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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人/오피니언

밥상 공동체와 신자유주의

대선주자에게 보내는 평화담론[5]

 

21세기의 사회·경제적 분단을 잉태한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는 세계화(Globalization)를 동반하므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라고 부르는 게 적절하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국가를 정복하기보다 시장을 정복한다. 식민지 시대의 영토정복이 아닌 부의 소유권을 탈취하는데 관심이 있다.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정복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이어져 인간성 말살·인간 공동체의 파괴를 예고한다. 인간의 밥상 공동체, 인간이 자연과 함께 잘 살며 향유할 수 있는 평화공동체를 위협한다. 이렇게 밥상-평화 공동체의 위기를 부르는 신자유주의를 방치하면 할수록 잘사는 평화가 깃들지 않는다.

빈곤의 심화

신자유주의가 초래하는 대량 실업·불완전(불안전) 고용·사회적 배제·남녀 불문의 초과착취·아동 착취는 ‘빈곤의 세계화’를 부채질한다. 거대한 자산을 지닌 특권층 집단이 있는 한편 불안전 고용자·실업자·사회적으로 배제된 자들의 무리가 존재하는 이중구조의 격차사회에서 빈곤은 하나의 규범이 된다.

빈곤을 규범으로 삼는 신자유주의는 (노동의 유연성에 입각한) ‘유연한 자본주의(flexible Capitalism)’ 아래에서 진행된다. 자본가에게 구조조정·해고의 자유가 보장되는 ‘유연한 자본주의’는 ‘어느 날 갑자기 노동자들을 내쫓는 자유’를 만끽한다. 이 바람에 내쫓긴 자의 밥그릇 면적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밥그릇이 줄어들 위기에 빠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밥줄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것(최근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 등)은, 신자유주의에 맞서 밥 그릇·밥줄·밥상 공동체를 지키려는 생존권 싸움이다.

신자유주의의 구조조정과 노동 유연성(노동 유연화)은 노동시장에 직접적인 충격을 주어 실업·비정규직 증가 등 노동의 불안정화를 초래한다.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빼앗기고 생활기반(밥상 공동체)이 붕괴된 수많은 사람들의 빈곤이 가중되고 있다. 이 시대의 빈곤은 과거와는 다른 빈곤이다. 과거에는 빈곤이 나태·무절제·게으름·낭비·방탕 등 개인의 탓으로 여겨졌으나, 새로운 빈곤은 저임금·실업 등 사회적인 원인이 내재한 체제의 문제이며 구조적인 문제이다. 사회 안전망(밥상 공동체의 연계망)의 미흡이라는 구조적인 문제가 빈곤을 방치하게 된다. 신 빈곤은 또 이혼률·자살율의 급증을 유발하여 가정 공동체(가정의 밥상 공동체) 해체, 사회공동체의 통합저해라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김상택 기자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의 어린이 회원들이 15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자주통일범국민대회에 참가해 평화협정 체결을 기원하는 손피켓을 들고 있다.


빈곤의 여성화(여성들의 빈곤) 또한 심각하다. 더 유연한 노동을 찾는 자본의 속성에 따라 여성들의 빈곤이 가중되고 있다. 유연한 자본주의는 여성 노동력을 착취하고 자신의 축적구조를 완성시킨다. 자본가들은 여성 노동자가 남성 노동자보다 순종적이고 덜 조직적이며 결혼·임신 등으로 지속적인 노동이 어려운 약점을 악용하여 마음 놓고 해고한다. 여성노동은 남성노동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여 수준 낮은 여성임금이 정당화된다.

문제는 비정규직의 79%가 여성이라는 사실이다. 여성의 빈곤화가 심해지는 것은 여성 비정규직이 많기 때문이다. 여성 노동자의 퇴출로 이어지는 노동 유연화 전략의 산물이 여성의 빈곤화이다. 남성 가장의 실업으로 소득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소득을 보완하기 위해 비정규직 여성노동자가 되는 사례가 많다. 이들 중 상당수의 여성이 직접 가구주가 되는 경우도 많다. 빈곤한 여성 가구주(여성 가구주가 남성 가구주 보다 4배 가량 더 빈곤하다)가 더 이상 경제력을 뒷받침하지 못할 경우 가족해체·가정붕괴·가정의 밥상 공동체 붕괴를 가져온다.  

그리고 일 할수록 가난해지는 근로빈곤(working poor)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새로운 빈곤을 대변한다. 노동시장에서 배제된 전통적인 구 빈곤층과 달리 ‘일을 하는데도 가난한 근로 빈곤층’이 확대되고 있다.

근로 빈곤층의 이웃사촌인 비정규직이 전체 근로자의 절반을 차지한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임금·소득격차 심화-차별은 직장 내의 통합과 사회통합을 해치는 심각한 문제이다. 직장 공동체가 개별적 경쟁관계로 대체되는 현상, 고용불안 스트레스로 인한 소속감의 약화,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분절화 심화, 직장 구성원 사이의 이질성 확대로 이어지면서 직장 공동체(직장의 밥상공동체)의 결속력을 약화시킨다.    

가속도 붙는 양극화

1997년의 외환위기를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극복한 끝에 극심한 양극화를 낳았다. 10의 가진 자와 90의 가지지 못한 자로 사회가 양극화되면서 시민사회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그나마 유지되어 오던 한국 사회의 공동체(밥상 공동체를 중심으로 훈훈한 인정이 넘치는 사회)가 양극화로 인하여 붕괴일보 직전에 있다. 인간미 넘치는 공동체 윤리와 역행되는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 이데올로기·성공신화(아침형 인간=부지런함=스피드=성공이라는 공식,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말)가 밥상 공동체를 위협하고 있다.

한미FTA의 악몽

FTA(자유무역협정; Free Trade Agreement)는 무역자유화, 투자·서비스의 자유화, 각종 무역규범·경제정책 정책, 더 아나가 사회·정치 영역의 조화와 조율을 추구하는 포괄적·다면적인 경제통합 협정으로 변화하고 있다. 특히 미국은 신자유주의를 추진하기 위한 정책수단으로 FTA를 활용한다. 철저한 시장개방·민영화·정부개입 축소를 요구하는 FTA가 미국의 희망사항이다.

신자유주의적 성격이 강한 ‘포괄적인 FTA’는, 경쟁력이 떨어지는 약소국에 대하여 불공정한 관계설정을 요구하는 ‘강자의 보호주의’로서 ‘비대칭적 신자유주의 모델’을 따른다. 이 모델이 한미 FTA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비대칭성이 농업분야에 집중되고 있다. 세계 제1위의 농업생산력을 과시하는 미국의 값싼 농산물이 식량 자급률 25%의 한국에 물밀듯이 들어오면 한국의 농업은 결정적으로 붕괴한다. 한국의 농산물 중에서 미국과 관세 없이 경쟁해서 살아남을 품목이 없으므로 농촌의 몰락으로 이어지고(농촌이 몰락하면 생존하기 위해 도시로 유입된 농민들은 도시의 하층민을 형성하여 양극화 현상이 더욱 심화될 것이다) 지역경제·지역 공동체의 붕괴를 동반할 것이다.

농업의 측면에서 볼 때, 한미 FTA는 식량안보를 미국에 상납하는 협정이다. 식량이 곧 주권이고 농업이 생명임을 망각한 참여정부는 농업의 다원적 가치(농업의 식량안보의 가치, 환경적 가치, 인류문화를 지탱해온 가치, 온 생명을 유지해온 생명가치)를 너무나 쉽게 포기한다. 단순히 포기하는데 그치지 않고 유전자 조작 식품·대규모의 농약살포 식품·광우병 쇠고기(광우병의 병원균이 들어있을 개연성이 있는 쇠고기)를 미국으로부터 들여옴으로써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데 앞장선다.

정리하며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신자유주의에서 밥상 공동체를 도저히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밥상 공동체를 이루며 잘사는 평화’를 위한 사회변혁이 절실하다. 한국 사회에서, (러시아 혁명 때처럼 빵과 평화를 달라는 직접적인 봉기의 수준은 아니지만) 민초들의 심리적 봉기가 일어날 기미가 보인다. 심리적 봉기의 기미를 억제하는 사회적 잠금장치가 풀리면 변혁의 물결이 일어날지 모른다. 제2의 6월 항쟁이 일어날지 모른다. 1987년 6월 항쟁에 이은 노동자 대투쟁이 재현될지 모른다. 6월 항쟁이 낳은 ‘87년 체제’의 절차적 민주주의가 수용한 신자유주의 체제(97년 체제)를 변혁하는 ‘2007년 체제’의 맹아가 이번 대선에서 엿보이는데, 이 맹아는 정작 ‘평화의 밥’ 안에 있다. ‘평화의 밥을 골고루 먹으며 잘 사는 평화체제’ 속에 2007년 체제의 변혁이 내재해 있다. 

공동체의 해체와 민중의 분노

 

‘평화가 밥’은 매우 평범한 어법이지만 그 속에 격렬함이 내재해 있다. 동서고금의 민중항쟁은 밥상공동체가 해체되었을 때 일어났다. 지배계급이 백성들에게 평화의 밥을 주지 않아 밥상 공동체가 무너졌을 때, 민중들은 항쟁의 맹아를 키우기 시작한다. 중국의 크고 작은 항쟁은 농민들의 밥상 공동체가 유린되면서 일어났다. 러시아 혁명도 예외가 아니다. 1917년 혁명 당시 평화의 밥이 그리운 러시아 민중들은 “빵을 달라, 평화를 달라!”고 절규했다.

 

러시아 혁명

 

러시아 혁명의 압도적인 구호는 평화와 빵이었다. 혁명 당시 대중들은 평화·빵·토지를 원했지만 짜르 체제는 아무 것도 줄 수 없었다. 그래서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혁명의 봉화를 올린 1917년 4월 3일. 사람들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기차역에 모였다. 레닌은 손을 번쩍 들고 환호하는 군중들 앞으로 당당히 나아갔다. “이제 빵과 평화를 위하여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가 갖도록 합시다. 모든 토지를 국가의 소유로 만듭시다. 무엇보다 이 지긋지긋한 제국주의 전쟁을 끝냅시다!” 사람들의 환호가 더욱 커져 갔다. 파업을 주도한 노동자들이 머리 위에는 “짜르를 타도하라!”, “전쟁을 그만해라!”, “빵을 달라!”는 표어가 쓰인 붉은 깃발이 나부꼈다. 임금노동자들과 농민들이 “모든 토지는 농민에게, 모든 공장은 노동자에게”라고 외쳤다.

 

한편 병사들은 탈영이라는 방식으로 평화 문제를 해결했다. 1천 마일에 이른 전방에서는 수백만의 병사들이 파도처럼 술렁거렸다. 그들은 “평화, 평화!”를 외치는 대표 수백 명을 모스크바로 보냈다. 길모퉁이에서 수많은 병사 연설자들이 전쟁을 끝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정부가 평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는다면 병사들은 참호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밥상 공동체와 한반도 분단

 

밥상 공동체가 깨져 민중항쟁이 일어난 사례를 멀리 러시아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바로 조선 땅에서 평화의 밥을 달라고 절규한 민초들의 항쟁이 터졌으며 오늘날의 분단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조선 후기의 민란이 한반도 분단의 원류를 형성한 것이다.

 

한반도 분단은 (국제)정치적으로 1945년 해방 이후에서 비롯되었지만, 사회·경제적으로는 조선 후기의 민생고로 말미암은 19세기의 민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왕조의 학정, 지배계급의 가렴주구·토지수탈로 밥상 공동체를 도저히 이룰 수 없었던 민의 저항이 민란으로 폭발하고 이 민란이 이어져 갑오농민전쟁이 발발했다.

 

갑오농민전쟁을 계기로 청일전쟁이 터지면서 외세가 한반도 문제에 개입했으며, 그 결과 한반도는 국제 대리전의 전쟁터로 전락한다. 19세기의 민란·신미양요→갑오 농민전쟁·청일전쟁·민비시해 사건→아관파천→러일전쟁·을사 보호조약·의병전쟁→한일 합병조약·일제지배·일제의 패망과 민족해방·미 군정·한국전쟁·정전·분단체제로 이어져 오는 가운데, 민초들의 평화로운 삶은 아예 불가능했다.

 

민이 잘사는 길을 모색할 겨를이 없었다. 평화의 밥을 먹을 수 없는 민의 유랑·삶의 분단, 생활세계의 분단이 밥상 공동체의 해체로 이어져 사회·경제적 분단이 가중되었다. 19세기 이후의 사회·경제적 분단이 1945년 이후의 (국제)정치적 분단과 어우러져 한반도 분단의 원류를 이룬다.

김승국 평화운동가

 

제16호 8면 2007년 8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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