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이기에 교직은 해가 갈수록 경륜이 쌓인다기보다 교육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스스로 의문을 품고 더 깊은 고민을 하게 된다.
교사의 미덕은 무엇일까. 전교조 분회장 교육 자리에서 어느 선생님은 그것이 ‘우유부단’이 아닌지 자신의 경험을 어눌하게 소개하여 다들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 고등학교에 오래 몸담아온 그 남선생님은 아이들과 끝까지 청소를 같이 하고 학생들을 잘 이해하는 것으로 학생들 사이에 조용한 존경을 받는 선생님이었다. 그 선생님은 학생이 무슨 잘못을 하면 어떻게 야단을 쳐야 하나, 우유부단해서 한참 망설이다보면 그러는 사이에 그 아이가 왜 그런 일을 했는지 말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보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거나 자신의 오해인 경우가 많아 섣부른 예단과 선입견을 경계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20년 전 1987년 어느 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6월 항쟁의 불길이 본격적으로 타올라 밖에서는 매일같이 거리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민주화의 요구가 들끓던 그 무렵, 학교가 끝나면 가까운 몇몇 선생님들과 남대문으로, 시청 앞으로 나가 최루탄 파편이 사방에 떨어져 있는 연기 자욱한 거리를 함께 헤매곤 했다.
그때 서울의 한 중학교에서 3학년 담임을 하던 나는 교직 5년차에 남녀공학인 학교에 처음 옮겨와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유난히 유머가 풍부하고 개성이 강한 아이들이 모여 있던 우리 반은 날마다 사건이 벌어졌고 그 학년에서도 명물인 학급이었다. 70명의 학생이 빼곡히 들어앉은 교실에서 한참 혈기왕성한 사춘기 남녀학생들이 빚어내는 갖가지 웃고 우는 사연들 속에 파묻혀 하루가 어찌 가는지 모르게 빠르게 지나갔다.
그 당시에는 아침마다 자율학습이라 하여 교장 이하 교감, 서무부장, 주번교사까지 복도 순시를 하며 감독을 했는데 어느 날 조금 늦게 교실로 올라가던 나는 복도 저 끝까지 쩌렁쩌렁 울리는 교장의 호통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 공부도 못하는 인간 쓰레기같은 놈들아. 뭐 잘했다고 아침부터 이렇게….” 혹시나 하여 다가가보니 역시나 우리 반에서 일장 연설을 하며 아이들을 혼내는 교장의 성난 얼굴이 보였다.
담임이 들어오자 어색하게 말을 마치고 나가는 교장의 어깨 뒤로 몇 놈이 공놀이 했다고 뺨을 맞고 손을 든 채 벌을 서고 교실 전체가 쥐죽은 듯 조용히 고개 수그리고 있었다. 기가 막혀 한참 상황을 묻고 듣고 하는데 교장의 폭언에는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바짝 졸아있던 녀석들이 금방 살았다는 듯 여느 때나 다름없이 웃고 떠들고 하더니 급기야 장난꾸러기 한 녀석이 일어나 유리창에 있는 커텐에 매달리기까지 하질 않는가. 어이가 없어 그 녀석을 혼내고 ‘너희들이 이러니 그런 소리를 듣질 않느냐’며 나 역시 한참동안 아이들에게 언짢은 소리를 하고야 말았다.
이 일은 두고두고 오랜 교직 생활에 잊을 수 없는 사건으로 남아 있었다. 어떻게 공부를 못하고 좀 떠든다고 아이들이 인간쓰레기일 수 있는가.
십년이 지나 이 녀석들이 20대 젊은이가 되어 반창회를 한다고 만났을 때 우리는 반갑게 참 할 이야기가 많았다. 술도 한 잔 하면서 중학교 시절의 온갖 추억들이 쏟아져 나오고 요즘은 어찌 지내는지, 진로에 대한 고민까지 밤이 깊은 줄 모르고 이야기가 꼬리를 물었다. 즐거운 자리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한 녀석이 다가왔다 87년 그 날 아침, 마지막에 창가 커텐에 매달려 있다고 혼을 낸 바로 그 녀석이었다. “선생님, 그 날요 사실은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와 커텐이 막 나부껴서 묶으려고 했던 거에요. 그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어요.”
아, 이런 세상에….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기억에는 ‘인간 쓰레기’로 아이들을 모욕했던 교장만 남아 있지만 이 녀석에게는 자신의 진정을 알릴 기회를 못 얻어 오래 가슴 속에 맺혔던 전혀 다른 의미의 기억.
이날 이후 나는 어떤 경우에도 아이들의 이야기를 먼저 듣게 되었다. 왜 그랬는지, 정 말 못하겠거든 내가 이렇게 생각해도 되는지 아이에게 묻게 되었다. 잊을 수 없는 그날은 이렇게 두 번의 커다란 교육적 충격을 내게 주었다. 그중에서도 그 녀석으로부터 받은 두 번째 충격은 교사의 미덕이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임을 깨우쳐 준, 부끄럽지만 참으로 고마운 계기가 되었다.
제18호 16면 2007년 9월 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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