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신문>은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의 ‘철학여행까페’를 연재한다. 이동희 박사는 한신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헤겔의 정신현상학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신대 연구교수를 역임했다. 저작으로는 ‘사진으로 보는 서양 철학 기행 1’, 옮긴 책으로 ‘헤겔의 정신현상학’,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 ‘라이프니츠가 만난 중국’ 등이 있다. 이동희 박사는 지난 2000년부터 유럽문명의 시원을 따라 현재를 조망하기 위해 답사하고 정리한 내용을 이번 연재기획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한다. /편집자
“진리는 감추는 것이 아니라 드러냄”
얼마 전부터 터키 여행이 붐을 이루고 있다. 나는 터키를 가면 꼭 들러 보아야 할 곳으로 밀레토스를 권한다.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가 태어나 활동하던 밀레토스는 유럽 문화의 모태가 된 곳이다. 유럽 문화가 세계에 영향을 끼친 힘은 과학적인 합리적 사고에 있었다. 바로 그 과학적인 합리적 사고의 씨앗을 뿌린 곳이 밀레토스다. 그런데도 밀레토스는 관광코스에 들어 있지 않아 찾는 이가 드물다.
이동희 |
로마시대 때 증축된 밀레토스 원형극장 |
그래서 에페소스까지 왔다가 밀레토스를 못보고 가는 경우가 많다. 터키까지 왔다면, 유럽의 정신문화가 시작된 곳인 밀레토스를 한번 들러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밀레토스라는 이름은 원래 크레타와 관련이 있다. 밀레토스는 아폴론과 요정 아레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미소년이다. 미소년 밀레토스의 사랑을 얻기 위해 크레타의 왕 미노스와 동생 라다만티스가 다툼을 벌였다. 그런데 밀레토스는 미노스나 라다만티스를 선택하지 않고 미노스의 또 다른 형제인 사르페돈을 선택한다. 이에 분노한 미노스는 밀레토스를 크레타 섬에서 쫓아낸다. 크레타에서 쫓겨 난 밀레토스는 소아시아의 카리아로 건너가 도시를 건설하고 왕국을 세우게 된다. 이후 그 지역의 이름은 그의 이름을 따서 밀레토스가 된다.
과학적 사고의 씨앗을 뿌린 곳
이동희 |
디디마 신전. 쌍둥이 신전이란 뜻으로 아폴론과 쌍둥이 누이 아르테미스의 신전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폴론 신전만 남아있다. 이 신전은 기원전 1100년 전부터 세워지기 시작해 로마 율리아누스(361~363)황제에 의해 완성됐다. |
그러나 밀레토스라는 이름이 인류사에 길이 남게 된 것은 밀레토스에서 활동했던 철학자들 덕분이었다. 밀레토스의 철학자들은 아테네에서 이주해 온 자들의 후손이다. 그런데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아테네에서 처음 밀레토스로 이주해 온 자들은 여자들을 데리고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현지에서 아내가 될 여자들을 구했다. 하지만 카리아 지역의 여자들은 이미 남편과 자식들이 있었다. 그들은 남편과 자식들을 죽이고 카리아 지역의 여자들을 아내로 삼았다. 이 일 때문에 밀레토스에서는 여자들이 결코 남편과 식사를 같이 하지도 않으며, 남편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금기사항을 딸에게 전해서 지키게 했다고 한다. (헤로도토스, 역사 1권)
최초의 서양 철학자들을 배출한 선조들의 밀레토스 이주기는 이렇게 야만스럽고 잔인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주 초에 여러모로 행운을 누렸다. 과정이야 어쨌든 간에 그들은 아내를 얻었고,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후를 가진 이오니아 지역에 도시를 건설할 수 있었으니까.
밀레토스는 좋은 입지 조건 덕에 기원전 6~8세기에 황금기를 맞았다. 밀레토스에는 내륙인 리디아로 강이 나 있어 교통이 아주 편리했다. 편리한 교통은 다른 지역과의 경쟁에서 무역항으로서의 밀레토스의 입지를 보장해 주었다. 밀레토스인들은 내륙에서 나온 원료들을 가공해 팔거나 포도주와 올리브기름과 같은 고급 농작물을 되파는 중계 무역에 종사했다. 탈레스가 살았던 시대의 밀레토스는 지중해 모든 지역에서 배가 드나들던,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와 활력이 넘치던 도시였다. 오늘날의 뉴욕, 당시의 밀레토스였다.
밀레토스에 도착하면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오는 것은 웅장한 자태의 원형 극장이다. 탈레스가 살았던 시절에 이 원형 극장 앞으로 지중해 모든 지역의 배가 드나들었다. 지금 볼 수 있는 원형 극장은 기원전 4세기경에 객석 5천700석에 규모로 세워진 뒤 헬레니즘 시대를 거쳐 로마 시대에 와서 2만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확대된 것이다. 이 원형 극장에 올라서면, 메안데 평야와 그 평야에 솟아오른 산 하나가 보인다. 기원전 494년에 이 산은 산이 아니라 섬이었다. 이 섬 앞에서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의 처절한 해전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철학이 시작된 이유
그런데 왜 밀레토스에서 철학이 생겨났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질적인 행복을 위한 필수품과 여가가 이미 마련된 시대의 산물이 철학이었고, 그 동기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한마디로 말해 먹고 살만 하니 여유가 생겼고, 취미 삼아 호기심을 충족하다 보니 철학, 즉 학문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라면, 풍요로운 밀레토스야말로 최초의 철학이 태어날 수 있었던 최적지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만으로 철학이 생겨 날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풍요로운 다른 지역들에서도 철학이 생겨났어야 하지 않은가. 나는 밀레토스에서 철학이 생겨난 이유를 그 당시 밀레토스가 가졌던 다양한 문화와 개방성에서 찾는다. 밀레토스는 중계 무역을 하던 무역항으로서 지중해의 여러 국가들에서 상인들이 드나들었다. 상인들은 상품만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 문화도 전파한다. 다양한 문화가 교차하며 공존하는 그런 지역에서는 자기 문화나 가치관은 상대적이 될 수밖에 없다. 타문화와 비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기 문화를 상대화하고 객관적으로 바라 볼 수 있다. 그것이 개방성이다. 자기 문화에만 빠져 있으면 발전이 없다. 개방성에는 고집과 독단 보다는 남을 설득할 수 있는 합리적 정신이 중요하다. 물건을 팔려면 남을 설득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 합리적 정신이 상업도시 밀레토스를 지배했다.
밀레토스에서 태어난 탈레스는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라고 최초로 물었다. 그리고 세상을 이루는 아르케(원리이자 질료)가 물이라고 대답을 했다. 이렇게 해서 철학, 즉 학문이 시작되었다. 탈레스가 종교와 신화에서 탈피해 세상의 근원에 대해 합리적인 질문과 답을 내놓게 된 배경에는 밀레토스의 합리성과 개방성이 크게 작용했다. 진리를 뜻하는 그리스어 알레테이아(aletheia)는 ‘개방성’, ‘드러냄’을 뜻한다. 진리는 감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드러냄, 즉 개방성이다. 진리를 탐구하는 행위는 감춘 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탈레스는 신화나 종교처럼 진리를 ‘믿음’의 차원이 아니라 ‘탐구’의 차원에서 접근한 최초의 인물이다. 이러한 탐구는 그의 제자들인 아낙시만드로, 아낙시메네스로 이어져 서양의 과학과 학문이라는 커다란 열매로 나타났다.
정신의 위대함을 깨닫다
탈레스로 시작하는 밀레토스 학파 철학자들은 사실 그 지역의 다양하고 개방적인 문화의 산물이다. 탈레스도 오랫동안 바빌론과 이집트를 여행하면서 많은 것을 배워 왔다. 그런데 그 배경을 무시한 채 철학이 탈레스에서 갑자기 시작하는 것처럼 설명을 하는 많은 서양철학사들를 보면 동양과 서양을 구분하여 서양문화의 우월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이집트와 바빌론이 없었다면 탈레스도 없었을 것이다.
현재 항구도시 밀레토스는 허허벌판에 서있다. 탈레스가 예측한 일식이 일어났던 기원전 585년 5월 28일로부터 우리가 사는 지금까지, 어림잡아 계산해 보아도 2천592년하고 3개월이 더 지나갔다. 그 많은 세월 동안에 진행된 퇴적 작용이 바다를 육지로 바꾸어 놓았다. 나는 고대에 그렇게 번영했던 도시가 지금 허허벌판에 잔해로만 남아 있는 것을 보니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곳에 살던 철학자들이 남긴 정신이 지금까지 인류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밀레토스에서 세월의 무상함을 뛰어 넘는 정신의 위대함을 새삼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제17호 16면 2007년 8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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