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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문화

고구려 천하 경영관은 소통과 개방

한국방정환재단 어린이·청소년 고구려 문화유적답사[5]

 

백두산 천지


나라의 동쪽에 있는 커다란 동굴이라는 뜻에서 ‘국동대혈’이라는 이름을 지닌 고구려 제천의식의 무대를 찾아갔다. 호태왕릉비와 장군총을 옆으로 비켜 한적한 도로를 따라 차량으로 약 30분 정도의 거리를 달렸다. 개울을 끼고 산비탈을 오르니 8부 능선쯤의 위치에 앞뒤로 뻥 뚫린 자연 동굴이 나타났다. 국동대혈이다. 압록강과의 거리는 불과 400여m 정도 떨어진 곳이란다.

앞서서 우리를 안내했던 현지 안내인이 향을 꺼내어 사른다. 동굴의 내부는 넉넉했다. 장정 100명이 들어차고도 남을 만큼의 공간이다. 이미 다녀 간 이들이 향을 피우고 저마다의 기원을 소망했던 듯하다. 향을 피우고 기원을 소망한다는 것, 의식이다. 하늘에 이르는 의식이다. 일찍이 고구려의 제왕과 더불어 그 백성들이 의식을 행했다는 이 곳. 우리 일행도 두 손을 모으고 오래된 기억을 쫓아 옛 사람의 그림자를 밟아 본다.

옛사람들의 제천의식

부여의 영고제와 더불어 고구려의 제천의식으로는 대표적인 행사가 동맹이다. 제천의식은 말 그대로 하늘에 제를 올리는 의식이다. 이는 하늘의 자손 즉 천손 사상과 그 자존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그 행사 모습이 당시의 중국과는 사뭇 달랐던 모양이다.

중국 진나라의 진수가 쓴 삼국지의 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동이(東夷) 사람들은 농사절기에 맞추어 하늘에 제사하고 밤낮으로 음주가무를 즐겼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를테면 중국의 제천의식이 엄격한 예를 따르는 장중한 분위기라면 고구려의 동맹 제는 음주가무로 표현한 난장에 가까운 백성들의 축제가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축제는 한 사회와 그 시대의 문화가 종합적으로 나타나는 의식이다. 하여 고구려의 동맹을 통해 그 시대와 사회를 엿볼 수 있으리라 생각해 본다.

고구려는 분명 천손의식이 강한 자존의 국가였다. 천제 해모수의 아들 동명성왕의 나라가 고구려였다. 그런 그들의 제천의식은 단순한 하늘에 올리는 제사의식만이 아니었다. 나라와 백성 모두의 축제로 이어진 것이다. 어쩌면 여기에 고구려의 정신, 고구려의 정체성이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즉 선택된 천손이 자신의 하늘과 통하고 그 위엄으로 백성을 통치하는 중국이나 주변국가의 질서와 달리 고구려는 하늘과 소통하고 다시 나라의 구성원인 백성과의 소통을 동맹축제를 통해 이루어 낸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춤과 노래를 매우 즐겼던 고구려의 백성들. 그들은 매우 엄한 법질서를 갖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수시로 전쟁도 치러야 했다. 그런 그들이 밤 세워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출 수 있는 동맹과 같은 축제는 신분의 높고 낮음, 빈부의 차이를 떠나 서로 어울려 하나를 이루게 하는 의식이 된 셈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 의식을 통해 하늘과 신의 기운을 받아 함께 나누어 일체감을 이르게 하는 문화적 총체가 동맹제로 집약된 것이다.

사실 고구려는 다양한 민족, 다양한 문화가 혼재했던 나라다. 그런 만큼 절대적 통합력이 없이는 강력한 국력을 갖추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고구려 당시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국력을 자랑했던 시절이지 않던가? 그렇다면 그 힘의 원천이 어디엔가 있을 터인데, 다민족 사회를 하나로 통합한 힘은 결국 동맹축제와 같은 소통의 문화 즉 개방과 포용으로 어울림이 가능했던 사회 질서에서 찾아봄이 어떨까.

국동대혈


그랬다. 고구려의 사회가 지닌 소통과 개방, 포용의 어울림은 ‘평강공주와 바보온달이야기’에서 극적으로 확인시켜 준다. 신라사회가 골품제도로 계급과 혈통의 빗장을 걸어 닫은 모습과 달리 고구려는 혈통의 벽을 뛰어넘어 세계의 중심무대를 호쾌하게 경영했던 역사를 보여준다.

배려의 문화가 만드는 힘

소통의 문화와 사회적 개방과 포용력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양한 구성원이 모여 서로 유사한 점을 들어 일체감을 찾아가는 길과, 서로 차이진 점을 찾아 갈라서는 길은 예나 지금이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사람 사는 모습이다. 그런데 양 집단 또는 두 세력 간의 힘의 크기는 앞에서 예를 삼은 질서의 어느 편을 취하느냐에 따라 확연히 달라진다.

소위 중화주의라고 하는 예를 들어보자. 한족과 다른 민족이 결혼하여 자식을 낳으면 중화주의자들은 이 가족을 중화의 구성원으로 취급한다. 그런데 우리는 순혈주의에 치중하여 자칫 뭔가 다른 점을 들어 배척하고 갈라서기 위해 꼬투리를 찾기에 혈안을 보이지는 않았던가.

지금 드러나고 있는 중화주의는 소수민족을 통째로 삼키고 주변국가의 역사와 문화까지 먹어 치우는 불가사리의 모습이다. 이는 우리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고조선과 고구려, 그리고 발해의 역사까지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는가 하면 심지어는 대동강 이북의 영토에 대한 고토 개념을 드러내기까지 한다. 한편 우리나라의 사정으로 돌아가면 체류외국인이 무려 100만 명을 넘어서는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2010년이면 초등학교 신입생의 10%정도를 다문화 가정의 자녀가 차지 할 것이라고 한다. 결국 고구려의 문화에서 고구려의 정신을 찾아 배울 일이다.

고구려의 역사가 우리민족의 역사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역사는 문화를 통해 계승 발전하며 문화는 다시 옷과 집과 음식 그리고 의식에 녹아 흐른다. 의복이야 시대에 따라 유행이 바뀔 수도 있겠으나 음식과 주거 형태의 경우는 오래도록 제 전통을 유지해 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찍이 주몽이 홀승골성에 터를 잡고 나라를 세울 무렵 강물에 떠내려 오는 푸성귀를 발견하고서 강 상류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짐작으로 ‘송양의 비류국’을 복속시켰다는 이야기에서 우리민족의 대표 음식인 김치가 연상되기도 하거니와 콩의 원산지인 만주의 옛 기억을 전해주듯이 된장, 간장을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네 식탁 차림이 역사이고 문화일 것이다. 입에 맞지 않은 음식에 시달리던 우리 어린 일행들이 현지의 조선족 식당이나 북한 음식점에서 만세를 부르던 그 입맛이 또한 문화이다.

오늘에 이어온 조상의 얼

뿐만 아니라 중국일대의 고구려 유적마다 나타나는 온돌 흔적의 주거지는 또 어떠한가. 중국은 결코 온돌 문화를 향유하는 나라가 아니다. 또 고구려의 축성술은 어떠했던가. 지금 중국은 고구려의 문화유적을 자신들의 것이라고 우기고 또 자신들의 방식으로 재조립하기까지 한다. 현재의 소유권자가 중국이니 어쩔 도리가 없어 안타깝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고구려의 질서와 고구려의 정신, 고구려의 의식에 주목해야 한다.

밤 세워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던 고구려의 사람들. 왕과 하늘이 소통하고 왕과 백성이, 민족과 민족이 어우러져 축제와 놀이를 즐겼던 그들. 강가에 나와 편을 나누어 서로 돌을 던지며 싸우는 돌싸움을 하기도 했고 바둑이며 장기 혹은 축구와 유사한 축국이라 불리는 공차기 놀이를 했던 고구려 사람들. 그들은 윷놀이와 투호 놀이도 즐겼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씨름과 수박이라는 무예도 겨루었으며 서역에서 전해온 서커스를 관람하거나 왕산악의 거문고를 비롯한 완함, 피리 등을 연주하기도 하였다. 오늘날의 대동 굿을 연상시켜준다고나 할까?

또 활쏘기는 어떠한가. 사냥으로 활쏘기에 능수능란했던 고구려의 후예답게 세계 양궁은 우리나라가 기록의 역사를 좌우하고 있지 않은가. 단순한 시대에 참으로 다양한 문화를 향유한 셈이다.

이렇듯 삶과 놀이가 하나로 이어지고 그 문화를 관통하는 정신이 고구려의 질서일진데 오늘 우리가 다시 찾아야 할 세계의 중심에선 고구려의 천하 경영관은 한마디로 소통과 개방, 배려와 어울림의 정신일 것이다.

도문강변을 찾은 학생들


옛 사람들의 모습하고는 달랐겠지만 옛 사람의 마음으로 기원의 손을 모았다. 우리의 어린 일행들에게는 다음 행선지인 백두산 가는 길에 천지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빌 것을 청했으나 소리 내는 이가 없으니 속내를 알 길이 없었다. 앞뒤로 툭 터진 동굴에서 바라보는 두 하늘이 묘한 대조를 보인다.

그리고 백두산에 가다

백두산 가는 길은 기차에서 밤을 지새웠다. 우리에게는 자못 생소한 침대칸이 있는 열차였다. 밤새 비가 내려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도백하에서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백두산 북쪽 비탈로 향하는 유리창에도 빗줄기가 따라왔다.

북쪽의 비탈이란 뜻으로 북파라는 불리는 곳에서 줄을 서서 지프차에 오르기를 기다렸다. 수만의 인파에 밀리고 밀려 한참을 지나서야 차에 오를 수 있었다. 굽이 길을 달려 오르는 길섶에는 온통 이름 모를 야생화 천지였다. 나무 한그루 쉬 자라지 못하는 바람찬 이 척박한 땅에 어쩌자고 그리도 고운 꽃잎들이 무리지어 피어있던지. 차는 구름을 지나 달렸다. 꽃이며 계곡이며 나타났다 사라지는 구름사이로 넋을 잃고 있는 사이에 차는 천문봉 아래 기상 관측소 부근에 당도 했다. 우리 일행은 뒤차로 오는 나머지 일행을 기다리기 위해 야생화 꽃밭을 서성일 수 있었다. 화산 땅 그 척박함을 그대로 간직한 들녘에 노랗고 분홍빛 온갖 꽃물결이 바람에 흔들린다. 다행히 비도 멎었다. 구름이 벗겨지고 있어 어쩌면 천지가 열릴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구름이 바쁘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사이 뒷 차의 일행이 합류했다.

백두산에 올랐다. 천지가 열렸다. 어쩌면 이것이 천지개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밤새도록 빗속을 달려와서 비옷을 챙겨 오른 백두산 정상에서 천지를 볼 수 있다니 꿈만 같을 뿐이다. 국동대혈에서 두 손 모은 우리의 마음을 천지신명이 알아주기라도 한 듯하다. 천지의 물빛은 흐린 하늘로 인해 더욱 파랗다. 하늘이 맑았다면 하얗게 빛났을 물빛이나 푸른빛이 너무 선명하여 오히려 환상적이다. 구름에 잠긴 건너편 봉우리 쪽이 북녘 땅이다.  

백두산 천지 앞에서 우리 일행은 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눈에 담기에 바쁘고 마음에 그려 넣기에 바빴기 때문이었으리라. 또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수천 명의 인파가 어깨를 스치며 환호하였다. 우리가 오르기 전까지 내리 사흘 동안 천지가 열리지 않았다고 한다. 뒤에 들은 얘기지만 우리가 내려온 이후 다시 천지는 모습을 감췄다고 하니 어쩌면 우리는 대단한 행운아였던 셈이다.

내려오는 길에 장백폭포에 들렸다. 일행 중 여학생들이 천개가 넘는다는 계단 길에 겁을 낸다. 그럴 만도 하다. 오녀산성을 오르는 길에 999개단의 위력을 실감하였을 터이니…. 그러나 장백폭포 가는 길은 생각보다 많이 가파르지 않았다. 오르내리는 길이 오히려 걷는 재미를 더했다. 장백폭포는 그야말로 하늘에서 쏟아지는 물줄기였다. 주변이 스산하고 찬 기운이 감돌았다. 하늘은 가뜩이나 흐려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떨어질 기세였다.

 

천지에서 흘러내린 물이 송화강으로 향한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역사의 땅 백두산 천지와 장백폭포의 위용에 다시 한 번 대륙의 고구려 천하와 민족의 시원 고조선을 떠올려본다. 그러나 지금은 남의 땅. 이곳을 찾는 숫한 중국인 인파와 그들의 감흥은 우리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다만 천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파는 중국인들이 방문자들에게 기념사진을 찍어주기 위해 소품으로 들고 있던 한복에 위안을 얻는다. 또한 한복을 갈아입고 기념사진을 찍으며 환하게 웃던 중국인 여인들의 모습에서 옛 기억을 새겨볼 수 있었다.

 

그랬다. 아직도 그 땅에는 그래도 아직 한복이 자리를 지키고 남아있었다. 비가 내려 우리 일행은 서둘러 폭포 길을 내려왔다. 유황냄새 가득한 노천 온천 길을 지나며 온천에서 삶았다는 비에 젖은 달걀을 먹어보았으나 날씨 탓인지 별 맛을 못 느꼈다.

용정을 가야했고 도문 강을 돌아야 했기에 우리 일행은 발길은 아직도 한참이나 남아있었다. <끝>


오명록 한국방정환재단 사무총장

 

제23호 8면 2007년 10월 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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