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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문화

"식민지 근대화론은 허상"

참여사회연구소 기획강좌 [2] _ 허수열 충남대 교수

허수열 충남대 교수

“보이는 것만 믿으세요.” 한 증권회사의 광고 문구였다. 역사학계에서도 지난해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다. 낙성대경제연구소는 ‘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5’를 펴내면서 일제의 식민통치 시절 경제통계를 근거로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했다. 한국 사학계에 지배적인 식민지 ‘수탈론’을 부정하며 통계로 분명히 한국의 성장이 보이는데 왜 부인하느냐고 비판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라며 낙성대경제연구소의 주장에 대해 역시 통계를 근거로 반박한 이가 있었다. 허수열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다. 지난 4일 열린 참여사회연구소의 대한민국사 기획강좌 두 번째 강연자로 나선 허 교수는 ‘식민지경제는 대한민국을 근대화 시켰는가’란 주제로 강의를 진행했다.

통계 허구를 봐야

허 교수는 먼저 “언론에서 자극적인 대결구도로 몰아세워서 그렇지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사이신 안병직 교수님과는 사이좋은 사제지간”이고 “다만 학문적으로 다른 주장을 펴고 있을 뿐”이라며 가볍게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허 교수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주장하는 통계분석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의미를 보여주기 보단 한 단면만을 잘라 자의적으로 편하게 해석했다”며 한계를 지적하고 논쟁의 초점을 명확히 했다.  

허 교수에 따르면 식민지 근대화론은 일제의 조선 지배는 당연히 부당하지만 조선 왕조는 제국주의를 이겨낼 만한 힘이 없어서 스스로 몰락한 것이고 식민통치 시절에 본격적으로 근대화가 이루어지면서 조선인 삶의 질 향상 및 해방 후 한국사회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허 교수는 “‘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5’ 통계는 1911년부터 1940년까지만 나와 있다”며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이 마무리된 1918년까지의 자료들은 지나치게 과소평가 돼 신빙성이 없고 1940년 이후는 식민지경제의 붕괴기에 해당하는 중요한 시기인데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조선총독부의 경지면적 통계를 보면 1911년부터 1918년까지 빠르게 증가하는데, 이는 종전에 파악되지 않았던 땅들이 확인되고 기록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며 허 교수는 식민지 근대화론에는 통계적 허상이 포함돼 있다고 비판했다.

낙성대경제연구소는 인구와 1인당 생산의 지속적 성장을 근대적 경제성장의 기준으로 보는 쿠즈네츠(S. Kuznets)의 설명을 빌려 당시 한국사회의 근대적 경제성장을 주장한다. 이 때 ‘지속적’이란 적어도 30~40년 이상을 의미한다. 허 교수도 쿠즈네츠의 개념을 사용해 식민지 근대화론의 반론을 제기했다. 당시 인구통계자료는 조선총독부의 통계연보와 국세조사 뿐이다. 1910년부터 기록된 조선총독부의 통계연보는 매년 시행했지만 행정상의 통계라 오류범위가 상당히 크고 5년 간격으로 시행된 국세조사의 경우는 1925년에 처음 시행됐기 때문에 그 이전의 통계는 매우 부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낙성대경제연구소의 경우에도 1925년 이전 인구추계를 일주일 단위로 정정하며 각기 다른 세 가지 조사결과를 내놓았다. 이 결과들에 의하면 당시 인구 증가율은 59.3%일 수도 있고 33.4%일 수도 있다.

"오류 만만치 않다“

허 교수는 “1인당 GDP와 같이 ‘1인당’ 통계 자료는 인구수로 나누는데 인구수가 부정확하면 통계도 당연히 부정확할 수밖에 없다”며 “차명수 영남대 교수의 글에 따르면 조선의 인구는 일제시대 이전부터 이미 증가가 시작됐고 인구증가현상은 20세기의 세계적 현상일 뿐 일본의 식민통치 하에서 조선의 인구가 특별히 증가한 것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삶의 질을 보여주는 통계인 GDP의 경우도 낙성대경제연구소의 주장에 허 교수는 반론을 제시했다. “GDP는 지역이 기준이고 GNP는 국민이 기준인데 당시 조선에는 3%의 일본인이 중요한 생산수단을 장악하며 막강한 경제력을 구축하고 있었다”며 “국내총생산을 그저 사람 수로 나눴다면 일본인들이 평균을 높인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낙성대경제연구소 측의 GDP 추계를 보면 1930년대는 세계대공황 기간인데 어떻게 한국만 세계대공황의 영향을 안 받고 GDP가 증가추세를 보이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당시 일본인소유 경지면적을 따져보면 조선은 논보다 밭이 더 많은데 일본인들은 수익성이 높은 논을 더 많이 소유하고 있었다. 1935년에는 전체 논의 18%를 일본인이 소유했다. 허 교수는 “1930년대는 세계대공황기간으로 조선인들이 토지를 싼 값에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며 “일제시대는 자본주의 사회로 거래를 통해 토지가 일본인에게 이전됐던 것이지 반드시 폭력에 의한 토지수탈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당시 증가했던 일본으로의 쌀 수출도 마찬가지로 일본인 지주들이 품종을 개발해 일본으로 수출한 것으로 이 또한 조선총독부가 폭력적으로 거둬들였다고 주장하기엔 오류가 있다고 지적했다.

참여사회연구소

참여사회연구소가 기획한 '대한민국사 5가지 쟁점' 강좌 두 번째 시간에 참석자들이 허수열 교수의 강의를 경청하고 있다.



사실 ‘인정’과 ‘통찰’은 달라

허 교수는 “조선사람들이 싼 값에 땅을 일본인에게 팔 수 밖에 없었던 사회구조를 지적해야지 설명의 단순화를 위해 폭력과 수탈을 얘기해선 논리적 한계가 발생해 오히려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에게 역공을 당할 수 있다”며 “인정할 것은 인정하되 그 원인에 대한 철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분명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으면서 일정 부분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광공업 자산의 경우에도 일본인이 95%나 차지하고 있었고 기술과 교육 모두에서 조선인이 배제되는 사회 구조상 오늘날 한국의 경제발전을 일본의 조선지배와 연결시키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는 말로 마무리를 지으며 허 교수는 강연을 마쳤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세 번째 대한민국사 기획강좌 주제는 ‘박정희 시대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로 강연자는 이병천 강원대 교수다.

전상희 기자

 

제7호 10면 2007년 6월 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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