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희 |
그리스 아테네 신다그마 광장에 가면 마라톤 전쟁에서 한국전쟁까지 참전해 죽은 무명용사를 기리는 기념비가 서있다. |
철학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사람의 삶에서 떠난 철학은 없다. 고대 그리스 철학도 사람이 살면서 빚어내는 역사적 사건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이오니아 철학이 갑자기 사라진 것은 페르시아가 이오니아 지방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이오니아 지방의 도시들이 연합해서 페르시아에게 대항한 것이 화근이었다. 또한 이 전쟁을 뒤에서 후원했던 아테네도 페르시아의 위협을 받게 된다. 그러나 아테네는 마라톤에서 페르시아 대군을 맞이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다. 이후에도 아테네는 엄청난 규모의 페르시아 대군을 맞아 전쟁을 벌이지만 모두 승리하게 된다.
이동희 |
마라톤 묘 |
아테네에서 철학이 번성하게 되게 된 것은 아테네가 페르시아와 벌인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이었다. 아테네인들은 페르시아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작은 군대를 가지고 이 전쟁에서 승리했던 원인을 시민의 자유에 기반한 민주주의 정체에서 찾았다. 전쟁 이후 아테네는 시민들의 자유를 더욱 더 강화했고, 자유로운 분위기에 따라 철학도 더욱 번성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번 주에는 철학의 판도를 바꾸어 놓은 페르시아 전쟁이야기를 2회에 걸쳐 하고자 한다.
마라톤 기원의 진실
기원전 490년 아테네군은 마라톤 평원에서 페르시아 대군을 격파했다. 보통 이 마라톤 전투의 승전보를 아테네 시민에게 전한 어린 전령의 달리기를 기려 근대의 마라톤이 탄생했다고 믿고 있다. 이렇게 마라톤의 유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의 거리가 정확하게 42.195km 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도 자동차를 빌려 타고 아테네에서 마라톤까지 가보기 전까지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틀린 사실이었다. 자동차의 계기판에는 40km가 훨씬 못 미치는 거리로 나타나 있다.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의 거리는 정확히 36.75km였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마라톤 구간의 거리는 제4회 근대 올림픽부터인데, 왜 42.195km가 되었는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오늘날 마라톤 평야를 찾아가면 아비규환이었던 그때의 전장분위기는 느낄 수 없고 어딘지 모르게 쓸쓸함과 정적만이 감돈다. 단지 높이 10미터 둘레 180미터 정도의 커다란 무덤이 오래 전에 있었던 마라톤 전투를 희미하게나마 기리고 있다. 이 무덤에는 그때 전쟁에서 전사한 아테네군 192명의 재를 묻었다고 한다. 마라톤 전쟁은 페르시아로 대표되는 ‘동양’에 대해 ‘서양’이라는 의식을 그리스인들에게 분명하게 갖게 해주었다.
그리스군은 마라톤 전쟁에서 ‘아테네’만을 지킨 것이 아니라 서양, 즉 ‘유럽’을 지켜냈다. 영국의 전략가이자 사학자인 풀러는 마라톤 전투의 승리는 곧 유럽이라는 아기가 탄생하면서 낸 소리였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마라톤 전쟁에서 유래하는 마라톤의 출발선은 단순한 마라톤 경주의 출발선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이동희 |
마라톤에서 아네테에 도착한 전령. 뤼크 올리비에 메르송 그림 |
마라톤 전쟁하면 아테네까지 숨 가쁘게 달려 가 승전보를 전하고 죽은 어린 병사를 떠올리게 된다. 그 어린 전령은 아고라에 모여 가슴 조이며 전쟁의 소식을 기다리던 아테네 시민들에게 “기뻐하십시오. 우리가 이겼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그 자리에서 탈진해 죽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 어린 전령에 관한 이야기는 고대에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라기보다는 근대에 만들어진 전설이다. 나는 여행에서 돌아와 여러 기록을 찾아보았지만 마라톤 전령에 관한 기록은 발견하지 못하였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아무리 들춰보아도 전령이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 아테네로 뛰어갔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마라톤 전투에서 패퇴한 페르시아 군은 남아 있는 선단을 이끌고 수니온 곶을 돌아 아테네로 직접 공격해 들어가려 했고, 그 공격을 막기 위해 아테네군 모두 집단구보로 급하게 아테네로 귀환했다는 기록만이 나온다. 그러니 아테네군은 마라톤의 승전을 아테네로 전할 전령을 파견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또한 승리에 마냥 기뻐서 들떠 있을 상황도 아니었던 것 같다.
유럽의 탄생을 알린 전투
이동희 |
마라톤 전쟁지도 |
마라톤 전쟁은 동양과 서양이 최초로 벌였던 본격적인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서구문명의 정신사에도 ‘자유’라는 힘이 실제로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그리스 사람들에게 일깨워 준 사건이기도 했다.
다레이오스 대왕은 이오니아의 반란에 대한 보복으로 소아시아 지역을 완전히 초토화한 후, 계속해서 그리스 쪽으로 진격해서 트라키아와 스키타이 그리고 마케도니아를 정복했다. 다레이오스 대왕은 여세를 몰아 그리스 전역을 자신의 발아래 두고자 하였다.
거대한 제국을 지닌 다레이오스가 볼 때 그리스는 지역적으로 그렇게 중요한 곳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는 ‘시민의 자유’에 기초한 그리스인의 자유분방한 생활방식이 이웃인 소아시아인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다레이오스왕에게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자신 이외의 ‘자유인’이란 있을 수가 없었다.
이동희 |
다레이오스는 왕가 출신이 아니면서 왕위에 올라 대제국을 이룬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
다레이오스 대왕은 그리스 각 도시국가로 사신을 보내 “땅과 물을 바치라”고 요구하였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제외한 그리스의 모든 도시국가는 순순히 그러한 요구에 응하였다. 그러나 아테네는 땅과 물을 요구하러 온 사신을 처형 갱 속에 밀어 넣어 버렸다.
스파르타는 한술 더 떠 사신을 우물에 빠뜨린 다음 거기서 실컷 땅과 물을 퍼가지고 가라고 대답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다레이오스는 메디아 출신의 다티스와 자신의 사촌동생의 아들 아르타프레네스 두 명을 새로운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예속시켜 노예로 끌고 오라고 명령을 하였다. 에레트리아를 별 어려움 없이 1주일만에 정복한 페르시아 원정군은 6백척의 전함을 마라톤만에 정박시켰다.
페르시아군은 마라톤 평야에 상륙해서 진을 쳤다. 보병 10만에 기병 1만이 넘는 대규모였다. 페르시아의 상륙소식에 놀란 아테네사람들은 모든 정치적 논쟁을 중단하고 대책을 강구했다. 그들은 스파르타로 사람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지만 스파르타 사람들은 중요한 종교의식이 지나야만 병력을 보내 줄 수 있다고 대답해 왔다.
아테네는 거의 혼자서 페르시아를 대적해서 싸워야 할 판이었다. 아테네군은 시민병 1만명과 플라티아아인 1천명으로 구성되었지만, 수적으로 도저히 가망 없는 전쟁이었다. 10명의 아테네군 사령관들도 막강한 페르시아 군대를 보고 의견이 둘로 갈라졌다.
페르시아에 맞선 아테네의 선택
“터무니없이 적은 우리의 병력으로는 저 페르시아의 대군을 이길 수가 없소.”
“그렇다고 이대로 앉아서 당할 수는 없소. 어떻게 해서든 우리는 이 싸움을 이겨야만 하고, 우리의 고향 아테네를 지켜야만 하오.”
“이대로 전쟁에 나간다는 것은 개죽음이나 마찬가지오.”
사령관 중의 하나인 밀티아데스가 개죽음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싸우고자 주장해도 교전불가를 외쳤던 다른 쪽 사령관들은 끔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밀티아데스에 동조했던 사령관들마저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사령관은 아니었지만 동수로 갈라진 의견을 결정지울 수 있는 사람은 아테네의 군사장관 칼리마코스였다. 아테네의 군사장관에게는 사령관과 똑같이 싸울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할 권리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제23호 16면 2007년 10월 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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