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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민족&평화

“오늘은 남아있는 인생의 첫날”

사회운동 은퇴 준비 홍근수 목사

 

2차 남북정상회담이 전격 발표되면서 올해 8.15 광복절은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이들에게는 남다른 의미였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50년 분단 세월은 한 쪽 폐로만 숨을 쉬는 것처럼 반쪽짜리 해방이었는지도 모른다.  

“8월 15일. 나는 민족사적인 해방의 날은 아니었으나 그보다 8년전 이 날에 태어났다. 이 날에 출생한 것이 일제로부터 해방을 예언하는 것 같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 날이 나의 생에 큰 의미를 주고 규정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집회 현장엔 언제나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공동대표인 홍근수 목사(70. 전 향린교회 목사)의 ‘나의 걸음’이라는 자서전에 나오는 자신의 출생과 관련된 대목이다. 반쪽 해방을 아쉬워하며 평화, 통일, 그리고 사회운동에 매진해온 홍 목사가 고희를 맞았다. 13년간의 미국 유학생활을 하면서 ‘반미목사’로 거듭났다는 홍 목사는 일흔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집회 현장의 맨 앞에서 늘상 만날 수 있다. 을지포커스렌즈 연습을 반대하는 집회(20일 오전), 한미FTA 범국본오종렬 정광훈 대표의 석방을 촉구하는 집회(20일 오후), 이랜드사태 해결을 촉구하는 집회 등에서 늘 은은한 미소로 젊은 활동가들을 격려하고 있다.

지난 21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만리재 뒷골목에 있는 평통사 사무실에서 만난 홍근수 목사는 감물염색을 한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이날 오전에도 그는 경기도 성남에 있는 한미연합사 전쟁지휘소 탱고(Tango) 앞에서 1인시위에 참가한 뒤였다. “한마디로 전쟁연습이지요. 남북정상회담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입니다.” 2차 남북정상회담이 예고되면서 평화와 통일의 순풍이 불고 있지만 지난 20일부터 약 열흘동안 미국은 을지포커스렌즈(UFL) 연습에 돌입, 한반도에 전쟁기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라는 설명이 이어졌다.

유학생활하며 반미목사로

미국은 군사적인 영향력 뿐만아니라 이제 한미FTA를 통해 경제적인 패권까지 노리고 있다. 그는 현재 한미FTA를 반대하는 ‘불법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오종렬 정광훈 대표가 집회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구속되어 옥살이를 하고 있는 것이 못내 안타깝다. “두 분 다 일흔 가까이 된 나이라 무엇보다 건강이 걱정이에요.”

홍 목사 역시 공중파 방송토론에 나가 발언한 일로 인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년6개월 동안의 옥살이를 한 경험이 있기에 국가보안법 폐지에 앞장서왔다. 하지만 평화협정이 논의되고 있는 이 시점에도 헌법 위에 군림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유신정권 시절 서른 일곱의 나이에 유학길에 오른 홍근수 목사는 그 스스로 ‘친미목사’에서 ‘반미목사’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왔노라고 말한다. 그가 미국의 본질에 눈 뜬 것은 미국 시카고에서 열렸던 북미기독학자 연례대회에 참여했다가 한국에 20여년간 선교사로 파견됐던 시노트 신부의 강연을 들으면서다.

‘인혁당 사건’에 항의하다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에 의해 강제 출국당한 시노트 신부는 미군이 주둔한 어느 나라에서건 ‘양키 고홈’ 소리가 나오지만 이상하게도 한국에서는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며 한국인의 인권을 짓밟고 있는 데도 미국을 사랑한다는 요지로 강연을 했다.

 

그 이후에도 매카시 선풍에 감옥에 갔던 경험이 있는 신학교수들을 통해 해방신학을 접하는 한편 미국의 유력 언론이었던 ‘보스턴 글로브’나 ‘뉴욕타임즈’에서 쏟아내는 비판적인 보도들을 접하며 친미사상은 녹아내렸다고 회고했다.

12년 유학생활을 마치고 향린교회 담임목사로 재직하면서 그는 교회개혁을 위해 힘쓰는 한편 사회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5년전 65세 나이로 자원은퇴를 선언했던 것도 교회개혁의 일환으로 스스로 모범을 보이기 위한 일이었다. “미국에서는 65세 이전에도 20년 연금을 다 부은 후에는 은퇴를 해요. 한국에서는 일흔이 지나도 근무하려고 하는데, 노욕이라고 생각해요. 명년에는 사회운동에서도 모든 대표직에서 물러날 생각입니다.”

“통일되면 북에서 목회활동을”

홍근수 목사는 지난 2005년 조선노동당 창건 기념 50돌을 맞아 북으로 초청받아 북한에 있는 교회에서 설교를 한 일을 떠올리며 감격에 젖었다. 유학생활 당시 김일성 대학의 고 홍동은 목사와의 편지를 주고 받으며 통일이 되면 김일성대학에서 기독학을 가르치고 싶다는 소원을 대신 이룬 셈이라고 말했다. “내가 세례 요한이라면 당신은 메시아가 되어 통일된 나라에서 기독학을 가르쳤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남북교류가 활발해져 다시 북한주민들을 위한 설교를 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해요.” 당시 그는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에 대한 강의를 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신학을 배우며 깨달은 것이 있다면 바로 ‘인간은 자유하는 존재’라는 것이며, 예수 또한 인간해방을 위해 십자가의 짐을 졌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인터뷰 말미에 홍근수 목사는 평화운동, 통일운동, 사회운동을 하는 후배들에게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오늘은 생애의 마지막이지만 남은 여생의 첫날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체제에 굴복하지 않고 역사적 판결을 중심에 두고 소신껏 행동하라는 것이죠.” 그가 말하는 ‘자유하는 존재’는 멀지만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향미 기자

 

제17호 17면 2007년 8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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