간의 민족영웅으로 추앙 받는 마수드가 이 정파의 군 최고 사령관이고 라바니 전 대통령이 이 정파의 정치적 지도자이다) 에게 납치당했다. 이크람은 파르완(타직 족 거주지역)에서 바미안(하자라 족의 거주지역)을 오고 가며 차 수리공으로 일하고 있었고 바미안으로 향하던 어느 날 히즈비 와흐닷 군에게 먼저 납치당했다.
“히즈비 와흐닷 사령관을 찾아갔지. 20만 아프가니를 갖다 주면 풀어주겠다고 하더군.”
그녀가 기억하는 20만 아프가니는 당시 춤추던 아프가니 환율 때문에 얼마인지 감 잡기는 어렵다. 아무튼 그녀는 엄청난 액수의 돈이었다고 강조한다. 그때부터 두 달 동안 그녀는 이웃과 친지들로부터 빚을 얻고 얻어 그 돈을 만들었다. 그 두 달간 아들은 생애 잊을 수 없는 끔찍한 광경들을 목격하며 고문을 당했다. 이크람을 가장 괴롭히는 장면은 히즈비 와흐닷 군이 적군포로와 납치한 민간인들의 머리에 못을 박던 장면이다.
두 달 후 20만 아프가니를 주고 풀려난 아들은 그러나 풀려난 그날 집으로 오던 길에 다시 자미아떼 마수드 군 검문소에서 그들에게 납치당했고 똑 같은 잔인함과 고문에 갇혀 지냈다. 타직계에 속하는 이크람은 그를 납치한 마수드 군도 타직계인데다 마수드 군의 적이던 히즈비 와흐닷의 납치스토리를 늘어놓으며 동정을 구했지만 풀려나기는커녕 마수드 군으로부터 역시 같은 액수의 돈을 요구 받으며 감금당했다. 그러나 이크람은 열흘 만에 도망칠 수 있었다. 마수드 군이 적군의 공격을 받아 싸우느라 정신이 팔렸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렇게 번갈아 가며 15세 소년을 납치했던 무자히딘 정파의 사령관과 대표들은 지금 ‘민주화된’ 아프카니스탄에서 모두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히즈비 와흐닷의 지도자 카림 칼릴리는 현재 부통령으로, 자미아떼 이슬라미의 최고사령관 마수드는 9·11 공격 이틀 전에 암살당했지만, 그 정파의 최고 정치지도자 라바니는 지금 ‘선출된’ 국회의원이다.
사업은 멈춘 적 없다
|
이유경 특파원 |
자미아떼 이슬라미의 정치 지도자이자 90년대 내전 기간 대통령을 역임한 아프가니스탄 전 대통령 불하누딘 라바니. 이슬람 철학 교수이기도 한 그는 카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내전의 책임자로 비판 받고 있다. |
다시 탈레반의 납치전술로 돌아와 보자. 지금 탈레반의 납치는 90년대 납치 비즈니스와 달리 심리전의 한 전술이자 수감 중인 동지 빼내기 전술 양상을 보이고 있다. 다니엘 석방 협상 중 이태리 외교가가 건넨 거액의 돈을 거부하고 ‘동지를 내놓으라’고 했던 것도 탈레반의 납치 전술이 의도한 바를 잘 말해주고 있다.
반면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민간인들이 실종되고 납치되었던 90년대 내전기간 납치는 타 정파(대체로 각기 다른 인종에 기반 한)에 대한 적대적 전술 이상으로 돈 냄새를 물씬 풍겼다. 그때 그 무자헤딘 사령관들이 2001년 미국주도의 대 탈레반 전쟁 당시 북부동맹이라는 이름 하에 전투를 벌였고 그 전쟁이 낳은 현 꼭두각시 정부에서 핵심요직을 두루 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전쟁 직전에도 ‘비즈니스’는 있었던 것으로 공신력 있는 보고서들은 전하고 있다. 미 중앙 정보국(CIA)은 각 무자헤딘 정파들에게 거액의 달러를 건네며 이렇게 구슬리고 달랬다고 한다.
“자네들 그만들 좀 싸우지 그래. 이제부터는 탈레반과 싸우자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