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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人/오피니언

중도의 허상

[시론]

 

대통령 선거가 4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이미 이 무렵 주요정당의 후보가 결정되었던 지난 대선의 시간표와는 분명 차이를 보이지만, 각 당의 후보선출 경쟁의 본격화로 대선 국면이 서서히 가열되고 있다.

 

직선제 도입과 외형적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 한국사회에서 대통령 선거는 시대정신이 집약되고 표출되는 정치의 장이었다. 군부독재 종식, 문민정부 실현, 수평적 정권교체, 지역주의 청산 등 당대의 한국사회가 처한 모순이 집약된 역대 대선의 쟁점들은 바로 시대정신이 투영된 가치들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대선은 한국사회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종합적 청사진을 둘러싼 정치세력간의 경쟁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대선은 다른 선거와 달리 ‘평가’와 ‘회고’가 중심이 아닌 ‘전망투표’의 성격을 갖는다고 하며, 후보와 정치세력의 비전과 정책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이번 대선의 시대정신은, 그리고 한국사회의 미래를 담지하겠다고 나선 후보와 정치세력이 유권자들에게 제시하는 비전은 무엇인가?  

대선의 시대정신

대선에 나선 후보 및 정치세력의 가치와 비전이 유권자들에 전달되고 소통하는 매개는 그것이 담론의 수준이든, 레토릭이든 언어다. 때문에 어떤 개념과 단어들을 사용하는가는 후보의 가치와 비전, 그리고 시대정신을 읽고 있는가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아직 초반이긴 하지만 대선에서 나선 후보와 정치세력들이 대표적으로 많이 쓰고 있는 개념의 하나가 ‘중도’(中道)이다. 정치용어로서 중도는 이념적으로 보수도 진보도 아닌 그 중간 정도의 가치체계, 정치성향을 말하는 개념이라 볼 수 있다. 때문에 이념적 위치는 될 수 있을지언정 그 자체가 비전이라고 볼 수 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 대선정국에서는 중도의 범람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이 개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심지어는 이념적으로 가장 오른쪽에 서 있는 후보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는 박근혜 후보조차 간간히 스스로를 중도라 규정하고 있으며, 특히 범여권이라 불리는 정치적 경계 내에 있는 후보들은 예외 없이 이 범주 속으로 스스로를 위치지우고 있다. 유일하게 민주노동당만이 중간이기를 거부하는 정치세력이다.

모호한 기준 통할까

이처럼 중도가 넘치는 이유가 무엇일까? 무엇보다 국민들의 이념, 정치 성향이 온건 중도로 수렴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때문에 중간이 전체를 아우르는 데 유리한 정치적 포지셔닝이라는 판단의 발로일 것이다. 그리 틀린 진단은 아니다. 실제로 국민 정치성향을 보여주는 조사에서 온건 중도 지향의 유권자 비중이 과거에 비해 넓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여전히 국민들의 이념과 정치성향을 분류하는 기준이 대체로는 국가보안법의 존폐나 미국에 대한 태도 등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 재벌 상속문제에 대한 입장, 빈부격차 해소와 복지확대에 대한 의견, 부동산 투기 대책 등에 대한 입장 등 변화하고 있는 사회경제적 환경을 반영한 기준으로 국민 정치성향을 나눈다면, 그 결과도 중도라는 모호한 기준으로 수렴될까?

후보들에게 묻는다

대선정국에 범람하는 중도의 허상이 여기에 있다. 민주화이후 우리사회에서 과거와 다른 이념과 가치정체성의 분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특히 사회경제적 영역에서 가치구도가 강화되고 있다. 그러나 정치세력은 스스로의 가치체계와 비전을 정립하지 못한 채 중도라는 뿌리 없는 수사로 스스로를 포장한 채 낡은 구도와 정치공학에 의존해 이번 대선에 나서고 있다.

수구냉전주의, 개발주의, 시장주의가 혼재된 한나라당은 논외로 치자. 반한나라당 연합을 통한 재집권 이외에 어떤 정치적 비전도 공통의 가치기반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소위 범여권의 현실은 중도의 허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범여권의 십수 명에 달하는 후보들에게 한 가지만 묻자. 수백만 국민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는 비정규직 문제에 어떤 대책이 있나? 당신들, 지금 이 순간 그 문제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고 있나?    


박원석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제16호 14면 2007년 8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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