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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시민사회

“5월 기억 희석돼도 광주정신 전파해야”

광주항쟁 거리방송 차명숙 씨

국‘민’과 인'민', ‘민’중과 ‘민’족, 적용되는 개념은 다르지만 사회를 이끌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체는 언제나 ‘민’(民)이었습니다. <시민사회신문>이 앞으로 바라 볼 영원한 대상 역시 ‘민’입니다. 창간호 ‘테마기획 民’ 은 낮은 곳을 향해 연대를 지향하는 이들과 활동, 삶을 찾았습니다. /편집자


안동서 ‘홍어 아지매’로 살며 영호남 가교역할

“아지매요, 홍어 먹을라꼬 얼매나 기다렸는 줄 아니껴.”

“하이고, 미안합니다. 얼른 준비해드릴랑게요.”

막노동을 끝낸 차림으로 막걸리를 걸치러 온 아저씨들이 안동에서 유명한 ‘홍어집’ 앞에서 왁자지껄하게 주인아줌마를 맞는다. 주인은 봄볕이 좋아서 달래를 캐다 늦었다면서 멋쩍어하며 손님들을 가게로 안내했다. 구미에서 건설 일용직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다는 그들과 함께 가게 주인을 기다리던 기자도 덩달아 들어갔다.

경북 안동의 신시가지인 옥동에 위치한 이 홍어집의 주인은 차명숙(47) 씨다. 차씨는 27년 전 광주민중항쟁 당시 애절하면서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거리방송을 통해 광주 시민들의 심금을 울렸던 여성들 중 한 명이었다. 광주항쟁 당시 열아홉 소녀였던 차명숙은 이제 쉰을 바라보는 중년의 여성이 되어 있었다. 환한 웃음으로 손님들을 맞는 그녀의 얼굴은 과거의 상처 따위는 몽땅 씻어낸 듯 했다.

안동이 고향인 기자가 차씨 소식을 들은 것은 지역에서 시민운동을 하는 분들을 통해서다.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전라도 사람이 어떻게 경상도로 와서 살아갈까’하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출발해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그녀는 시대와 어떻게 화해하고, 또 현실을 살아가고 있을까라는 의문이 이어졌다.

“한우도 못먹고 홍어도 못먹니더”

 

홍어 마니아 세 사람과 함께 가게로 들어서자, 삭힌 홍어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우리도 몰랬는데, 먹어보이 홍어가 술안주로 최고 아니이껴.”라며 그들의 홍어 예찬이 늘어졌다.

안동에 가족을 두고 일주일에 한 번 온다는 김모(52) 씨가 유인물 한 장을 손에 들며, “하나님도 에프티에이 반대한다고요? 하나님이 있긴 있니껴”라며 툴툴댔다. 그가 손에 든 것은 천주교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와 정의구현사제단, 정의평화위원회 이름으로 낸 성명서. “우리의 농업, 농촌 농민들을 파탄으로 내몰고, 우리 삶을 속속들이 바꾸어 놓게 될 한미 FTA는 저지되어야 합니다”라며 차분하게 교인들을 설득하는 글이 실렸다.


입가심으로 한참 제철을 맞아 살이 오른 대게가 상위에 오르자 소주 한 잔씩을 받아들었다. 얼마전 타결된 한미FTA에 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

수출을 늘려서 외화를 벌어들여야 잘 살 수 있지 않겠냐’, ‘농민들 살 길이 없어지기 때문에 안된다’, ‘우리같은 서민들은 비싼 한우는 못먹는다’, ‘결국 수입소고기는 서민들이나 먹게 되는 것 아니냐’라며 공방이 이어졌다. 돼지보쌈과 삭힌 홍어찜에 갓김치를 곁들인 삼합을 가지고 FTA 논쟁이 불 붙은 술자리로 차씨가 다가왔다.

“반대할 사람은 반대하고, 찬성할 사람은 찬성하는 거지만, 외국산들 다 들어오면 한우도 못 먹고 홍어도 못 먹니데이.” 어눌한 안동 사투리로 차씨가 일침을 놓자 “그건 그렇니더”라며 좌중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감시속에서 안동으로 오기까지

 

차명숙 씨가 안동에 둥지를 튼 지는 15년이 넘었지만 아는 이가 드물다.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을 함께했던 지인들조차 15년이 넘게 모르고 살았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 5·18 청문회와 민주화운동보상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차명숙 씨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두들 그녀가 살아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교도소 출소후 광주에서 다시 뿌리를 내려보려 몇 차례 광주로 내려왔지만 그녀는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받았다.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기위해 검정리본을 달았다가 시국사범으로 몰려 또 다시 공안당국의 조사를 받고 겨우 풀려난 적도 있다.

 

광주항쟁 거리 방송 차명숙 씨.


“양로원이나 고아원에서 사람들 돌보며 살아봤지만 광주 어디를 가도 감시를 받아야 했어요. 광주에선 내가 더 이상 머물 곳이 없구나, 두 번 다시 오고 싶지 않았어요.” 그녀는 눈시울을 붉혔다.

서울로 올라온 그녀는 장애인시설과 고아원 등을 전전했다. 무심결에 광주이야기를 풀어낼라치면 주변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고 신고가 들어갔다. ‘또 무슨 일 벌이는 것 아니냐’며 노량진 정보과 형사의 추궁을 받기도 했다. “내 상처를 치유하지 않고는 누구도 돌볼 수가 없겠구나”생각하며 신앙생활에 매진했다고 한다. 명동성당을 오가며 마음의 상처를 돌보던 중 남편을 만났고, 그의 고향인 안동으로 온 것이다.

 

“이젠 행복 전하고 싶어”

 

안동에서의 생활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10년 전 남편과 함께 운영해오던 돼지 축사가 전기누전으로 몽땅 불에 타 실의에 빠졌던 적도 있었다. 그녀를 끔찍히 위하는 남편은 “몸 상하지 않고 애들이 건강한데 무슨 걱정이겠냐”며 오히려 위로했다고 한다.

안동에 와서도 성당을 오가며 틈틈이 봉사활동을 했던 차명숙 씨는 송현성당 사목회장과 함세웅 신부, 주변의 도움으로 5년 전 ‘행복한 집’을 열었다. 가게 간판은 광주와 안동에 있는 신자들과 지인들을 대상으로 한 공모를 통해 정했다. “행복이란 말이 마음에 와닿았어요. 화재 뒤라 참 힘들었던 시기였지요. 스스로 행복해지고 싶었나봐요. 5·18을 겪은 사람들 모두 지금까지 너무나 힘들었잖아요. 이제 모두가 행복해질 때에요.”라며 속내를 털어 놓았다.

‘행복한 집’을 꾸려가면서도 차 씨는 오래전부터 소외된 이들과 더불어 사는 일에 대한 바람을 실천하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성당 사람들과 작은 소모임을 만들어 송현동 사회복지관을 드나들며 독거노인들에게 반찬 만들어주기와 소년소녀가장들에게 도시락을 싸주는 일을 해왔다. 요즘은 가게로 어려운 이들을 돕고 싶다는 뜻을 전해오는 이들도 종종 있어 더욱 보람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농간에 놀아나지 맙시다”

 

“광주도 그렇지만, 안동도 반인생을 살아온 곳이잖아요. 어느 지역을 가든 내가 그 속에 들어가서 당당해져야 해요” 라며 은근슬쩍 안동살이의 어려움을 내비췄다.

“안동 사람들은 FTA를 하든, 뭐를 하든 그냥 묻혀가려 하고 물건너온 나라의 이야기로 생각해요. 임금이 피신을 올 정도로 조용한 곳이라 그런지. 안동이 고향이라도 외지로 나갔다 다시 들어온 사람들은 고향친구들과 대화가 안된다며 답답해 하더라구요.”라며 안타까워했다. 젊은 층에서는 이젠 사라졌지만 아직도 40대 이상에서는 ‘전라도’라 하면 괜시리 꼬투리를 잡기도 한다고 했다. 그럴 때면 “그 사람들 농간에 놀아나지 맙시다. 우리가 놀림꾼이 된다면 얼마나 슬프겠냐”면서 하소연한다.

최근 경남 합천에 전두환을 기념하는 일해공원이 세워지는 것과 관련해서는 더욱 마음이 착잡해진다. “과거청산을 위해 정부가 나서고 있지만 일제시대를 거쳐 독재정권으로 이어지는 세뇌교육에 국민들이 이용당하는 게 몸서리쳐진다”면서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말도 연습이 필요한 것처럼 잘잘못을 따지는 합리적인 시민의식이 습관화되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진압군과의 만남과 용서

 

기자와 만나기 몇 시간 전,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 12·12, 5·17, 5·18 조사팀이 차씨를 만나고 갔다고 했다.

“수사관들이 5·18피해자들은 왜 명령을 수행했던 당시 진압군들에 대한 고소는 하지않았냐고 의아해 했다”면서 “과거 청산과정에서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처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달라는 것”이라면서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녀는 “그들도 어쩔 수 없이 광주에 끌려왔던 피해자이고 그들의 솔직한 이야기가 역사에 남을 수 있어야 한다”며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몇 년전 그녀는 우연찮게 5·18 당시 진압군과 맞대면한 적이 있었다. 평화와통일을 여는안동시민의 모임에서 활동하는 강석주(46) 씨를 통해서다. 강씨는 “그 진압군은 춘천에서 열린 조선일보반대 마라톤대회에 참가한 노사모 회원이었다. 당시 아이디를 썼기 때문에 실명은 모르겠다. 구미에 살고 있었는데, 서울로 이사를 갔다”고 전했다. 마라톤이 끝나고 뒷풀이에서 그의 과거지사를 알게 된 것이다. 강씨는 “5·18때 시민군쪽에서 가두방송을 했던 사람이 안동에 살고 있다”면서 “만나보겠냐”고 제안을 했고 결국 그가 찾아왔다.

“무릎을 꿇고 울더라구요. 용서해달라고요. 대학 2학년 다니다가 군입대후 투입됐다고 했죠. 그는 삽살개를 여러 마리 키운다고 했어요. 삽살개가 귀신을 물고 늘어진다고 해서, 당시에 죽은 혼령들이 다가오는 것 같아서라며….” 차씨는 당황스러웠던 당시의 입장을 전했다. ‘나는 용서 다 했다. 당신도 명령에 따라 한 것인데, 서로 피해자 아닌가’라고 그를 위로할 수 밖에 없었단다. 차씨는 그에게 “가끔 오라고, 얘기 들어주겠다고 했지만 그 뒤로 만난 적은 없다”고 했다.

광주정신 전파 몫 남아

 

“광주에서 부딪치며 사는 사람들은 빨리 희석이 되는데, 여기서 아무하고도 이야기 할 수 없는 혼자만의 싸움이기에 희석이 빨리 안된거 같아요. 버리는 것도 힘들고, 받아들이는 것도 힘들죠.”라며 말하는 그녀의 얼굴엔 어느덧 세월이 묻어있다.

하지만 뚜렷한 발음과 고음의 음색은 그대로다. 특히 사회현안이나 5·18정신을 이야기할 때의 그의 표정은 더욱 강단있어 보인다. “전국에서 광주에 대해 관심을 가졌듯이 이제는 광주가 다른 지역에 광주정신을 되돌려줘야 해요.”

얼마후면 5·18이다. 차씨는 올해도 가게문 앞에 “저 광주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안내문을 단골손님들에게 전하고 망월동으로 향할 것이다.

 

차명숙(47) 씨는= 5·18당시 거리방송을 통해 항쟁의 불씨를 일으킨 주역 중 한 사람인 차명숙씨. 전남 당양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광주항쟁 당시 그녀의 나이 열아홉, 광주에 있던 이종사촌 오빠의 사진관 일을 도우며 양재학원에 다녔던 평범한 여성이었다. 성당을 다니면서 어렴풋이 군부의 그늘아래 있는 사회상을 깨달았다고 한다.

5월 19일 차씨는 자신이 다니던 국제양제학원에 갔으나 문이 잠겨 있어 시내로 나갔다가 시위에 가담하게 된다. 19일 도청 앞 공수부대원들과 시위대가 대치하는 상황에서 전옥주(58) 씨와 몇몇 남학생들과 시민군들에게 물을 떠다 주었다. 계엄군의 잔혹한 진압이 시작되면서 광주시민들에게 이런 상황을 알려야 겠다고 마음 먹고, 그들은 마이크를 잡았다. “계림전파사를 가서 ‘아저씨 앰프 좀 빌려달라’고, 방송을 안 하면 지금 광주 시민이 다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 지금 빌려주시면 내일 이 시간쯤에 갖다 드리겠다고.” (「5·18 항쟁 증언자료집」전남대 5.18연구소, ‘차명숙의 이야기’에서)

차씨는 22일 거리방송을 하다가 도청 앞에서 시민들에게 간첩으로 몰려 체포됐다.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조사를 받았다. ‘간첩 20만명을 동원해 2백명을 사살하게 한 장본인’으로 몰려 9월 19일 계엄포고령 위반과 내란음모 등의 죄목으로 15년형을 선고받고 10월 27일 광주교도소에 수감됐다. 2년여의 옥고를 치른 뒤 81년 12월 성탄절 특사로 풀려났다.

이향미 기자

 

제1호 8면 2007년 4월 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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