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희 |
쿠사디시에서 바라본 사모스섬. |
지난 호에 소개했던 에페소스를 차분히 다 들러 본 사람이라면 이번에는 사모스섬에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에페소스에서 다시 밀레토스 방향 버스로 30분 정도 가면 쿠사다시에 도착하게 된다. 사모스섬은 쿠사다시에서 엎드리면 코 닿을 데에 있다. 맑은 날, 쿠사다시의 해안가 언덕에 올라서서 보면 마치 고래가 엎어져 있는 형상을 한 섬이 눈에 들어온다. 그 섬이 바로 피타고라스의 고향이자 이솝의 고향인 사모스다. 사모스는 그리스에 속해 있다. 사모스는 아테네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섬이지만, 터키에서는 가장 가까운 그리스섬이다. 그래서 사모스섬은 그리스 쪽에서 가기보다 터키 쪽에서 가는 편이 훨씬 쉽다.
헤로도토스가 바친 사모스 찬가
여름철이면 사모스와 쿠사다시를 연결하는 배가 하루에 2편씩 왕복한다. 아테네에서 시작해 사모스 섬에 온 관광객은 당일치기로 쿠사다시를 거쳐 에페소스를 관광할 수 있다. 반대로 이스탄불에서 시작해 에페소스에 온 관광객은 당일치기로 사모스를 다녀올 수 있다.
사모스섬은 지금은 한가로운 누드 비치로 유명한 섬이 되었지만, 고대에는 헤로도토스가 저서 ‘역사’에서 특별히 언급할 정도로 대단히 번화하고 발전했던 섬이다.
“내가 사모스인에 대해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상세히 서술해 온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그리스 전역에 걸쳐 그 누구도 견줄 수 없는 훌륭한 대사업을 완성한 것은 바로 이 사모스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첫 번째 위업은 높이가 150오르기아(약 266m)나 되는 높은 산에 뚫은 터널로 이것은 산기슭에 있고 양쪽 끝에 입구가 있다. 터널의 길이는 7스타디온(약 1243m), 높이와 폭은 각각 8푸스(약 240cm)이다.
또한 터널 전장에 걸쳐 깊이 20페키스(약 920cm), 폭 3푸스(약 90cm)의 수로가 파여 있고, 이 수로를 따라 거대한 수원으로부터 관을 통해 도시로 흘러가고 있다. 이 터널을 완성한 기사는 메가라인 나우스트로포스의 아들 에우팔리노스였다. 그 두 번째 위업은 항구를 둘러싸고 바다 속에 축조한 방파제로, 깊이는 20오르기아(약 35.5m), 그 전장은 2스타디온(약 402m)을 넘고 있다. 사모스인이 완성한 세 번째 대사업은 우리가 아는 한에서는 세계 최대의 신전으로, 처음에 이 신전의 건축을 담당했던 기사는 사모스인 필레스의 아들 로이코스였다.”(헤로도토스, ‘역사’ 3권)
이동희 |
에우팔리노스 터널. |
내가 사모스에 갔을 때 온전하게 남은 유적은 에우팔리노스의 터널밖에 없었다. 헤라 신전은 그 주춧돌과 집터만 남았을 뿐이었고, 방파제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에우팔리노스의 터널은 헤로도토스가 설명한 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터널의 길이는 총 2킬로미터로 양쪽에서 파 들어가서 중간에서 만났다고 하는데 오차가 거의 없었다. 터널 속에 들어가 사진을 찍을 때 렌즈에 서리가 끼지 않는 것을 보아 통풍도 완벽한 것 같았다. 오늘날에도 터널을 뚫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일종의 종교공동체
피타고라스는 54회 올림픽 경기가 열리던 기원전 570년경에 사모스 섬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젊었을 때 피타고라스는 은주전자 3개를 들고 이집트로 유학을 떠났다고 한다. 그가 이집트 사제들에게 은주전자 3개를 뇌물로 안겼지만 그들은 그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사제들은 풀기 어려운 문제를 내어 그를 돌려보내려 했지만 그것은 계산착오였다. 피타고라스는 오히려 모든 문제들을 풀어 사제들로 하여금 두 손을 들게 만들었다. 그는 외부인들에게 공개되지 않고 사제들에게만 은밀하게 전해져 내려오는 비의마저 모두 전수 받고 이집트를 떠났다.
그는 바빌론을 거쳐 페르시아를 여행하는 도중 조로아스터를 만났다고 전해진다. 조로아스터는 그에게 모든 것은 선과 악이 부딪쳐 생겨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피타고라스는 이집트로 유학을 떠났다가 다시 고향인 사모스로 돌아올 때까지 거의 20년의 세월을 여행으로 보냈다. 오랜 여행에서 사모스로 돌아온 그는 그동안 배웠던 지혜를 사모스인들에게 설파했다. 뱃사람이 대부분인 그들은 피타고라스의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피타고라스가 영혼윤회를 이야기하면서 고기를 먹지 말라고 하자 사모스인들은 이렇게 반응했다고 한다.
“피타고라스여, 물고기에도 영혼이 있으니까 먹지 말라고? 그렇지만 우리가 먹는 물고기는 산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것이오. 그러니 그 물고기에는 이미 영혼이 떠나 버린 것이오. 그러니 우리는 영혼을 먹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영혼이 떠나 버리고 남은 고기만 먹는 것뿐인데, 뭐 그리 죄가 되겠소.”
할 수 없이 피타고라스는 사모스를 떠나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크로톤으로 이주했다. 그는 그곳에서 일종의 종교공동체인 피타고라스학파를 만들었다. 이 학파에서는 영혼의 정화를 위해 수학과 음악을 중시했다. 수학을 중시한 것은 그가 피타고라스의 정리로 잘 알려진 수학 공식을 발견하고 나서 황소 100마리를 제물로 바쳤다고 하는 일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수학 말고 영혼이 정화되는 또 다른 길이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음악의 화음은 수의 비례와 조화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피타고라스가 이렇게 음악이나 수학을 통해서 영혼을 정화하려고 애쓴 것은 영혼의 윤회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영혼 윤회설을 나타내는 일화가 하나 있다. 그가 길을 지날 때였다. 어떤 사람이 어린 강아지를 두들겨 패고 있었다. 강아지는 얻어맞을 때마다 울부짖었다. 그가 개 주인을 나무라며 말렸다. 개 주인이 말리는 이유를 물었다. 피타고라스가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강아지가 울부짖을 때 마다 내 친구의 영혼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를 들었네.”
우주란 다름 아닌 질서
피타고라스에 의하면 영혼은 죽지 않고 윤회를 하는데 죄를 짓게 되어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영혼은 육체의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끊임없이 육체의 감각과 욕구에 의해서 시달릴 수밖에 없고, 혼탁해질 수밖에 없다. 이 혼탁해진 영혼은 육체가 죽으면 다시 다른 육체로 들어가게 되고 그렇게 해서 끊임없이 영혼이 이 육체에서 저 육체로 윤회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동희 |
헤라신전. |
이러한 고달픈 윤회로부터 영혼이 해방되려면 영혼은 정화의 길을 밟아야 한다. 피타고라스는 인간의 영혼은 원래 우주를 닮은 소우주라 생각했고 인간의 영혼은 수학과 음악을 통해서 정화되어 질서와 조화를 회복해 끝내 자신의 근원인 대우주와 일치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에게 우주란 다름 아닌 질서를 뜻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피타고라스에게 물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입니까?”
“조화!”
“그렇다면 우주(Kosmos)란 무엇입니까? ”
“조화와 수!”
시간이 허락된다면, 맑은 날 밤에 사모스 섬의 해안가에 누워 하늘을 한번 보라. 금방 떨어질 것 같은 수많은 별들이 피타고라스 때부터 지금까지 조화롭게 우주를 돌아가고 있는 것을 보리라.
제19호 16면 2007년 9월 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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