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을 알 수 없는 고구려 고분 옆의 석인상 |
비구름으로 하늘이 낮은 비류수 강변에서 주몽(추모)의 옛 여인들을 떠올려본다. 소서노, 유화, 그리고 예씨.
욕심 같아서는 뱃길에 올라 오녀산성(홀승골성)의 험준한 성벽 벼랑을 가깝게 둘러보고 싶었으나 오락가락하는 빗줄기의 심술로 환인댐 아래까지 돌아오면서도 기대했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물안개 속에 주몽의 옛 세월이 아스라하기만 하다.
주몽은 수상세력의 우두머리 격인 하백의 딸 유화부인으로부터 생명을 얻었고 또 부여 금와왕의 아들 대소에 쫒기다 엄리수(지금의 송화강으로 추정하기도 함)에서는 자라부족 등이 내어준 갈대배의 도움으로 강을 건너 생명을 건졌다. 그리고 비류수를 무대로 살아온 연타발의 졸본에서 소서노라는 여인을 얻고 고구려를 세우게 된다. 그의 숙명에 물은 늘 가까이 있었다.
신화에 의하면 유화부인은 해모수와의 사랑으로 주몽을 잉태했다고 한다. 해모수는 북부여의 건국신화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여하튼 여기서 해모수는 해와 관련된 어떤 세력의 상징적 인물로 추정해 본다. 훗날 주몽이 스스로를 천제 해모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지 않던가. 그러나 그녀는 해모수와는 혼인에는 이르지 못하고 결국 동부여 금와왕의 여인이 되고 말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하백이다.
그렇다면 당시 해모수와 유화는 왜 혼인하지 못했을까? 해모수의 세력과 하백의 세력은 어떤 관계였으며 또 금와의 세력과는 어떤 관계였을까? 물안개마냥 부질없이 피어오르는 의문들은 쉽게 잦아질 줄 모른다. 해모수 세력과 하백의 세력은 결코 통합할 수 없었던 대립과 갈등의 관계가 아니었을까?
하백과 금와세력 간에도 약간의 갈등이 있었겠지만 그래도 일정한 협력관계가 유지되었던듯하다. 해모수세력은 금와세력에게 일종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가 아니었을까? 왜냐면 신화에 유화부인을 취한 금와왕이 그녀를 방에 가두어도 햇살이 스며들고 그 햇볕으로 임신하기까지 했다고 하니 결국 금와왕에게도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있는 위치에 해모수가 존재하지 않았을까? 더욱이 금와왕이 유화부인 혹은 그녀가 낳았다는 알을 돼지우리나 마굿간에 던져 넣기도 하고 들판에 버렸더니 새가 날아와 감싸주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는데 모두가 나서서 그녀를 해치기는커녕 오히려 보호하고 돌봐주지 않았는가? 해모수세력의 영향력이 그렇게 작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건국의 여걸 소서노
여기에서 돼지니 말은 성안의 개부족, 돼지부족을 나타내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들판이라 함은 성 밖으로 내쳤다는 뜻일 게고 그곳에서도 새를 상징으로 삼는 부족이 보호해줬다고 해석하면 너무나 비약일까?
새라 하면 삼족오가 떠오른다. 그리고 어린 시절 국사시간에 외었던 마가, 우가, 저가 등의 단어에서 말부족, 소부족, 돼지부족, 개부족, 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아무튼 주몽은 태어난다. 그리고 성장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예씨 성의 아내를 맞이하기도 했으나 어머니 유화부인과 임신한 아내를 뒤로 하고 끝내 대소왕자에 쫓겨 엄리수를 건너 도망하는 신세가 되었다.
신화에는 ‘말을 키웠다느니, 좋은 말을 골라 혀에 바늘을 꽂았다가 자신이 취해 훗날 그 말을 타고 도망을 쳤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는 말부족과 일련의 관계를 나타내는 게 아닐까? 또는 말부족의 도움을 암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당시에는 육상의 이동수단으로 말을 키우고 다루는 기술이 최고의 선진 기술 중 하나였으리라 미루어 짐작해 본다.
결국 하나의 세력을 이루어 졸본까지 오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졸본에서 운명의 소서노를 만난다. 소서노는 졸본의 수장 연타발의 딸이었다.
소서노에 관해서도 여러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녀가 일찍이 북부여의 우태에게 시집을 갔다가 우태가 죽자 홀로되어 아버지 연타발에게 오게 되었다거나 우태에게서 이미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낳았다는 둥 또는 비류만 낳았고 주몽과 결혼하여 온조를 낳았다는 등의 여러갈래 이야기가 어지럽기만 하다. 하여튼 그녀는 이미 한 번의 결혼을 했던 처지이고 주몽역시 같은 처지였다. 소서노의 아버지 연타발은 비류수 강을 중심으로 중계무역을 하여 세력을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이들은 어떻게 결합하였고 혼인까지 할 수 있었을까?
주몽은 말을 잘 다루는 무장 세력이자 동부여에서 도망쳐 나올 때 유화부인이 주었다는 오곡 씨앗으로 표현되는 농사 역량을 지닌 신진 유입 세력으로 오녀산성(홀승골성)에 거처를 두고 있다. 그러나 산성은 협소하여 농사짓기에 부족하고 세력을 떨치기에도 한계가 있으며 당장의 피신처 역할 이상의 공간이 될 수가 없었다.
오녀산성 아래 강변의 평원에 위치한 소서노와 연타발 집단은 강물을 따라 흐르며 상업으로 일정 수준의 부를 축적한 세력이기는 하나 보호받을 무장 세력이 마뜩치 않은 처지가 아니었을까? 즉 주몽의 소프트웨어와 소서노의 하드웨어 격으로 서로간의 보완적 조건이 맞았기에 결합과 혼인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소서노의 물적 기반을 바탕으로 고구려 국가를 건설하였으며 이어서 주몽은 소서노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는 듯이 비류국의 송양을 제압하고 행인국, 북옥저 등을 차례로 점령해 나아갔다.
집안시의 국내성 |
발굴 중인 국내성의 모습 |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위에 오른 지 4년째에 ‘가을 7월에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고 하는데 주몽과 소서노가 그렇게 세운 고구려 첫 왕궁은 산성아래 비류수 강변의 어디쯤일까? 산성과 한 세트를 이루었을 평지성을 어떤 이는 하고성자로 추정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환인댐으로 수몰된 곳에 있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시내가까이 있기에 오녀산성에 오르기 전 상고성자와 하고성자는 이미 둘러보았지만 별 감흥이 없었다. 상고성자에서는 고구려 고분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보았을 뿐이고 하고성자에서는 성이 있었다는 흔적은 찾기 어려웠고 벼와 옥수수가 자라는 빈 들판을 보았을 뿐이다. 다만 그곳에서 보았던 민가의 곡물창고라는 부경이 새삼 기억에 남는다.
비류수에서 주몽의 여인 만나다
주몽과 소서노가 세운 고구려 건국 이야기에서 주몽은 마치 오녀산성 마냥 우뚝 남아 있는데 소서노의 이야기는 오녀산성 사라진 짝지의 평지성처럼 비류수 강물 따라 어디론지 사라져버린 느낌이다.
환인을 떠나 집안으로 향했다. 고구려의 첫 수도가 환인 지역의 졸본성(홀본)이었다면 집안은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가 되는 국내성이 있던 곳이다. 거리로 160여Km. 버스로 한나절을 달려서 닿는 곳이다.
유리왕은 주몽의 아들로 고구려의 2대 왕이다. 그의 어머니는 예씨부인이며 아버지가 도망간 동부여에서 할머니인 유화부인의 보호아래 자랐을 것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주몽은 도망치기 전 임신한 예씨부인에게 아들을 낳거든 자신을 찾아오게 하는 신표로 주라며 부러진 칼 한 토막을 남겼다고 한다. 유리는 이 칼 토막을 들고 주몽을 찾아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다. 물론 유리가 고구려에 온뒤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주몽이 세상을 뜨는 모습이 석연찮은 대목이기도 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19년(서기전 19) 여름 4월에 왕자 유리(類利)가 부여로부터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해 오니, 왕은 기뻐하고 [그를]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에 왕이 죽었다[昇遐]. 그 때 나이가 40세였다.”라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 고구려와 동부여의 속사정은 어떠했을까?
우선 동부여의 유리와 예씨부인의 처지를 보자면 이들 모자는 비록 주몽이 도망치고 없는 가운데에서도 왕비의 위치에 있는 주몽의 어머니이자 유리의 할머니인 유화부인의 보호아래 근근이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주몽을 죽이려다 놓친 대소왕자에게 유리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을 테니 과정 과정에 침탈과 위협도 늘 도사리고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던 어느 날 유화부인이 세상을 떠난다. 남은 예씨와 유리에게는 믿었던 보호막이 사라진 것이다. 유화부인이 세상을 떠난 지 몇 년 후 유리 모자는 주몽을 찾아 고구려로 도망해 온다. 결국 대소와 유리는 한 하늘아래 살수 없는 관계였으며 대소가 단칼에 유리를 제거 할 수 없었던 점으로 보아 유화부인에서 이어온 예씨부인, 유리 집단은 일정한 세력을 형성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신표로서의 동경이 아닌 칼 토막 역시 동부여에서의 옛 주몽의 지위가 무사 정도의 수준이었고 유리의 집단도 무사적 성격의 집단으로 생각된다.
고구려로 들어온 유리가 기존의 고구려 질서를 뒤로 하고 단번에 대통을 이을 태자로 책봉된 점으로 보아 그 세력의 정도를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즉 그들은 동부여의 문화와 질서를 지닌 한 세력이었을 것이다.
고구려의 사정은 어떠했을까? 주몽은 소서노와 행복했을까? 역사는 신화 속 두 사람만의 이야기를 담고 있을 리 없다. 동부여에서 도망 온 주몽 세력은 동부여적인 문화와 질서를 지녔을 것이고 소서노와 토착집단은 졸본방식의 문화와 질서를 지녔을 것이다. 이들이 설령 서로간의 필요에 의해서 결합되었다 할지라도 아래로 부터의 갈등과 세력다툼은 다분히 있었을 것이다. 주몽세력은 농경 지향적이었을 것이고 소서노 세력은 상업 혹은 수렵적 의존도가 높았을 것이다. 훗날 소서노가 고구려에서 주몽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뱃길로 남하하여 지금의 인천지역으로 추정되는 미추홀에 자리를 잡고 백제 건국의 모태를 형성한다는 이야기도 그녀의 가치와 삶의 질서를 잘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따라서 주몽의 왕권은 결코 안정될 수도 없는 그야 말로 얹혀 지내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주몽의 고구려는 짐작해 보건데 ‘한 지붕 아래 두 집살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 된다.
유리왕의 사랑과 노래 ‘황조가’
드디어 유리가 고구려에 나타났다. 주몽은 처가 세력으로부터 벗어날 기회를 얻었을 수도 있고 주몽을 징검다리 삼아 자신들의 후예로 왕통을 이어 나가려 했을 소서노와 졸본의 토착세력에게는 위기가 닥침 셈이 될 것이다.
주몽은 유리의 손을 들어줬다. 어떤 이는 이때의 세력다툼으로 주몽이 피살당했을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자신과 친정집의 재산을 모두 바쳐서 이룩한 고구려. 자기의 땅에서 주몽으로부터 버림받고 혹은 유리세력에게 쫓겨서 천리 물길을 따라 떠나야 했을 옛 여인 소서노의 원망에 찬 눈매가 떠오른다. 그녀가 흘렸을 눈물이 비류수 강물 물안개 속에 가득히 내리던 지난날 빗방울 흩뿌림으로 다가온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의 시조 온조가 왕위에 오르기 한해 전에 유리가 고구려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환인의 졸본(홀본)성에서 일일게다.
유리의 고구려는 어떠하였을까? 우선 대단히 어수선한 상황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동부여에서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왕위 수업을 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에 선왕 주몽이 세상을 떠났으며 토착 세력 중 일부는 소서노와 함께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왕위에 오른 이듬해 일찍이 주몽이 제압하여 다물후로 봉했던 송양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나 그녀마저 1년 만에 세상을 떠난다. 물론 이런 결혼은 나름대로 세력 간의 유대, 협력의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왕비가 죽자 유리는 바로 이어서 두 사람의 부인을 맞이한다. 유리왕의 두부인은 서로 사이가 좋지 못했고 결국 한사람이 밀려나 유리에게서 떠나게 되었으며 유리는 이때에 지었다는 황조가를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왕위에 오른 지 3년째의 일이다.
고등학교 시절이었던가? 고대사의 대표적 서정시로 배웠던 황조가를 읊조려보며 왕위 3년차 유리왕의 고구려를 떠올려 본다.
“翩翩黃鳥(편편황조) 雌雄相依(자웅상의) 念我之獨(염아지독) 誰其與歸(수기여귀)”
사랑노래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어색하다. 당시의 상황이 결코 녹녹치 않았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유리의 여인들은 누구였는가? 벼 화자 화희(禾姬)와 꿩 치자 치희(稚姬)라는 두 여인이다. 이중 떠난 여인이 치희란다. 당연하다. 농경세력과 수렵세력의 상징을 담고 있는 이름이고 그렇다면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당시의 수렵세력은 농경세력에 밀려 쇠퇴해 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유리왕은 어떤 고민을 하였을까? 결코 사랑타령을 할 수 있는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을 게다. 더구나 당시의 노래란 지금과 같은 개인의 기호나 취미의 문화가 아니라 제천의식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을 것인데…. 결국 왕은 고구려 백성들의 단결과 제 세력들의 단합을 주문한 메시지를 황조가로 표현했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유리는 자신의 취약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최후의 수단으로 수도이전을 단행했을 것이다.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의 천도가 그것이다.
천추묘 너머로 북한의 산이 보인다. |
국내성이 있는 집안지역은 환인보다 확실히 좋은 환경을 지니고 있다. 압록강을 끼고 있어 수상 교통이 용이할 뿐만 아니라 농사짓기에 넉넉한 땅과 기후 그리고 일종의 분지 형태인 방어하기 쉬운 지형적 조건까지 두루 갖추고 있어 초기 고구려가 세력을 일으켜 세우기에 대단히 적절한 지역으로 제 역할을 한다.
돼지가 점지해준 약속의 땅
삼국사기에서 국내성은 돼지가 점지해준 땅으로 적고 있다. 즉 제물로 쓸 돼지가 도망가자 쫒아갔더니 수도로 삼을 만큼 좋은 땅이 있더라는 것이다. 그곳이 집안이란다. 물론 신화나 옛 이야기에서 종종 짐승들이 점지해 신령스러움을 더해준 땅들은 흔하게 나타난다. 그럼에도 의구심은 가라앉지 않는다. 어차피 신화는 상상의 세계로 향해있고 역사는 해석하는 자가 주인이라고 했다. 그래 한번 마음대로 자유롭게 생각해보자.
돼지는 고구려 초기 왕조 이야기에서 자주 등장한다. 단순히 돼지만의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돼지부족을 지칭하는 것이었다면 어떨까? 당시 사회에서 돼지는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반드시 있어야 하는 제물이다. 그렇다고 돼지 한 마리를 쫒아 무려 400리(160여 Km) 머나먼 길을 달려온다? 도망가지 못하게 돼지 다리의 힘줄을 끊었다고 두 사람씩이나 구덩이에 던져 죽여 버린다? 도망간 돼지를 잡아줬다는 여인을 왕비로 맞이한다?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고구려 조의 기사들이다. 돼지를 키우는 일은 목축 중에서도 유별나다. 정착세력이나 할 일기기 때문이다. 목축은 기동성이 생명인데 돼지를 이끌고 이동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이는 어떤 특정 세력의 특별한 역량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고 제사를 주관하거나 제물을 담당하는 집단을 상징한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세력과의 갈등을 무마하고자 돼지로 상징되는 집단에 해를 입힌 자를 죽이기도 하고, 또 그 세력을 제압해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땅을 얻기도 하며, 돼지세력을 제압하는데 공을 세운 이를 우대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이렇듯 상념의 연장에서 아직도 우리네 고삿상 가운데자리를 차지하고 돼지머리를 생각해 보면 고구려에서 이어 내려온 민족의 문화적 혈통은 오늘 날에도 벗어날 수가 없는가 보다.
집안시내 가운데에 남아있는 국내성 옛 성벽흔적이 늦은 오후의 햇살아래 반갑기만 하다. 성벽을 따라 걷다 압록강변이 지나치는 무렵에서 새롭게 발굴중인 성문 흔적을 만났다. 호기심 반, 설레는 마음으로 다가가 사진을 몇 장 찍었더니 어디선가 득달같이 젊은 사람 몇이 다가와 거칠게 가로막았다. 우리 것이 우리 것이 아닌 현주소를 실감했다. 우리역사의 옛 고구려는, 국내성은 지금 중국 국경안의 집안지역에 있다. 매미 겉껍질을 뭉개서 뱀허물을 만들까 걱정이다. (계속)
제20호 12면 2007년 9월 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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