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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人/오피니언

사람이 행복해지는 시민교육의 길

‘2007 더불어 즐거운 시민교육 한마당-나무와 숲의 대화’를 마치고

 

최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80년대 민주화운동 참여자 가운데 약 60%가 한국사회의 민주화 수준이 ‘평균 이하’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 이유로는 대체로 양극화 심화, 비정규직 확대, 분단, 불평등한 한미관계 등이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아직도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다.

시민교육한마당에 참석한 활동가들.


6월항쟁 20주년을 맞는 현 시점에서 이러한 통계는 한국사회가 어디쯤 와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과연 한국사회는 아직도 ‘비민주적’인가? 적어도 외형적으로 보자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한국사회는 경제적으로도 그렇지만 정치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온 나라이다. 기계적으로 쌓아온 성과만으로 보자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결코 빈곤하지 않다. 그런데도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직도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2006년 애드리안 화이트 교수가 작성한 세계 행복지도에 의하면 한국은 102위였다. 한국은 OECD 가입국 중 자살율 1위이다. 직장인들은 10명중의 1명만이 행복감을 느낀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이며 대안은 무엇일까.

물어보자, ‘과연 행복한가’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행복해 질 수 있는 요소는 이미 우리 안에 있다. 가령 현재 한국의 생산력 수준으로 보자면 우리들이 경제적인 고통을 느껴야 할 이유는 없다. 세계 경제력 순위 11위 아닌가. 사람은 빵 없이 살 수 없다. 하지만 빵만으로 살 수는 없다. 인간의 행복은 주관적인 것이어서 아흔아홉 가지가 풍족해도 단 한 가지 결핍요인이 행복감을 극도로 떨어뜨릴 수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재벌, 도지사, 시장 등 유력인사들의 연이은 자살은 인간의 행복이 결코 빵과 일치하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한국은 아직 사건으로서의 평화통일은 멀었을지 몰라도 과정으로서의 통일의 길은 이미 걷고 있다. 정치, 사회, 법, 문화, 환경, 언론의 자유, 사회복지 면에서 아직도 성숙되지 않은 부분이 많이 남아있긴 하지만 그 정도로 심각한 불행감을 느낄 정도는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불행감은 엄살일까?

가장 큰 요인은 행복 요소들이 제대로 통합되지 못한 데 있는 것 같다. 핵심은 균형과 통합이다. 한국의 생산력은 규모가 엄청나게 늘어났을지 몰라도 개개인의 행복을 통합해 내진 못하고 있다. GNP와 시민들의 행복지수가 일치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개개인의 행복욕구를 모아서 GNP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GNP로 개인의 행복지수를 표현하는 방식에서 이런 결과는 어쩌면 필연적이다. 정치는 어떤가. 적어도 제도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한국 민주주의는 만개기에 와 있다고 본다. 그렇지만 정치의 본질이 개개인의 행복 욕구를 조직하고 조정하는 것이라 본다면 한국의 정치는 아직 멀었다는 느낌이다.

이것은 다른 차원에 대입해도 마찬가지이다. 6월 항쟁 이전까지 시민들의 행복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요인은 ‘군부독재’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장애물을 제거하고자 뜨거운 피와 땀을 바쳤으면서도 힘든 줄 몰랐다. 그때는 그랬다. 그러나 6월 항쟁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억압 정치에 가려져있던 시민들의 행복욕구는 문화, 교육, 환경, 여성, 풀뿌리, 인권, 평화, 사회복지 등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필연적으로 사회운동의 영역도 그만큼 확대됐다. 그리고 각 부문의 성과들이 축적되어 적어도 아시아 지역에서는 하나의 모델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운동의 규모와 성과에 맞게 시민들도 행복한가? 아마도 이러한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조금 비약하자면 6월 항쟁 이후 한국 사회운동이 걸어왔던 길은 한국경제가 걷고 있는 패턴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운동은 저금통에 동전 넣듯이 부문, 지역에서 성과를 차곡차곡 쌓아왔다. 그렇게 해서 사회운동이 외형적으로는 커졌지만 시민들은 아직 행복하지 못하다. 한국 사회운동의 비전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냉정하게 보자면 사회운동이 이 정도의 규모와 성과를 가지고도 비전을 고민한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왜 그런가?

광속 발전, 사회운동도 마찬가지

사회운동의 성과와 시민들의 행복이 일치하지 않는 것은 양자 사이에 다른 기제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사회운동이 각 현장에서 각개약진 하더라도 열심히만 하면 덩치는 커질 수 있다. 그러나 사회운동의 덩치가 커지는 것과 시민들의 행복욕구를 잘 조직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한국 사회운동은 이 점을 놓쳤다. 그저 개혁이 쌓이면 뭔가 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가다보면 과연 돼지 저금통 깨는 날이 올 수 있을 것인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복욕구를 수렴하지 못하는 GNP는 허구이다. 왜냐하면 GNP는 개인의 행복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자아실현, 성찰, 욕망 다루기, 자존감, 영성, 소통과 관계, 배려 등의 가치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분의 합이 전체와 다른 이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특히 관계가 왜곡되면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 오히려 작아진다. 가령 많은 사람들이 자원이 빈약한 한국의 현실에서 교육은 사회발전의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으로는 교육이 거꾸로 시민들의 행복에 질곡으로 작용하고 있는 현실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관계’가 행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교육은 거꾸로 억압이 된다. 한국 사회운동은 이러한 역설에 답할 책임이 있다.

마찬가지로 부문, 지역운동의 성과가 시민들의 자아실현, 성찰, 욕망 다루기, 자존감, 영성, 소통과 관계, 배려 등의 가치에 기초하지 못하면 부분(개인)의 합이 전체보다 커지기는커녕 깎아내린다. 여기서 전체는 생산력일 수도 있고 사회운동의 성과일 수도 있다. 이것은 다시 환원되어 개인의 행복을 깎아내린다. 악순환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운동의 비전에 대한 고민은 ‘생존’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지점이 되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국 사회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고 본다.  

이것은 시민교육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시민교육 현장의 성과가 쌓여서 덩치가 커지는 것만으로 시민들이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몸무게가 느는 것이 건강의 징표는 아니지 않는가. 영양분은 활력이 되고, 근육으로 붙어야 한다. 시민들이 행복해지는 시민교육이 되기 위해서는 덩치만 커지는 것이 아니라 각 현장, 시민들의 소통으로 전체보다 큰 부분의 합을 만들어 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연대와 소통의 필요성을 ‘단결’에서 찾는데 이것은 접근 지점이 전혀 다르다. 단결로 악순환을 걷어낼 수는 없다.

전체보다 큰 부분의 합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NGO교육포럼이 지난 8월 30일부터 9월 1일까지 ‘우리안의 미래 연수원’(가평)에서 공동주최 한 ‘2007 더불어 즐거운 시민교육 한마당’은 그러한 보다 큰 부분의 합을 모색해보자는 목적으로 기획되었다. 나무들의 집합은 어디까지나 나무일뿐이다. 이에 비해서 숲은 나무들의 집합 이상의 의미를 가진 하나의 체계(system)이다. 그래서 이번 워크숍의 주제도 ‘나무와 숲의 대화’였다. 30명에 가까운 교육활동가들이 참가했다.

‘나무와 숲의 대화’는 우선 ‘나무’에 주목했다. 지금도 각 시민교육 현장에선 성과가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 이러한 성과를 쌓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교육활동가들이 헌신성과 열정을 바치고 있는가. 그래서 이번 워크숍에서는 교육활동가들에게 최대한의 배려를 하려고 노력했다. 교육활동가들은 대접받을 충분한 권리가 있다. 따지고 보면 교육활동가들도 하나의 나무 아닌가. ‘시민들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나무가 되어 숲과 나누는 대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워크숍의 초점은 세 가지였다. 첫째, 칸막이를 낮추고 숲을 그리는 일이었다. 칸막이 쳐진 시민교육 성과를 기계적으로 총합한다고 해서 곧바로 시민교육의 성과가 되는 것은 아니다. 현재 시민교육 활동은 하나의 사회운동으로써 정립되지 못하고 기능적인 ‘프로그램’으로써 다루어지는 경향이 많다. 게다가 교육활동가들은 시민교육의 방향, 내용, 자신의 활동력을 점검 받을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 교육활동가들은 시민들의 행복 욕구와 치열하게 소통해서 더 큰 그림을 그릴 여유도 없이 그냥 일상의 업무를 수행하는 ‘프로그램 기술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교육활동가들이 조직 내 다른 영역으로부터, 그리고 각 교육활동의 의제와 단체 간에 소외와 단절이 나타나게 된다.

조금 비틀어서 말하자면 이렇다. 모든 활동가들에게 있어서 ‘열심히 일하기’와 비슷한 말은 무엇일까. 부지런히 일하기? 헌신? 어의 상으로는 모두가 맞는 말이지만 적어도 현재 시민교육의 맥락에서 보자면 ‘열심히 일하기’와 비슷한 말은 ‘단절’과 ‘고립’이다. 그리고 반대말은 게으름이 아니라 소통이다. 지독한 아이러니다. 물론 이것은 많은 부분을 삭제했을 때의 비약이다. 하지만 자기 일만 열심히 한다고 해서 시민교육의 성과가 쌓이고 그것이 시민들의 행복 욕구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하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둘째, 피드백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교육활동가들이 시민들의 행복욕구와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샤워를 할 때 수도꼭지를 돌려가면서 수온을 조절하게 된다. 인간의 몸 안에는 수온을 느끼는 계측기가 있다. 그래서 수온을 읽고 행동으로 옮기면 샤워기의 수온은 나에게로 다시 피드백 된다. 그러면 나는 다시 반응한다. 시민들과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로부터 시민들에게 내뿜어진 에너지는 일정한 반응절차를 거쳐 나에게로 다시 피드백 된다. 나에게로 피드백 된 에너지는 내안의 에너지를 통해서 재해석되는 것이다. 내안에는 나는 물론 시민들의 에너지를 읽는 거울이 있는 셈이다. 확대하자면 시민교육의 성과는 단체 안에서 재해석되는 과정을 거쳐 시민들에게로 다시 피드백 된다. 그렇게 해서 시민교육의 성과는 확대재생산 되는 것이다. 교육활동가들에게 필요한 리더십은 이러한 선순환을 나로부터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이다.

민주주의 내면화를 위한 과정

셋째, 시민교육으로서 시민들이 행복해 질 수 있는 길은 각 시민교육이 있어야 할 자리를 정확하게 찾아가는 것이다. 아직 취약한 부분은 강화되어야 할 것이고, 없는 것은 만들어 가야 한다. 시민교육의 성과를 기계적으로 쌓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기 자리를 찾아가야 한다. 시민교육의 의미는 그렇게 해서 주어진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 찾기는 전체 그림을 그리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누가 그릴 것인가. 바로 교육활동가 자신들이다. 이것이 각 현장간의 소통이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시민활동가들은 물론이고 모든 시민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자리 잡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의 내면화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립과 기능의 벽을 넘는 일이다. 고립되면 기능에 갇히기 쉽고 기능에 갇히면 고립되기 쉽다. 시민교육은 이제 부분에 복무하는 기능이 아니라 한국사회를 들어 올리는 지렛대여야 한다. 지렛대를 아무데나 대면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전략적 위치에 대야 한다. 이번 교육활동가 워크숍은 그러한 전략적 위치를 찾는 자리였다.


곽형모 NGO교육포럼 공동대표

 

제20호 7면 2007년 9월 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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