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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人/내 인생의 첫수업

혼의 가르침

내 인생의 첫 수업[18]

 

고등학교 시절의 은사 한 분을 추모하는 모임이 있다. 석은(石隱) 김용근선생을 따르는 제자들의 모임이다. 선생은 1917년 생으로 평양숭실학교 재학 중 치안유지법 위반 징역 10월, 연희전문시절 총독암살단 구성혐의로 징역 3년의 옥고를 겪었다.

연세대 시절 농구선수로 활약한 이래 여러 학교에서 <혼(魂)이 담긴 농구>부를 키우고 <혼(魂)이 담긴 역사>를 가르쳤다. 회갑을 넘긴 뒤 강진군 작천면으로 귀향하여 자갈밭을 일궈 논을 떠 농사를 지으며 지역운동을 펼쳤고 광주민중항쟁 수괴로 수배된 제자들 숨겨준 죄로 또 징역을 살았다.

전주고, 광주고, 광주일고, 전남고에서 김용근선생님의 <혼(魂)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짧게는 30년, 길게는 5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생을 가슴에 품고 생활하다가 매년 5월 마춤한 날을 잡아 한 자리에 모인다. 유족을 포함하여 삼사십명이 모여서 1부 “김용근 민족교육상” 시상식을 갖는다.

평생을 바른 교육에 헌신한 분(특히 평교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이나 단체를 찾아 상을 드린 지가 벌써 열 번이 넘었다. 2부에서는 음식을 먹으면서 선후배 간 정을 나눈다. 우람한 덩치에 우락부락 검붉은 얼굴과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열변을 토하시던 선생의 흉내를 내며 배꼽을 잡고 웃다가 앞으로 다가오는 세상이 어떠해야 하는지 진지한 토론을 벌인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일이다. 중-고 합쳐 3,000여명이 운동장에서 아침조회를 한다. 교장선생님의 훈화를 듣고 나서 새로 부임하는 선생님들 인사시간이다. 시커먼 영감이 “방금 교장선생님의 소개를 받은 김용근이요. 별명은 소도둑놈이요. 교실에서 봅시다!” 하고선 휘적휘적 조회단을 내려가 버리는 거다.

평소에 호남의 영재들이 모인 학교, 무등산 정기가 서린 학교 부임이 큰 영광이라는 인사말에 익숙한 우리들로서는 참으로 커다란 도전(?)이었다. 무참하게 모욕당한 우리들은 신임 선생님에게 사소하기 짝이 없어 도저히 답할 수 없는 질문을 여러 개 준비하여 선생님의 실력 없음을, 그리고 우리들의 똑똑함을 보여 줄 작전을 짜고 세계사 수업을 맞이하였다.

반장의 구령에 따라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나니 ‘소도둑놈’ 선생님이 분필 한 토막을 들어 칠판 한 끝에서 다른 끝까지 줄을 주욱 긋고 새 알만한 동그라미 하나를 치더니 “이것이 무엇인지 아는 놈 있냐?”고 묻는다.

직선이나 빨랫줄은 답이 아닌 것 같고 세계사 시간이니 역사라 하면 좋겠는데 그렇게 쉬운 문제를 냈을 리도 없고...... "이것이 눈구멍이다, 이 놈들아! 분필로 길게 그은 이 세계사란 것은 세계를 보는 눈구멍인데, 이 눈구멍이 제대로 뚫려 있으면 세상을 바르게 보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거고 이 눈구멍이 비뚫어져 있으면 헛되게 보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거다. 알아 들었냐?"

쉰 한 살의 연세에 광주일고에 부임하여 첫 수업부터 우리들을 약 올리고 주눅들게 한 선생은 쉬임없이 우리들을 닥달하고 단련시키셨다.

교과서는 던져버리고 -중세봉건사회는 어떻게 형성되어 어떤 과정을 겪어 무너지고 르네쌍스로 이어지는가? -인간의 재생 인간의 발견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역사의 주인은 누구인가? -너는 누구인가? -원효대사의 대중불교론 -민주 민족 민중론으로 한 학기를 강의하고선 등사판 유인물 10여 쪽 나눠 주시며 “시험 걱정되지? 역사를 보는 눈구멍만 갖추면 예비고사도 대학입학시험도 내가 주는 이 유인물 안에서 나온다. 알았냐?”다.

세종대왕이 집현전의 학자들에게 목아지를 걸고 공부하라는 뜻으로 내린 사가독서(賜暇讀書)를 예로 들며 우리들을 독려하셨다. 자신의 월급을 다 털어 매 달 몇 가마씩의 쌀을 사대며 합숙을 시키면서 농구부원들에게도 농구공을 던지지 말고 혼(魂)을 던지라고 맹훈련을 시키셨다.

옆 길로 빠지는 아이는 하숙집 자취방을 찾아가 마음열어 상담하고 바른 길로 돌려 놓으셨다. 이처럼 바르고 뜨거운 마음을 가진 선생의 훈도를 받은 열 일고 여덟의 우리들이 어찌 무럭무럭 자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내 인생의 길을 바르게 그어 준 첫 수업이 자랑스럽다.


정찬용 NGO 담당대사

 

제22호 16면 2007년 10월 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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