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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人/내 인생의 첫수업

'사람 대접' 받은 그 기억

내 인생의 첫 수업[17]

 

나는 고등학교 2학년때 이미 다 컸다고 생각했다. 컸다고 생각하는 순간 교사들과의 관계는 힘들어졌다. 좋게 보면 인권의식이 싹튼 것이지만, ‘싸가지’없는 학생이 되기도 한 것이다. 

당시에 대한 기억들은 온통 선생님들께 ‘개기고 기어 오른 것’들로 되어 있다. 내심으로 선생님들을 깔보고 무시했다. 학생이라고 무시하고 때리는 사람들에게는 같은 대접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평생을 따라간다는 내 생활기록부에 담임들은 한결같이 ‘비판적’이라고 적었다. 

학력고사 끝나고 그저 등교만 해서 몇시간씩 놀다 가던 시절, 교감이 나를 불렀다. 졸업 때 근사한 일을 만들자는 생각에서 전교생을 대상으로 책을 모았다. 읽지 않는 책을 모아 졸업식 때 복지시설에 기증하려는 생각이었다. 기특한 생각이 아닌가. 그런데 교감은 학도호국단장도, 반장도 아니면서 왜 책을 모으냐고 추궁했다. 달리 할 말은 없었다. 좋은 일이 아니냐고 하니, 교감은 당장 책을 돌려주란다. 누가 무슨 책을 주었는지 모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하니, 갑자기 욕을 하며 뺨을 쳤다. 이 장면을 목격한 국어 선생님이 내게 다가와 팔을 잡기 전까지는 정말로 그를 집어 던져버리려고 했다.

국어 선생님은 “창익아! 참아라, 참아야 큰 사람이 된다”며 말렸다. “XX, 내가 큰 사람 되고 싶은 욕심에 그냥 참는다!” 이 말을 던지고 교무실을 나와 버렸다. 이게 통쾌한 무용담인지, 부끄럽고 서글픈 일화인지 지금도 모르겠다. 이런 고교시절의 삐딱함은 사람대접 해주지 않는 교사들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국민윤리 담당으로 고등학교에 처음 부임하는, 우리와 딱 10년 차이가 나는 새내기 선생님이 오셨다. 촌스러운 뿔테 안경을 쓴 분이었다. 첫 수업부터 거의 눕다시피 비스듬히 앉아서 몇 가지 곤란한 질문도 준비해놓고 있었다. 처음부터 세게 나가서 기를 꺾어 놓자는 생각쯤이었을 거다. 

첫 수업 시간 그 선생님은 ‘가리방’으로 긁은 인쇄물을 나눠주셨다. 투박한 갱지에는 선생님이 손수 쓰신 깨알같은 글씨로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의 계보가 잘 정리되어 있었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그러니까 시험과는 관계도 없는 것이었다. 과목이 비록 ‘국민윤리’지만 교과 진도와 상관없이 생각하고 판단하는데 도움이 되는 철학 공부도 자주 해보자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철학자들의 이름이라도 친숙해졌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시대별로 꼼꼼하게 정리된 철학자들의 명단은 일종의 선물이었다. 그 선물을 받은 나는 삐딱한 자세를 고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제도교육에 편입되어 학생으로 산지 꼬박 10년 동안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 그동안 만난 선생들은 한결같이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줄을 세웠다. 함부로 대했고 자주 때렸다. 어린 학생, 통제와 지도를 받아야 될 학생,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야할 학생 만으로서가 아니라, 사람을 대접을 받은 첫 경험이었다. 역시 교육은 사람대접에서부터 시작되나 보다. 졸업 이후에도 선생님과의 인연을 계속 이어졌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몇 년 안되었을 때 선생님은 서울 인근의 소도시에 아파트를 한 채 장만하셨다. 새 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는데, “내가 이런 좋은 집에 살아도 될까” 하신다. 맞벌이로 살뜰하게 마련한 집인데도 그러신다. 어머니와 애들까지 다섯 식구가 살기에 그리 넓지 않은 집인데도 말이다.

선생님은 지금도 당신의 삶으로, 사람을 대하는 태도로 가르침을 주신다. 매일처럼 이런저런 강좌를 다시니며 ‘열공’을 멈추지 않으신다. 늘 건강하시고, 지금처럼 1년에 서너번씩이라도 뵙고, 소주도 마시고 수다도 떨었으면 좋겠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첫 수업이래, 그분은 늘 나의 선생님이시다.


오창익 인권실천시민연대 사무국장

 

제21호 16면 2007년 9월 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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