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출근 길, 젊은 남성 몇 명이 전철역에서 홍보물을 나눠주어 받아보았다. 언뜻 보니 “이랜드 직원들이 국민 여러분께 호소 드립니다”라고 적혀있었다. ‘해고로 고통당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몇 줄 읽어보니 “비정규직 대량 해고는 해고가 아니라 계약기간이 종료된 것입니다”, “경영 여건상 필요에 의해 적법하게 아웃소싱한 것입니다” 운운하며 회사의 논리를 대변하는 내용이었다. 내리는 전철역에서도 똑같은 홍보물을 나누어주는 사람들이 있어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니 말쑥하게 잘 차려입은, 젊은 남성들이었다.
길에서 만난 이랜드 직원들
이랜드는 비정규직 관련 법안이 시행되기 바로 전날 뉴코아에서 300여명, 홈에버에서 500여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를 길거리로 쫓아냈다. 이에 맞서 대부분이 기혼여성으로 구성된 노동자들은 뉴코아 매장에 대한 점거농성을 강행했고 2차례나 경찰의 공권력이 투입되는 등 극한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이랜드 사태는 “1천명 비정규직 집단해고와 외주화라는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비정규직 잔혹사”라는 민주노총의 평가처럼 이번 사태가 지난 7월 1일 300인 이상 사업장을 적용대상으로 시행된 비정규직 법안(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의 결과이며, 따라서 내년 7월 1일부터 100인 이상 사업장, 2009년 7월 1일부터는 모든 사업장에 적용되는 비정규직 법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판단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번 사태는 860만으로 추정되는 우리사회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중요한 순간에 지난 5년여간 비정규직 관련 법안을 주도하고, 민주노동당의 점거농성 등 물리적 저지에도 불구하고 “노동시장의 양극화 해소와 사회통합을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낙관하던 노동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정부는 뒤늦게 비정규직 법안을 보완한다고 하지만 법안의 보완보다 이랜드 사태의 슬기로운 해결이 우선이다. 현재 노사 간의 대화조차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점거농성과 강제해산이라는 갈등과 악순환이 반복되는데 노동부는 어디에 있는가?
노동부는 어디 있나
또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이랜드 정규직 노동자들의 태도이다. 그런데 며칠 전 지하철 역 앞에서 국민 홍보전을 하던 본사 직원들은 지난 30일에는 점거 농성이 벌어지고 있는 이랜드 매장 앞에 1천여명이 몰려가 노조 측과 아슬아슬한 대치상황을 야기했다.
필자가 보기에 이 문제는 이랜드 사태 자체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이랜드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직접 당사자인 경영자와 해당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만큼이나 정부의 역할,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 여론의 동향과 시민적 판단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지하철 역 앞에서 이랜드 직원들이 돌리던 홍보문구처럼 “이번 사태가 한 기업의 노사갈등 문제를 넘어서 비정규직법을 반대하는 세력들의 정치 투쟁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편협된 시각을 가지고는 이 문제를 제대로 풀 수 없다. 아무리 애사심이 앞선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해고이든, 계약기간의 종료이든 수백 명이 길거리로 내쫓긴 상황을 먼저 슬기롭게 해결해야 한다. 한쪽은 피해자인데도 불구하고 힘에는 힘으로라는 본사 직원들의 태도는 문제해결은커녕 갈등을 부추기는 일이다.
안타까운 것은 언제부터인가 이런 식의 갈등이 우리사회에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가 일하고 있는 부천지역에서도 화장장 건립을 둘러싼 극한 갈등으로 내홍을 겪고 있다. 화장장 건립 대상지역 주민들이 강경한 반대 캠페인을 벌이고, 이에 대해 부천시가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가며 화장장 건립을 계획대로 추진하여 갈등이 격화되고 있다. 그런데 올해 초부터 갑자기 ‘추모공원은 가족테마공원’이라는 관변단체들의 현수막이 조직적으로 내걸리는가 하면 얼마 전 화장장 관련 예산이 다루어지는 시의회에는 찬성하는 시민들과 반대하는 시민들이 뒤얽혀 극한대립의 아슬아슬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 사실 어떤 정책에 대해 찬반이 나누어지고, 특히 피해 당사자가 있을 경우 정책집행자와 피해 당사자 간의 갈등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에 의해서 이런 갈등이 민민 갈등으로 조장되고 힘의 대립이 격화된다면 그것은 어떠한 소득도 없이 공동체의 파괴라는 손실과 상처만을 남기게 된다.
사회약자 뒤로 한 사회 희망없다
다양한 이해관계와 입장차이, 다양한 가치를 가진 사회 속에서 갈등은 불가피한 것이다. 때로 갈등을 적절하게 드러내고, 건강하게 해결하는 것은 사회를 한 단계 발전시키는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랜드 사태와 같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 부천지역과 같은 민민 갈등은 정말 불필요한 갈등이고, 사회를 파괴하는 갈등이다. 생각과 가치가 달라도 최소한 피해자의 아픔을 함께 하는 측은지심은 상실하지 말아야 인간다운 삶이 아닐까.
제14호 18면 2007년 8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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