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6월 민주항쟁 20년, 크고 작은 평가모임이 활발하다. 평가의 대체적 결론은 ‘위기’와 ‘전환’이다. 하지만, 오늘 글쓴이가 생각해보려는 것은 평가의 내용이 아니라 평가의 언어에 대한 것이다. 전선과 진영의 실루엣
장안에 논란과 화제를 일으켰던 전쟁영화 ‘300’은 직접 보지 못하고 TV 코미디 프로에서 패러디한 모습만 봤는데, 최근 비디오로 ‘알렉산더’라는 영화를 봤다.(영화를 보며 소설 ‘칼의 노래’가 떠올랐었지만 각설하고.)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전투 장면을 볼 때마다 생각나는 게 있다. ‘전선’과 ‘진영’의 실루엣이 그것이다.
넓은 평원에서 양 진영의 군대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길게 늘어선 채 마주 선다. 전선(戰線)이다. 상공에서 잡은 그림은 더욱 적나라하다. 횡으로 정렬한 두 개의 전투대오가 서로 다른 색깔의 복장으로 상대방의 방어선을 무너뜨리기 위해 정말 사력을 다한다. ‘一’자로 곧게 늘어선 전선에 굴곡이 생기고 마침내 한쪽이 붕괴되면서 지리멸렬, 이로써 전투는 끝이다.
진단·전망, 옛것 그대로 이런 방식의 전선도(戰線圖)는 근대 유럽 나폴레옹의 전투에서도 미국 남북 전쟁의 전투에서도 그대도 반복된다. 적어도 영화에서는 그렇다. 2차원이다. 면(面)의 전투. 그런데 비행기가 나타나면서 양상은 결정적으로 달라진다. 면에 더해 공간이 생긴 것이다. 3차원의 지형도(地形圖)가 만들어진다. 이때부터는 대포도 사거리가 멀어지고 탱크라는 물건이 나와 높은 산과 강을 가리지 않게 되었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 지 짐작이 될 것이다. 80년대 사회운동은 2차원으로도 충분했던 것 같다. 그것이 계급전선이든 민족전선이든 핵심은 전선, 그마저도 단일 전선이었다. 이른바 ‘통일전선전략’이다.
그런데 전선론과 진영론이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다. 운동진영, 시민사회진영, 심지어 초록진영(?) 등등이 운위되고 기존 정치권과의 연대가 거론된다. “민중 혹은 진보 대 신자유주의와의 단일전선인가, 수구와 신자유주의와의 이중전선인가.” 전선론은 2007년에도 진보논쟁의 핵심 주제 중 하나이다. 요컨대 ‘포스트 민주화’와 ‘담론과 운동의 위기’를 말하면서도 이를 진단하고 전망하는 언어는 옛날 그대로라는 것이다. ‘전환’을 말하는 경우에도, 민주주의, 평등, 대중적 토대, 주체역량, 전선 등등 담론의 언어와 구조는 87년체제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세계관과 철학이 그대로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20년전의 철학을 견지하고 있다고 해서 원칙적으로 문제가 될 것은 없다.
그러나 전환과 새로운 대안을 말하면서 진단과 처방이 20년전의 시각과 방법론이라면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 디지털 문화, 한국 경제의 양적 성장, 세계화 등 변화된 현실과의 괴리는 또 어떻게 메울 것인가. 혹시 시민사회운동의 주류는 여전히 87년에 머물러 있거나 갇혀 있는 건 아닐까.
4차원적 변화에 주목하라
87년체제에 대한 평가가 민주주의와 노동, 분배정의, 시민운동 등 전통적인 사회운동의 논리로만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시각의 한계 아닐까. 혹 환경, 평화, 젠더, 탈국가를 이야기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이슈와 소재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그것들을 관통하는 흐름에 대한 검토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새로운 운동과 의제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닌데 말이다.
지난 20년 시민사회운동이 절정의 시기에 있을 때, 다른 한편에선 국가와 시장의 논리의 넘어서려는 생활협동조합과 대안교육과 생태공동체와 영성운동의 싹이 자라고 있었다. 이러한 차원변화의 사상과 실천이 잘 보였으면 좋겠다.
사족. 초록(혹은 생명)은 2차원의 전선도와 3차원의 지형도를 뛰어넘어 융합과 비약의 4차원적 조망을 꿈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