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치된 아프간 난민, 정부 구호의지 실종 “귀향? 돌아가면 아무것도 없어”
아프간과 국경을 맞댄 파키스탄 북부 토르캄 국경. 여권을 들고 도장을 받는 이들을 손가락에 꼽을 동안 여권은 커녕 종이 한 장 없는 수많은 이들이 이쪽과 저쪽을 자유롭게 오고 가고 있다. 대부분이 아프간 난민들이다. 통제 불능 아니 통제 포기 국경, 나는 이런 국경을 생전 처음 봤다. 파키스탄에 베이스를 두고 활동하는 탈레반, 알카에다 등의 무장세력이 양국을 오고 가는데 별 문제가 없음을 국경은 ‘상징적으로’-이들이 반드시 ‘공식 국경’으로만 이동하는 건 아니기에-말해주고 있었다.
통제 포기의 국경
게다가 이 국경을 끼고 파키스탄과 아프간 양쪽에 광범위하게 분포해 살고 있는 파슈툰 족은 언어와 문화, 종교 등 모든 것을 공유하고 있다. 영국식민주의자들이 그어놓은 국경선도 파슈툰 족은 잘 인정하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파슈투니스탄.’ 파슈툰 국가를 칭하는 이 국가는 실제로 존재하진 않지만 일부 파슈툰 족의 문화와 머리 속에는 존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
이유경 특파원 |
5월 16일 파티야 지방 주민 천 여명은 카불로 대거 입성하여 시내 중심가를 행진하고 파키스탄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파키스탄과 싸우겠으니 무기를 달라고 요구했다. |
|
이유경 특파원 |
파슈툰 족 사회에서 무기 소지와 하위 부족간 교전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지만, 탈레반 정권과 카르자이 정권의 '무장 해제 프로그램'에 따라 소지하고 있던 무기 대부분을 반납했다며 되돌려 줄 것을 요구했다. |
“테러리스트의 월경을 막겠다”며 약 2천640km(약 1천640마일)에 이르는 국경에 철조망을 세우겠다는 파키스탄의 엄포가 아프간 정부와 현지 파슈툰 족들의 거센 반발을 사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 길은 수백만 아프간 난민들이 수십 년간 전쟁을 피해 생존을 찾아 이동해온 길이라 인도주의적 차원에서도 철조망 계획은 비난 받고 있다. 그러던 중 파키스탄은 5월 13일 아프간 동부 파티야 지방 국경으로 느닷없는 로켓포와 총격이 개시하여 약 30시간 가까이 양측 간의 교전이 이어졌다. 그리고 아프간 영토 쪽 민간인 13명의 목숨을 잃은 이 사건은 국경불안을 조장하기 위한 도발행위로 분석되고 있다.
이제 아프간-이란 국경 쪽으로 와보자. 아프간 서부 도시 헤랏에서 국경까지 달리는 2시간 동안 건드리는 이 하나 없는 잘 뻗은 길이 이어진다. 그러나 국경부터 이란으로 넘어가는 길목 길목에는 검문 검색이 대단히 까다롭다. 짐 하나하나 꺼내 털어보는 수준이다. 이 길이 바로 아프간의 아편(세계 아편의 90% 생산) 상당량이 유럽으로 향하는 길목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이란은 난민들의 입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
페르시안과 다리(페르시안의 방언), 사용언어는 유사하지만 페르시안(이란)과 타직계(아프간 헤랏, 카불 등 전역에 약 25%), 인종이 같지도 않아 형제애든 자매애든 고려할 이유가 별로 없다. 이란은 자국의 영향력이 강한 헤랏 지방의 군벌 이스마일 칸을 ‘대 파키스탄’ ‘대 수니파’라는 정치적, 종교적 고려 하에 20년 가까이 전략적으로 지원해왔을 뿐, 아프간 난민들에 대한 인도적 대우는 안중에 없다. 특히 종파가 같아 이란으로 대거 몰렸던 아프간의 소수민족 시아파 하자랏족 난민들은 영락없이 찬 밥 덩어리다.
이렇게 사뭇 다른 그림을 보여온 양 국경이 요즘 난민문제로 예외 없이 시끌벅적하고 있다. 국경은 물론 아프간 정치판까지 뒤 흔들어 놓을 정도다.
정치적 이용, 방치되는 난민들
4월 23일 이란이 자국영토 아프간 난민 5만5천명을 강제로 송환하는 일이 벌어졌다. 아프간 외무부 장관 스판타 박사(Dr. Rangeen Dadfar Spanta)가 이란 공식 방문을 마치고 가진 기자회견에서 “아프간 난민 강제 송환을 유보해달라고 이란 외무부 측에 요청했고 긍정적 반응을 얻었다”고 말한 지 불과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난민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아프간 의회는 즉각 난민부 장관과 외무부 장관의 탄핵 안을 통과시켰다. 안그래도 전 무자히딘 정파의 입김이 강한 의회에 외무부 장관은 눈엣 가시였다.
|
이유경 특파원 |
아프간 전 외무부 장관 스판타 박사. 4월 중순 그는 기자회견을 통해 아프간 난민 강제 송환 자제를 이란 정부측에 요청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5만 5천명의 난민이 일주일 후부터 쫓겨나면서 의회는 난민 장관과 함께 외무부장관 탄핵안도 통과시켰다. |
의회가 통과시킨 소위 ‘민족화해법안’-그 누구도 무자히딘 군벌들의 전범을 처벌할 수 없다고 명시한- 에 대해 반대 입장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90년대 초반 각기 다른 외세의 지원을 업고 벌인 무장권력투쟁으로 대량 난민을 야기했던 그 무자히딘 세력들이 이제는 그 난민문제를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이용하고 있는 꼴이었다. 정치적 회오리의 변명 거리가 될 만큼 퇴거 난민규모가 크기도 했지만.
5월 15일. 이번에는 파키스탄 쪽에서 만만치 않은 상황이 이어졌다. 파키스탄 당국이 폐사와르 외곽 피르 알리자이(Pir Alizai) 난민촌을 강제 철거하는 도중 3명의 난민 사망자가 나왔다. 파키스탄 당국은 그 동안 자국 영토 내 아프간 난민캠프를 철거하겠다고 엄포를 놓아왔던 터다. 바로 전날 또 다른 캠프 카차가라이(Katchagarhai)에서 70여 개의 가게와 세 채의 가옥이 파괴되기도 했다.
종교근본주의 학습장
“불도저로 밀어버리겠다는 말을 밥 먹듯이 해.”
페샤와르 인근에서 만난 난민들은 두려움과 스트레스를 감추지는 못했지만 일상적 현상인양 내뱉었다. 그러나 파키스탄 국경지대에 셀 수 없이 퍼져있는 아프간 난민캠프가 파키스탄에게 얼마나 각별한 곳으로 존재해왔는지 곱씹어 본다면 파키스탄의 이중성은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만다. 이 난민캠프 다수는 80년대부터 대소 항쟁의 지하디(Jahidee, 성스러운 전사) 모집센터였고, 또 94년 동을 튼 탈레반 운동의 병사들도 대부분 이 난민캠프에서 모집되었다.
|
이유경 특파원 |
하자라족 소년들이 카불 거리에서 사파리 케잌을 팔고 있다. 몽골족의 후예로 알려진 하자라 족은 아프간 사회에서 9%를 소수민족이자 시아파로서 종교적 소수자이기도 하다. 수많은 하자라 난민들이 시아파 주류의 이란으로 넘어간 것도 그런 배경 때문이다. |
파슈툰 족의 보수적 관습도 난민캠프에 고스란히 묻어났고, 상당수가 전쟁고아이자 극단적으로 보수성을 띤 난민캠프 문화 탓에 ‘여성’의 존재를 별로 접해 본 적 없는 소년들이 바로 90년대 탈레반 1기 병사들이었다. 외세 저항 민족주의 보다는 종교근본주의로 우향우 하던 ‘성스러운 전쟁’의 전사들을 모집하기에 난민캠프는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그 물주와 트레이너는 단연 파키스탄이었고 그리고 미 중앙 정보국이었다.
“탈레반이 부르카를 ‘공식’ 도입했을 뿐, 이미 80년대 초반 이래 파키스탄 국경 아프간 난민캠프에서 부르카는 사실상 강요된 차림이었어.”
80년대 초부터 그 난민캠프에서 자라온 여성 파트마(가명, 33) 의 말은 그 시절 난민캠프의 분위기를 암시하고 있다.
모국을 잃은 ‘국민’들
물론 모든 난민캠프가 다 전사모집장소는 아니었다.
“시가전(市街戰)이 심해 가다 서기를 반복해서 겨우 카불을 빠져나갔어. 그리고 파키스탄 국경으로 달렸고 삼촌이 미리 봐둔 폐사와르 외곽 난민촌으로 옮길 수 있었는데 좋은 캠프로 가서 다행이야.”
|
이유경 특파원 |
페샤와르 외곽 케와 캠프 3살짜리 아들을 돌보고 있는 레이하나(가명, 40)는 20년 살아온 캠프를 떠나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
93년 내전기간 온 가족이 피난 길에 올랐던 나지브(21)는 운이 좋다면 좋은 경우다.
그 가족들은 ‘진보적 난민캠프’에서 지낼 수 있었다. 22년 전부터 아프간 난민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케와 캠프는 반 지하 조직이자 진보적 여성단체인 아프간여성혁명위원회(RAWA, 이하 ‘라와’)가 운영하는 학교와 이동 병원 덕에 진보적 영향력을 크게 받고 있다. 이 캠프의 학교 선생들 대부분은 라와 회원이거나 지지자(남편들이나 남성 동조자들)들이고, 지금은 재정적 이유로 현격히 줄었지만 주 1회 라와 이동 병원이 캠프를 방문하여 난민들의 건강을 돌보고 있다.
교육기반 시설이 거의 붕괴된 아프간 내부에서 나름대로 기숙사까지 갖춘 이 진보적인 난민캠프로 ‘유학’을 자청해 오는 소위 난민 유학생이 있을 정도다. 경제난으로 기숙사 수용 인원이 급감하면서 경쟁률이 높아졌다.
“귀향? 여기서 20년 넘게 살았는데, 돌아간 들 아무 기반이 없어. 다시 돌아오는 이들도 있는 데 뭐.”
300~400명 정도의 난민들이 살고 있는 케와 캠프에서 비교적 ‘부유층’에 속하는 레이하나(가명)는 귀향의 꿈을 일찌감치 접었다. 레이하나의 지적은 매우 옳았다. 유엔난민고등 판무관의 권고와 탈레반 붕괴 후 들어선 ‘민주정부’의 귀향 캠페인에 수십만 난민들이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냉정히 말하면 그 귀향 난민 다수는 딛고 있는 땅만 ‘모국’일 뿐 난민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