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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人/오피니언

'평화론 물타기' 그만두라

대선주자에 보내는 평화담론

 

‘바람난’ 대선시기 평화공약 ‘표심잡기’
서민대중의 안정 살피는 근본모색 필요

요즘 대선 예비주자들이 갑자기 평화 타령을 하는 바람에 ‘평화가 바람났다’. 평화운동가의 입장에서 볼 때 ‘평화’가 인구에 회자되는 것은 좋지만 반(反)평화적인 집단(한나라 당 등)이 ‘반전·반핵·평화’를 내세우며 표심을 자극하는 데 역겨움을 느낀다.

‘평화’는 대선 예비주자들이 표를 구걸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일회용 반창고가 아니다. 이들이 평화를 일회용 반창고처럼 사용하는 바람에 각 주자들의 평화론 사이에 변별력이 사라져가고 있다. 진보적인 주자가 말하는 ‘평화의 진정성’과 보수적인 주자가 말하는 ‘평화의 사이비성’이 얼마나 큰 차이를 지니는지에 대하여 예리하게 구분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그런데 평화의 진정성이 엿보이는 인사들도 평화의 지평을 주로 한반도에 국한하여 ‘기존 통일론의 신선한 대용물’로 삼는 경우가 많아 식상하다. 거의 모든 예비주자들의 평화를 보는 시야가 매우 좁을 뿐 아니라 평화의 사상이 결여되어 있어 이들의 평화론이 사상누각임이 드러나곤 한다. 이론적인 바탕 없이 평화를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로 규정하는 ‘소극적인 해석’에 머무르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구조적인 폭력, 억압, 소외, 신자유주의·한미 FTA 우산 아래에서 신음하는 민중들의 한을 아우르는 적극적인 평화’를 주창하는 대선 예비주자가 한 명도 없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신자유주의의 질곡에 빠진 한국 사회의 양극화 현상 때문에 발생하는 ‘민초들의 비평화’(peacelessness)를 애써 강조하는 예비주자가 전무하다. 이들은 한결같이 평화를 기존 통일론의 대체물 정도로 보기 때문에 평화를 한반도라는 우물 안에 우겨넣는 결과가 초래될 것이다. 이러한 결과를 방치한다면 올해 대선에서 모처럼 찾아온 평화담론의 상승세가 꺾일 가능성이 있다.

 

김상택 기자

파병반대국민행동은 12일 서울 광화문 정보통신부 앞에서 자이툰 파병연장 및 레바논 파병반대 집회를 열었다.


대선 예비주자들의 허울 좋은 평화 이야기가 변별력이 없는 정치적 구호로 전락할지 모르는 상황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의 판에 박힌 평화담론이 좁은 틀 속에서 박제화될 경우 평화운동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지 모른다.

이와 같은 우려가 기우가 되길 바라는 필자는 이번 대선에 통용시킬 평화 담론의 상징적인 언어를 ‘잘 사는 평화’로 집약하고자 한다. 잘 사는 평화론을 통하여 예비주자들의 비좁은 평화론과의 차별성을 드러내려고 한다. 이러한 노력을 통하여 평화마저 정치적인 치장물로 삼는 대선 주자들의 ‘평화론 물타기’ 행각을 예방하고자한다.
 
플라톤(Platon)의 저서‘크리톤’의 대화 중에 소크라테스가 “우리는 그저 사는 것을 가장 소중히 여길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을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구절이 있다. 이어 “‘잘’이란 ‘아름답게’라든가 ‘올바르게’라든가와 같다”라는 말이 나온다. 즉 ‘잘 산다’의 ‘잘’을 ‘아름답게’, ‘올바르게’로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잘’이란 결국 ‘올바르게’요 ‘잘 산다’는 것은 ‘올바르게 사는’ 것이라 요약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잘 산다’는 것은 돈이나 신체나 세상의 평판이나 지위에 머리를 쓰지 않고 무엇보다도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자기의 영혼 즉, 정신을 가장 좋은 것, 가장 훌륭한 것이 되게 하면서 사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최명관 ‘잘 산다는 것의 의미’ 숭전대학교 논문 제3집, 1971, 40~43쪽)
 
소크라테스(Socrates)가 말하듯이 ‘잘 사는’ 것은 ‘올바르게 사는’ 것 즉, 정의롭게 사는 것(의로운 삶)이요, 자신의 영혼(이성)을 가장 훌륭한 것이 되도록 정화하는 일이다. 정의롭게 살면서 이성을 정화하는 일은 평화로운 삶을 예약한다. ‘잘 사는 평화’를 예약한다. 개인만 ‘잘 사는 평화’를 누리지 않고 사회 공동체와 더불어 ‘잘 사는 것’이 될 때 사회의 평화가 이룩될 것이다.

‘아랫 것들’ 잘사는 평화를 

자립(Subsistence)은 ‘자연 생태계의 속에서 인간사회를 유지하고 재생산해가는 틀, 개인과 집단의 본래성을 발현시켜 영속시키는 조건의 총체’이다.

전 세계의 대안경제·대안화폐·공동체 경제·지역자립경제 모델에서 자립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간디·마르크스·아담 스미스·이반 일리치·폴라니(Polanyi)의 세계관에서 자립의 이론적인 측면을 탐구할 수 있다. 자립 지향의 정치경제학, 순환 경제학, 지역자립 경제학, 지속가능한 경제학에로의 ‘인식 틀(paradigm) 전환’을 통한 사회적 자본의 축적이 중요하다. 앞에서 언급한 ‘평화(지향의) 경제학’을 통하여 공생사회, 지역자립의 사회체제를 조성해야한다. 자립에 의한 평화의 틀’을 새로이 형성해야한다.

양극화의 하층에 속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실업자·도시빈민·한미FTA의 희생양인 농민은 소위 ‘아랫 것들’(Subaltern)에 해당된다. 한국 사회의 양극화 현상은 ‘아랫 것들의 고난·구조적 폭력이 지양된 평등사회’를 요망한다. 양극화의 해소 즉 ‘Subaltern’을 줄이는 것이 ‘잘사는 평화’의 경제적 덕목이다. <다음호에 계속>

대동사회를 찾는 오래된 희망
동양의 ‘잘 사는 평화’ 

동양에서 ‘잘 사는 평화’의 핵심은 天-地-人(천-지-인)의 조화에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동양 고대의 춘추전국 시대는 전쟁·군사 지향적인 사회, 군사지향적인 사회 구성체(군사 구성체)이어서 잘 사는 평화를 전혀 보장할 수 없었다. 따라서 군사 구성체를 ‘평화 구성체’로 전환하는 일이 춘추전국 시대의 가장 큰 평화의 과제이었다. 이 과제를 풀기 위하여 중국 고대의 성현들(공자·맹자·노자·묵자 등)이 ‘평화 지향적인 사회 구성체(평화 구성체)의 대안’을 내놓음으로써 ‘잘 사는 평화’의 상을 제시했다. 

공자·묵자·노자의 평화
 
춘추전국 시대 5백년간은 제후들이 군웅할거하며 쟁패하는 전쟁의 시대였다. 춘추전국 시대는 전쟁, 지배계급의 착취, 민중의 굶주림으로 점철된 말세이었다. 춘추전국 시대라는 난세에 민중들은 전쟁과 착취로 유랑민이 되어 또는 도둑이 되지 않으면 자식과 스스로를 노예로 팔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비참한 처지였다.

민중이 소망하는 태평성세란 전쟁의 주동자인 임금이 누구인지 모르고 아무 간섭 없이 농사짓고 우물 파서 등 따습게 먹고 마시는 것이다. 그래서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풍년이 들면 태평성세를 기뻐하며 ‘격양가’(擊壤歌)를 부른다. 격양가는 요 임금 시절의 태평성세에 민중이 부른 노래로 인류의 오랜 소망인 무치(無治)의 사회, 즉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사회를 열망한 것이다. 전쟁이 지긋지긋하여 격양가를 부르며 평화의 세상을 꿈꾸었던 민중들. 이들의 희망을 담아 평화의 담론을 제시한 성현들의 말씀을 중심으로 춘추전국 시대 당시의 ‘잘 사는 평화 구성체’론에 접근한다.

공자는 전쟁 자체를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제후들 간의 겸병전쟁이나 제후국 내의 소자치국(附庸)들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병합하는 전쟁을 반대하는 ‘의로운 전쟁’(義戰)론을 펼쳤다. 그는 제후들이 천자를 무시하고 주례를 범하는 무례를 한탄했을 뿐 영일 없는 전쟁으로 인해 백성들이 전쟁터에서 죽어가고 있으며, 전쟁비용 때문에 굶어죽고 얼어 죽는 비참한 현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는다. 맹자도 공자의 ‘반(反)패도주의로서의 의전론’을 계승하면서 제후들의 겸병전쟁을 반대한다.

묵자(墨子)의 평화지향적인 가치관으로 ‘겸애’(兼愛)와 ‘비공’(非攻)을 들 수 있다. ‘겸애·교리’는 천하의 해(害)를 물리치고 이(利)를 일으키기 위한 최대 강령이었다. 그것만이 인류 모두가 서로의 이익을 옹호해줌으로써 복지증진을 기대할 길이라고 묵자는 확신하고 있었다. ‘비공’은 침략전쟁이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가 없다는 논리이다. 특히 민중의 이익과 상치되는 침략전쟁은 불의이다.

노자는 ‘부쟁’(不爭)을 자기 삶의 방식으로 결정하였다. 老子가 제시한 ‘부쟁’의 전술에 따르면, ‘不敢爲主, 而爲客’(불감위주, 이위객)하여야만 한다. 주동의 위치에 절대로 서지 말고 수동의 자세를 취하라, 먼저 도발해서는 안 되며 침공에 대한 방어만이 할 일이라는 것이다. 전쟁은 인간 최대의 작위(作爲)이다. 老子는 처음부터 전쟁을 부정한다. ‘무위’(無爲)라야만 능히 ‘無不治’(무불치)할 수 있다.

‘소방과민’(小邦寡民)은 노자가 그리던 이상적 정치형태이다. 옛날(夏·殷)에는 나라 수가 3천을 넘었던 것이 춘추시대에 들어와 1백 수십 국으로 줄고 다시 전국 시기는 7대(七大)강국으로 병합되었는데 모두 전쟁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와 같은 전쟁을 통한 약소국 병합 즉, 겸병(兼倂)전쟁을 노자는 철저하게 반대했다. 

대동사회-소강사회

중국 성현들의 평화의 담론이 비록 ‘의전론(공자·맹자)’ ‘반전론(묵자)’ ‘非戰論’(노자·장자)으로 갈리지만 모두 전쟁이 없는 태평성세를 꿈꾼다. ‘태평성세’의 어원은 禮記(예기) 禮運(예운)편에 최초로 보이는 이상사회로서의 ‘大同’(대동)이다. 이 때의 ‘同’은 平(평)과 和(화)의 뜻이며 大同社會(대동사회)는 평등·평화 사회를 의미한다.

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는 인민이 전쟁과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난세였다. 그의 이상사회는 전쟁이 없고 생명이 안락하게 살아가는 ‘천하에 남이 없는’(天下無人) ‘安生生 大同社會’(안생생 대동사회)이었다. ‘天下無人의 安生生 大同社會’는 묵자의 ‘잘 사는 평화 구성체’이었다.

‘禮記’(예기)를 편찬한 유향(劉向)은 요순시대를 대동으로, 우(禹), 탕(蕩), 문·무·주공(文·武·周公)의 삼대를 ‘禮治(예치)의 小康社會(소강시대)’로 규정한다. 요순의 대동시대에는 대도(大道)가 이루어졌으나, 삼대에 이르러 대도(大道)가 이미 쇠미해졌다. 유향은 요순의 평화공동체가 존재했던 시기를 대동시대로, 삼왕(三王)의 신분차별이 요구되는 예치사회가 존재했던 시기를 소강시대로 구분했다.

이처럼 유향 등의 유가들은 ‘예기’의 역사발전 단계를 ‘대동사회→소강사회의 이행’으로 본다. 유가의 이상사회는 천하를 일가처럼 생각하는 소강시대이며, 이 소강사회는 효제(孝悌)를 최고의 통치이념으로 삼는 사회이며, 그리고 효를 인간일반과 국가에까지 확장한 것이 인(仁)인 것이다.

공자는 전쟁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천자의 전쟁은 인정했다. ‘소강사회를 저해하는 패도주의’를 정벌하는 전쟁, 이러한 정벌 전쟁을 일으키는 천자의 부국강병을 인정하였다. 맹자 역시 폭군방벌(暴君放伐)을 주창했다. 천자가 제후를 징계하는 정치행위로서의 전쟁이 정의의 전쟁이며 이러한 의전이 ‘소강사회에서 구할 수 있는 현실적인 평화의 길’이라고 강조했다. 

노자·장자의 ‘잘 사는 평화 구성체’

노자는 전국통일(戰國統一)을 지향하는 ‘유가·법가의 부국강병에 의한 대국주의(大國主義)’에 반대하면서 ‘소국과민(小國寡民)’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소국과민’은 “隣國相望鷄犬之聲相聞, 甘其食, 美其服, 安其俗, 樂其居”(인국상망 계견지성상문, 감기식, 미기복, 안기속, 락기거-이웃 나라의 닭과 개의 소리를 서로 들을 수 있는 지경이다. 왕은 백성들에게 그 고을의 음식을 달게 여기게 하고, 자기 고을의 복장을 아름답게 여기게 하며, 그 풍속을 편안하게 하고, 그들의 주거지를 즐기도록 해 준다)에 함축되어 있다. ‘인국상망 계견지성상문, 감기식, 미기복, 안기속, 락기거’의 ‘잘 사는 평화 구성체’는 현대인에게도 공명이 있다.

연대와 각성의 공생사회 모색
서양의 ‘잘 사는 평화’
 
비폭적주의 지혜-기독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이사야 11:6~8) 이는 ‘잘 사는 평화’의 목가적인 표현이다. “오른 뺨을 맞으면 왼 빰도 내주고 5리를 가려거든 10리까지 가주라”(마태복음 5:38-42)는 예수님의 비폭력주의에서 ‘잘 사는 평화’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칼 마르크스의 평화
 
◇‘자유인의 연합’에 의한 결사·연대=마르크스가 말하는 ‘자유인들의 연합’, 노동자의 자유로운 사회 즉, ‘Assoziation’은 평화의 담지자이다. 마르크스의 저작 곳곳에 산재해 있는 ‘Assoziation'은 그 문맥에 따라 ‘협동하는 일, 협동조합, 협동생활, 협동단체, 협동관계, 공동조합, 공동적 결합, 공동사회, 결합, 결합사회, 결합체, 집단결합, 연합, 연합사회, 연합체, 협회, 조합, 연대, 단체’를 뜻한다. ‘Assoziation'은 마르크스에 있어서 평화로운 사회상태를 적극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Assoziation'은 마르크스의 ‘평화'로 인도하는 안내자이며 마르크스의 ’평화‘를 이끄는 담지자이다.

◇노동과 평화=마르크스에 따르면 “아무도 배타적인 활동영역을 갖지 않고 각자가 원하는 어떤 분야에서나 자신을 도야시킬 수 있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사회가 전반적인 생산을 조절하기 때문에 사냥꾼, 어부, 목동 혹은 비판가가 되지 않고서도 내가 마음먹은 대로 오늘은 이것을, 내일은 저것을, 곧 아침에는 사냥을, 오후에는 낚시를, 저녁에는 목축을, 저녁식사 후에는 비판을 할 수 있게 된다.”(독일 이데올로기) 이것이 목가적 사회분업에 입각한 마르크스 평화론의 상징적인 표현이다.

마르크스는 “각 사람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 각 사람에게는 자신의 필요에 따라’라고 쓸 수 있다”(고타 강령 비판)고 밝히면서 공산주의에 의한 지고의 평화상태를 예견한다. 협동적인 부가 샘처럼 분출하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사회적 분업노동(특정한 직업)이라는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는데 그러한 노동이 아닌 필요에 따라 소비물자를 분배받는 사회가 가장 평화로운 사회라는 것이다.

이 때의 ‘노동’은 고한노동(苦汗勞動, 장시간 노동·저임금 노동 등 좋지 않은 조건 밑에서 자본가의 착취에 그대로 복종하며 반노예적 상태로 행하는 노동)의 성격을 불식할 수 없는 ‘노동력’(labour)으로부터, 제작·창작·창조활동 내지 유희의 뉴앙스를 포함한 ‘일’(Work)로 탈바꿈한다. 마르크스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영구전쟁 상태에 있는(in ewigem Kriegszustand) 인류의 역사가 막을 내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고한노동’(labour)으로부터 해방되어 영구평화 상태에 있는(in ewigem Friedenszustand) 인류의 본사(本史, 공산주의)가 도래할 것이라고 믿었다. 결국 프롤레타리아트는 노동의 지양(Aufhebung der Arbeit)을 통하지 않고는 평화를 누릴 수 없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노동의 폐지가 아닌 소외된 노동의 지양(해방)을 통하여 평화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으며 이게 마르크스의 ‘잘 사는 평화’의 본령이다. 

사회구조적 폭력의 지양
 
평화운동가이자 학자인 갈퉁의 ‘구조적 폭력’은 한 사회의 구조나 체제가 갖는 폭력성을 말한다. 가령 한 노동자가 저임금의 구조 때문에 착취를 당해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며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다면 그는 이 사회로부터 구조적인 폭력을 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이 억압을 당하고 착취를 당하여 자아실현을 할 수 없는 것은 구조적인 폭력에 의한 것이며 실제로 제3세계의 많은 나라들에서 땅이나 집이 없어서 굶주려 죽고, 영양실조로 죽게 되는 수천만의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구조적 폭력의 희생자들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구조적 폭력을 지양하는 게 갈퉁의 ‘잘 사는 평화’의 핵심이다.
 
의식있는 시민들의 공생사회
 
교육자이자 사회개혁가인 이반 일리치는 ‘citoyen’(의식있는 시민)을 평화의 주체로 내세운다. ‘citoyen’은 사적 소유에 매달리는 일반적인 시민(citizen)과 달리 평화의 감수성이 높은 의식 있는 시민이다. 이반 일리치는 ‘citoyen 중심의 잘 사는 평화 공동체’를 희망했으나, 현실은 이와 달리 지구촌의 중심부는 평화롭게 보이나 주변부에 비평화(peacelessness)가 넘치는 지구촌이 되었다. 그래서 일리치는 중심부의 평화와 주변부의 평화를 구분하여 설명한다.

그는 ‘팍스 에코노미카’(Pax Economica, 근대 자본주의 지배계급의 평화)와 ‘민중의 평화’를 대비하면서 팍스 에코노미카를 비판한다. 근대 자본주의적 팍스 에코노미카에 의한 ‘발전’ 개념과 평화의 개념을 분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발전’은 필연적으로 민중의 평화를 희생시키는 가운데 팍스 에코노미카를 강요한다. 팍스 에코노미카는 민중의 평화를 근원적으로 위협한다.

그는 ‘그림자 노동’(shadow work)과 '고유한(vernacular) 노동'을 대비하며 그림자 노동이 없는 평화의 세상을 갈망한다. 그는 주부의 가사 노동으로 대표되는 그림자 노동을 예시한다. 그림자 노동이란 비생산적·비상품적이라는 이유로 생산노동에 가려진, 지불되지 않은 노동의 세계를 의미한다. 그는 만인이 '고유한(vernacular) 노동'을 즐기는 공생(conviviality)사회를 ‘잘 사는 평화 구성체’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김승국 평화운동가

 

제12호 7면 2007년 7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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