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희 |
엘레아 학파를 배출한 도시 이탈리아의 엘레야. |
아무튼 탈레반에 인질로 잡혔던 사람들이 풀려나 다행이지만 그 사건은 종교의 본질과 역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절대적 진리를 설파하는 것이 종교의 속성이라지만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는 서로 다른 두 종교가 만났을 때는 충돌 밖에 없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자기만의 종교적 진리를 고수할 때 수많은 희생과 처참한 살육이 벌어졌다. 그래서 깨달은 교훈이 종교적 관용이었다. 내가 믿는 종교의 절대적 진리를 주장한다면 상대방이 믿는 종교의 절대적 진리도 존중해 주어야 한다.
이동희 |
오늘날 콜로폰 유적지에는 무성한 숲과 나무만 있다. |
종교에 대한 첫 비판적 반성
서양 철학사에서 종교에 대해 처음으로 비판적 반성을 가한 사람은 기원전 570년경에 태어 난 크세노파네스였다. 크세노파네스는 엘레아 학파의 시조처럼 여겨지지만, 그가 태어난 곳은 엘레아가 위치한 남부 이탈리아가 아니라 지금의 터키 서부해안에 연해 있는 이오니아 지방의 콜로폰이다. 콜로폰은 헤라클레이토스가 태어난 에페소스에서 2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더운 여름날 에페소스를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파묵카 해변을 따라 크세노파네스의 출생지인 콜로폰을 방문하는 여정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받으면서 해변가를 따라 계속 차로 올라가다 보면 먼저 고대도시 클라로스가 나올 것이다.
이 클라로스에서 1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데지르멘데르라는 도시가 나오는데 바로 이곳과 가까운 곳에 콜로폰이라는 도시가 있다.
지도에 보면 유적지 표시가 되어 있지만 막상 콜로폰에 가면 콜로폰이 기원전 7세기와 6세기 때 가장 크고 강력했던 이오니아 도시 중의 하나였다는 것을 알려 주는 유적지 안내판이나 설명문 하나 붙어 있지 않다. 콜로폰 언덕 위에 있었다고 하는 아크로폴리스는 흔적도 없고, 무성한 숲만 남아 있을 뿐이다.
크세노파네스가 ‘콜로폰 도시의 건설’이라는 책을 쓴 적이 있다고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일찍이 젊었을 때 그곳을 떠나 버린 철학자 크세노파네스를 연상시킬 만한 것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대부분의 철학사에 보면 크세노파네스는 엘레아 학파의 시조로 설명된다. 크세노파네스가 엘레아 학파의 시조라는 견해는 원래 플라톤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플라톤은 ‘소피스트’ 편에서 크세노파네스를 엘레아 철학의 창시자로 간주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인 플라톤의 견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형이상학’에서 크세노파네스가 파르메니데스의 선생이었다고 못 박고 있다. 그렇지만 크세노파네스가 엘레아 학파의 시조라는 것에 대해서는 오늘날에는 여러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다만 크세노파네스의 일자로서의 신의 개념과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인 존재 사이의 연관성만이 이야기되고 있을 뿐이다.
이동희 |
호메로스(앵그르 작)-크세노파네스는 호메로스의 신관을 철저히 비판했다. |
크세노파네스는 노래하는 시인, 다시 말해 가수로서 그리스 전역의 궁정과 주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다니면서 노래를 했다. 크세노파네스처럼 여기저기 떠돌면서 노래하는 시인들은 바깥의 새로운 소식을 전해 주는 메신저이자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노래를 통해서 신이 어떤지 인간이 어떤지 그 의미를 전달해 주는 중요한 교육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크세노파네스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가 그려 낸 신의 모습을 합리적으로 철저하게 비판한다. 그는 호메로스, 헤시오도스가 그려 낸 그리스 신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냉소적인 비판을 가했다.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는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들을 신들에게 귀속시켰다. 도적질, 간통, 서로 기만하는 일들이 그것이다.”
자연과 만물의 속성 합리적 설명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가 생각했던 신들이란, 크세노파네스에 의하면 인간이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멋대로 그려낸 모습에 불과하다.
그가 이렇게 전통적인 그리스 신들을 비판한 것은 신화적 설명을 벗어나서 자연의 현상과 만물의 본성에 대해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설명을 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가 주장하는 유일신으로서의 신은 호메로스의 신들이 갖고 있는 인간적 성질이나 도덕적 결함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으로 그것은 생성과 소멸이 없는 우주 전체와 같은 것이었고 일종의 범신론적인 성격을 띤 신이었다. 그의 합리적 신관은 초기 그리스적 사유가 신화적 사고를 탈피하는 데 있어 계몽적이고도 혁명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그의 자연철학을 펼치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전통적 신관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함으로써 더 이상 걸릴 것이 없는 그가 태양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을 때 태양을 신으로서 철석같이 믿고 숭배했던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태양은 모아진 작은 불 조각들로부터 매일 새롭게 생성된다.”
나중에 아낙사고라스가 크세노파네스와 비슷하게 태양을 뜨거운 돌덩어리라고 말했다가 신 모독죄로 재판을 받고 사형에 처할 뻔 한 것을 감안하면 크세노파네스의 발언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이동희 |
파묵카 해변 |
18세기 때 포이에르바하는 크세노파네스와 비슷한 논법을 가지고 기독교에 대한 대대적인 비판을 가한 적이 있었다. 포이에르바하는 신은 인간 오성의 투영물이라고 주장을 했다. 다시 말해 신은 인간이 자신이 생각하는 바대로 그려 놓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철학에서는 이것을 신인동형동성론(Anthropomorphism)이라 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크세노파네스에게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의 ‘기독교의 본질’이란 책이 나온 이후 독일에서 종교 비판은 끝났다고 선언을 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크세노파네스를 좀 더 알았더라면 독일에서의 종교 비판은 이미 크세노파네스 때부터 끝났다고 선언하지 않았을까 싶다.
신에 대한 진지한 통찰을
나는 한국 교회에서도 한번쯤은 크세노파네스의 신에 관한 통찰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유일신이자 인격신을 믿는 기독교의 특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 동안 기독교가 하나님을 너무나 인간 자신의 편의와 기준에 맞추어서 그려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신 무한한 존재이자 완전한 존재라고 믿는다면, 과연 그러한 하나님을 주일날마다 “헌금통에 얼마나 집어넣나” 감시하는 그런 ‘좁쌀 영감님’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을까? 무한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을 우리 인간의 기준과 생각에 따라 그려 놓고 숭배하는 것은 아닐까? 신을 우리의 주관적 생각에 가두지 않으려면, 시인이자 철학자인 크세노파네스가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소와 말이 그리고 사자가 손을 가졌거나, 그들의 손을 가지고 그림을 그릴 수 있고, 인간들이 하는 일을 행할 수 있다면, 말은 신의 모습이 자신들을 닮도록, 소는 소의 모습으로 그리고 신들의 몸을 그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형태에 따라서 만들었을 것이다.” (‘단편’, 15)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제20호 16면 2007년 9월 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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