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News/지구촌

선거, 민주주의의 축제

로렌스 수렌드라의 8월 27일 아레나 강연

 

‘김레베카의 글로벌엔지오’란 이름으로 섹션을 하나 받았다. ‘글로벌’ 하고도 ‘엔지오’가 내 이름 뒤에 붙었다. 하. 난 나이 사십이 넘은 지금에야 난생 처음 진보사회학판을 기웃대고 있는 한 아시아인에 불과하다. 그렇구나, 사춘기 때부터 자신을 ‘한국인’ 보다는 ‘중국인’ 내지 ‘아시아인’으로 더 상상하기 좋아하던 감수성이 어찌 보면 날 지금 이곳까지 이끌어온 것이다. 인생은 해괴한 줄거리를 가진 삼류연극이다, 내 것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섹션 첫 기사를 그 삼류연극을 맨 처음 정식으로 무대 위에 올릴 수 있도록 해준 한 인간에게 바치기로 한다.


아시아에 미친 인간, 로렌스

지난 8월 27일, 로렌스 수렌드라(Lawrence Surendra) 선생은 성공회대 아레나(ARENA) 사무실에서 아홉 번째 ‘아시아시민사회포럼’ 강연을 하기로 되어있었다. 이른 아침 말끔한 의복에 쉬크한 밤색 샌달까지 갖춰 신고 나타난 그는 학교로 가는 택시 안에서부터 사뭇 상기되어 있었다. 창밖으로는 제법 굵은 빗줄기가 비쳤지만, 그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간간이 발 굴러가며 따라 불렀다.

 

민주주의와사회운동연구소의 송용한 선생이 나중에 정리해놓은 원고에서 선생을 소개한 부분을 보니 “아레나(ARENA) 펠로우로서 인도 남쪽에 있는 마이소르 대학에 재직 중이고 정부 자문위원회에서 자문도 하고 있”다고 되어 있다. 나는 “재직”이란 말처럼 이 로렌스란 인간과 동떨어진 말도 드물 것이라 생각했다. 2004년 봄 그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노무현 당선 직후 한국에 들어와 마땅히 일할 엔지오를 찾고 있던 나는 어찌어찌 조희연 선생과 알게 되었고, 선생의 제안으로 막 결성되어 있던 ‘부시낙선네트워크’라는 그룹에 들어갔다. 뉴스레터 만들고 필요한 기사 영역해주고 그러던 차, 6월 중순에 고려대학교에서 큰 반세계화민중회의가 열렸다.

 

“글로벌 민주주의를 위한 아시아 부시낙선네트워크(Asia Defeat Bush Network for Global Democracy)”란 이름을 갖고 있었던 우리 팀은 거기서 “부시와 네오콘에 맞서는 아시아 민중의 전략(Asian Peoples' Strategy to Fight against Bush and the Neo-Cons)”이란 제목으로 워크샵 하나를 주관해서 진행하기로 했다.

 

그때 발제자로 참석한 이들 가운데 하나가 로렌스 선생이었고, 또 다른 하나가 로렌스 선생과 90년대 중반 일본 전역을 돌며 ‘민중계획21’이란 어마어마한 시민연대 프로그램을 진행한 바 있는 일본 급진 초국경사회운동 이론의 대부, 무토 이치요(Muto Ichiyo) 선생이었다.

내가 통역가로 ‘급조’되어 있었지만 그때만 해도 내 영어통역은 서투르고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로렌스 선생은 당시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산하 아태국제이해교육원(APCEIU)에 자문관으로 와 일하고 있었다. 잔뜩 굳어있던 내게 이루 말할 수 없이 즐겁고도 팔팔한 인상, 활달하기 그지없는 몸가짐을 가진 인도인이 쓱쓱 걸어왔다.

 

약간 쉰 듯한 목소리가 굵은 안경 너머로 하도 크고 밝아서 마치 폭죽폭포수 같던 눈빛과 함께 이런 말을 내뱉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제가 로렌스 수렌드라입니다. 오늘 제가 할 얘기는 아주아주 쉬운 거에요, 하나 안쉬울 수도 있는 용어가 있다면 아마 “전지구적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란 것일 텐데요,..” 오, 그건 나도 이미 알고 있는 표현이었다, 하필이면 이장희 선생이 어려운 법률용어를 잔뜩 써가며 발제하는 바람에 맨 마지막 통역은 완전히 뭉개버렸지만 말이다.

그 다음날 그를 다시 만나게 됐을 때, 그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식이었다. 마침 날은 터질 듯 화사했고, 그 역시 화사한 상아색 체크무늬 양복을 입고 나타나 그가 아니었더라면 아마 많이 더 거북해졌을 자리(조희연 선생은 반부시 아시아네트워크 구성을 발의하고, 무토 이치요 선생은 계속 거기에 어깃장을 놓고, 하는 장면이 이어지고 있었다)의 편안하고 따뜻한 ‘중간자’가 되어주었다.  

그는 아시아에 미친 사람이었다. 우연치 않게도 나 역시 그러했는데, 놀랍게도 그렇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전혀 ‘깨닫질’ 못하고 있었다. 나는 또 바로 로렌스 선생 같은 인간형을 일생 흠모해온 사람이기도 했다, 지극히 사회적인 인간. 땅과 영혼의 인간. 환경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이지만 또 (문학적인 인간이 아니라, 그 자신의 표현처럼) “문학적으로 창조적인” 인간.

 

그는 얘기를 할 때나 글을 통해서나, 단지 추론과 관찰의 엄밀성과 표현의 밀도에 있어서 뿐만이 아니라 한 시공간 한 인간의 목소리가 다른 시공간 다른 인간의 내면을 건너간다는 일이 어쩔 수 없이 연루시키는 오인誤認와 친밀함, 그 친밀함들의 자장 안에 버티고 있어야만이 비로소 가능해지는 어떤 ‘떨림’을 본능적으로 전달할 줄 알았다.

 

문과 출신의 나는 그의 그러한 놀라운 재능을 즉시 간파했다. 이 년 정도 그란 인간을 더 겪어보고 나서 내가 다시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아시아란 가난한 민중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가난! 인간이 상상 가능한 모든 종류의 물질적, 정신적 기괴함을 수반하는 질병, 제도일탈이었고, 수백 년에 걸친 수탈과 압제가 게워낸 고름이었다. 민중이 아직 그 고름바다 속에 있는 한, 어떤 과오도 아직은 과오라 할 수 없었다. 깨어 있는 한순간 한순간이 미칠 듯한 축제였다.

 

마찬가지 축제를 벌일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마르케스 소설에 툭하면 나오는 저 ‘없애도없애도 몰려오는 불개미’같은 늘 좀 더 많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는 그 축제에 더더욱 미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우리가 대체 뭔데, 저런 비참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우리 곁에 아직 저렇게나 많은데, 감히 삶을 ‘즐거이 여기지 않는 사치’를 부릴 수 있느냐 말이다.

그래서 그는 진보사회학 깨나 하고 운동 깨나 했다는 이들이 빠져있기 쉬운 저 이념의 잔인하고 어리석은 광기에 쉽게 노출당하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진리로 인해 멸망하지 않기 위해 예술이 있다(We have arts lest we perish from the truth)”고 썼다.

 

로렌스만큼 예술적인 인간을 나는 본 일이 없었다. 마이소르 벽지 마을에서 첨단도시 서울로 날아오면, 그는 ‘이런 소리를 평생 듣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는 다른 수많은 이들’ 생각에 후두둑 몸을 떨면서 바하니 모차르트니를 무아지경 속에 듣곤 했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연민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이 ‘이념’이니 ‘운동’을 위해 살고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의 형형한 눈빛과 잦은 킬킬거림으로부터 내가 판독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너와 내가 힘 합쳐 노력하면 얼마든지 고쳐질 수 있는 악으로 인해 고통 받고 죽어가는 인간들에 대한 연민, 그것이었다.

 

데비토푸 농장 주변 농민들은 지독한 가뭄과 채산성 낮은 노동에 시달릴대로 시달리다 하나둘씩 스스로 목숨 끊고 사라졌다고 했다. 역시 내 좋은 친구가 된 로렌스의 부인 푸쉬파는 값싼 마을 노동력, 물 등을 남김없이 훑어가는 코카콜라회사니 인도판 마이크로소프트사 등 다국적기업에 대한 절망어린 분노를 이메일마다 쏟아내곤 했다.

 

이들 부부는 결국 농장을 제삼자에게 위탁, 대안학교 비슷한 시설로 개조시키기로 하고 거처를 마이소르 시내로 옮겼다. 근 일 년 만에 다시 대하는 로렌스 선생 낯빛이, 마이소르대 경제학과의 기획위원장겸교수로 일하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험한 막노동에 시달리는 일이 예전보다 훨씬 줄었음이 분명해 보였다.

 

마이소르 지방법원 판사로도 비상근하게 되어 물분쟁, 토지분쟁 등, 앞으로 가까이에서 보고듣고 기록해둘 일이 태산일 것이라면서 그는 어린애처럼 설레어 했다. 민중 생활고에 대한 민중이 내뱉는 생생한 아카이브의 문지기 고문관이 된 것이니, 그럴 만도 했다.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그의 역정은 한국에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아레나의 다른 몇몇 유수한 펠로우들처럼 그 역시 아시아 지역 민주주의의 살아있는 역사책이나 마찬가지였다. 군부 쿠데타라든가, 민주정부 수립이라든가, 인종 간 무장갈등이라든가, 대규모 학생시위라든가, 70년대 이후 줄곧 아시아의 문제적인 현장에는 그 역시 있었다.

 

나는 간략하게나마 그 역사에 대해 쓴 적도 있는데, 마침 그가 2005년 성공회대 겨울학기 특별강좌를 맡게 됐을 때였다. 강의는 “아시아의 발전과 민주주의”란 제목을 달고 있었고, 전 시민의신문에 ‘지상(紙上)강의’로 재생산되었다.

 

지식인이자 학문적인 스승으로서 그가 가진 최대의 장점은, 이론과 방법론을 든든히 갖출 것만큼 ‘인간이라는 제1의 재료’(사회학은 어차피 사회, 인간들의 관계에 대한 학문이니 말이다)를 철처히 파고들고 철저히 떠받들 것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아시아를 두고 박사논문‘용’ 줄거리를 찾고 있는 내게 그는 “사람에 대한 얘기만이 살아남는다”고 못박았다. 속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와야 옳은 사람과 사람 삶에 대한 관심, 그러한 관심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가르침, 인류애. 그가 생각하는 학문의 시작과 끝은 그것이었다.      

아래 소개하는 그의 27일 아레나 강연을 통해서도 아시아인이자 학문하는 인간으로서의 그의 그러한 강점은 여실히 드러난다.

 

필리핀, 태국, 인도 등지에서 우리가 보통 ‘대의 민주주의’라 부르는 민주주의 기제가 아시아 밑바닥 민중들 사이에서는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에 대한 엄정하고도 감동적인 보고서가 될 문제의 강연은 지난 봄 그가 선거 옵저버로 활동하면서 실제로 보고 겪은 일들로만 짜여져 있지만, 아울러 민주주의에 대해 그가 갖춰온 이론적 통찰력은 그 재료를 아시아 사회운동과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한 괄목할만한 결론으로까지 인도해가고 있는 것이다.

“길거리 민주주의는 물론 중요하지만, 민주주의가 길거리 민주주의로 ‘환원’될 수는 없다, 민주적 민중의 법 없는 행동을 뜻하기 때문이다. 사회운동가 이름으로 도덕적 원칙들을 내세우면서 제대로 일할 수는 없다. 도덕적 원칙들은 민중 일반의 합의에 의해서 그것도 삶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생계, 빵, 임금, 등등)에 한해서 만들어져야하는 것이다. 태국, 필리핀, 아시아 전체의 민주주의의 미래는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민주주의의 기본이 확실히 존중되도록 만드는가에 달려있다. 우리가 못하면 세계화 소용돌이 속에서 전지구적 경제세력이 우리가 민주주의를 어떻게 경영해야하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치게 될 것이다.”  

 

■ 최근 필리핀과 태국의 선거: 아시아 민주주의에 관한 시사점 (Recent Elections in the Philippines and Thailand: Implications to Democracy in Asia)

■ 발표 : 로렌스 수렌드라 Lawrence Surendra (University of Mysore, India)  

■ 서두

아레나 사무실에 오게 되어서 반갑고, YMCA건물에서 나왔을 때 비가 왔었는데, 너무 오랜만에 내가 아레나와 재회하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헌데 이곳에 오니 날이 활짝 개었다. 앞으로 아레나 미래가 밝아지리라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지난번 아레나 사무실은 홍콩에 있었고, 상황은 암울했다, 주변은 모두 공장 건물이었고. 단지 주변을 둘러싼 건물 때문만이 아니라 당시 아레나가 처해있던 상황, 민주주의 전망이 그러했다.    

새 아레나는 달라야 하리라 생각한다. 이전의 아레나는 우리가 다 알고 다른 이는 우릴 가르칠 생각을 말아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레나에 합류하는 이들은 그 즉시 자기들이 다 안다고 생각했다. 아레나가 생겨난 목적은 다르다.

 

아레나의 목적은 더 연구하고 더 알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 젊은 친구들도 마찬가지 태도를 가졌으면 한다. 나중에 여러분 나라에 돌아가서도 절대 전문가는 되지 말아 달라. 학자, 전문가, 활동가들의 전문성이 휘두르는 독재에 우리는 고통 받고 있다.

 

활동가는 잘 듣지 않고 대화를 하지 않는다. 늘 설교하고 외칠 뿐이다. 자기의 말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굉장히 도덕주의적인 태도를 가지며, 그로부터 남들을 가르치려 든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아주 쉽게 아시아 각 나라의 독특하고 위험한 민족주의와 결합한다. 스리랑카의 요즘 사태를 보면 잘 알 수 있듯이 일반인들은 그러한 민족주의적 태도에 의해 심각한 위협을 당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이 점에서 직업이 아니라 인민의 자유를 위한 일생에 걸친 끊임없는 추구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더 월등한 가치여서가 아니라, 그것이 아니면 보통 사람들이 자기를 지켜낼 방도가 없기 때문에.    

김레베카

성공회대 아레나 사무실에서 강연하고 있는 로렌스 수렌드라씨.


■ 주제 1. 필리핀 선거

인도의 민주주의도 특별히 더 우월한 종류가 아니었고 이런저런 긴 테스트를 통해서 생존했다. 엔지오의 역할도 있었지만(나는 인도든 방글라데시든 스리랑카든 엔지오들에 대해 비판적이다) 인도 민주주의가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민주주의가 일반인들의 생계를 위한 산소나 마찬가지라는 점을 활동가들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학자 내지 활동가로서 민주주의에 관심 가져 왔던 게 아니라 어떤 직업을 가졌든 간에 우리 모두 반드시 관심 갖지 않으면 안 될 문제였기에 관심 갖고 살아왔다.  

오늘 나는 필리핀과 태국의 사례를 통해서 민주주의가 오늘날의 우리에게 함의하는 바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많은 이들이 민주주의는 선거에 대한 것이라 얘기해왔다. 선거는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한 차원이긴 하지만, 민주주의 그 자체는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들 ‘사이에’ 벌어지는 것이 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점에 대해 옛 홍콩 아레나 사무실에서 한번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사실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동료들은 왜 느닷없이 ‘선거’에 대해 말하느냐는 식이었다.  

인도 선거에 대해서도 필리핀 저널 <카사린란(Kasarinlan)>에 글을 쓴 적이 있는데, 당시는 힌두 우익정부가 인도를 통치하고 난 직후 선거가 열렸을 때였다. 힌두 우익정부는 매우 강력한 파시스트세력과 연대했고 인도 전체가 파시스트 국가가 될 가능성이 짙었다.

 

무자라트주에서 는 1만 명의 무슬림이  살해당했고, 임산부 배를 갈라 태아를 끄집어내 죽인 잔혹한 일까지 벌어졌다. 놀라운 것은 그런 짓을 저지른 자들이 부유한 계층, 멋진 차가 있고 핸드폰도 갖고 사는 이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핸드폰으로 서로 연락을 주고받아 어디 가서 누굴 손볼 것인지 파악했고 그러면 우르르 몰려가서 집을 싸그리 불태우고 그랬다.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찍어서 자기들 집에서 보기도 했다. 소위 민주주의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 정도의 분위기였기 때문에 선거 당시 모든 이가 이 우익정권이 다시 정권을 잡을 것이라 여겼다. ‘모든 이’라니? 미디어, 텔레비전, 신문, 그리고 당시 아레나의 지식인을 비롯한 모든 지식인들 말이다.

나는 우연찮게도 시골에 살고 있다. 유기농을 한다고 말하는데 실은 아내가 유기농장을 갖고 있고, 그래서 같이 농장을 돌본다. 인근 농민들이 우리 농장에 일하러 오기 때문에 이들의 사정을 다른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 이들을 붙잡고 물어볼 때마다 내가 들은 대답은 이 정부는 안된다, 부유한 사람들만 지원하는 정부이기기 때문이라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는 이런 정부를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우익정부가 질 줄 알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아무도 나를 믿지 않고 이 로렌스를 바보라고 생각했다. 결국 우익정권은 선거에서 패배했다. 가난한 보통 사람들의 반대 때문에.

 

국가는 인도가 가장 큰 민주주의 국가라는 둥, 핵무기 개발한다는 둥, 세계에서 가장 힘센 강대국이 될 거라는 둥 감언이설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이 원한 것은 그런 게 아니라 빵과 버터(먹고사는 것)였다. 그것이 우익정권을 뒤집어엎은 것이다.

잠깐 1977년 선거로 돌아가 보자. 인도에서는 권위주의 정부가 처음으로 직면한 선거였다. 간디여사가 정권을 잡고 있었고, 계엄령, 비상조치가 내려져있었다, 권리와 자유를 위해 투쟁하던 모든 조직이 멈췄고, 사람들은 지하로 들어갔다. 당시 스웨덴에 있었던 나는 이 조치에 반대하는 활동을 했다. 스톡홀롬에 있었는데, 간디여사가 선거를 요청했다.

 

사람들은 선거를 두고 갖가지 논의를 벌였고, 저명학자들로 패널이 구성되었다. 당시 난 젊은 활동가에 불과했고 어떤 식으로 말해야할지도 잘 몰랐다. 큰 회의가 열렸고 대사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와서 간디여사가 선거를 조작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길 것이라고 얘기했다.

 

나는 270 의석(집권을 위한 최대 의석 수)을  조작해야한다는 얘기인데, 그건 1만 내지 2만개의 다양성(언어, 문화, 종교, 카스트 등)을 조작해야한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라고 대답했다. 만일 조작해야만 이길 수 있다면, 간디 여사가 이길 가능성은 논리적으로 없다고 해야 하는 게 맞다고 말이다.

결국 간디여사가 졌다. 서방언론은 인도 인민이 자유보다 빵을 원하기에 간디여사가 이길 것, 정권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떠들어댔었다. 벌어진 것은 그 정반대였다. 인민은 자유는 빵을 얻기 위해 중요하다고 대답한 것이다. 빵과 자유가 문제가 아니라 빵을 위한 조건을 마련해주는 자유의 조건이 문제였다. 오직 자유를 통해서만이 빵을 얻을 조건, 생계가 보장되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문제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미티아 센(Amartya Sen)도 복지와 민주주의와의 관계에 대해 많이 얘기했는데, 특히 중국과 인도의 기아를 비교하면서 쓴 3권으로 된 <기아와 공공행동(Hunger and Public Action)>이란 책이 있다. 두 나라가 기근에 처했을 때 중국 인민이 더 많이 죽었는데, 왜냐면 인도에서는 민주주의가 인민이 기아에 대처할 능력과 네트워크를 주었기 때문에 덜 죽었다는 것이다.

선거에 대한 얘기 이전에 민주주의에 대한 이런 말을 꼭 먼저 하고 싶다. 민주주의는 우리가 가진 신념을 외칠 권리를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외치고 싶은 어떤 것을 우리 자신의 행동규범 안에서 실행에 옮길 권리가 아니다. 우리는 일정 사회의 일정 룰 안에서 움직인다, 그리고 그 틀 안에서만이 우리는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규범과 룰 - 선거가 나타내는 민주주의의 세 차원

이제 선거에 대한 얘기를 해보자. 선거는 형식적 민주주의의 세 차원을 나타낸다. 민주주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형식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로. 아레나 지식인들은 6,7년 전만해도 실질적 민주주의에 대해 별 견해가 없었는데, 시간이 더 지나면서 점점 더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는 것 같다. 실질적 민주주의란 한 마디로 선거들 ‘사이’에 대한 것이다. 필리핀과 태국 선거 얘기를 하면서 이 문제로 다시 돌아오도록 하겠다.  

형식적 민주주의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선거는 형식적 민주주의의 세 차원을 나타내는데 우선 (1) 민중의 정치적 의지를 대표하는 행위(대의제)로서, 가장 많이 알려진 차원이다, 모든 이에게 공정한 선거권이 있고, 등등. 스위스는 1940년대 이후여야 여성에게 선거권이 보장되었다. 선거권 문제 자체가 민중의 정치적 의지를 나타낸다.

 

(2) 선거가 실질적으로 행해지는 과정은 형식적 민주주의의 두 번째 차원을 타나낸다, 바로 정당을 통해서 벌어지는 사회 계급과 그룹들의 사회통합이라는 차원인데, 이것은 또한 한 사회 민주주의의 안정적 측면을 나타낸다. 필리핀 선거 예를 살피면서 나중에 이에 대해 더 부연하도록 하겠다.

 

(3) 세 번째 차원은 선거가 벌어진 이후, 정부가 형성된 다음에 오는 차원인데, 통치의 정당성 확보와 관련되어 있다. 그 정당성이 선거의 세 번째 차원인데, 하나의 정당 또는 연합정당을 통해서 의회 내에서 다수성과 통치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안정된 다수가 이끌어낸 결정이라는 차원이다. 다수성을 얻지 못하면 문제가 생긴다. 이것이 형식적 민주주의의 세 차원이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우리가 왜 선거에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선거들 ‘사이’의 문제이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선거 자체도 굉장히 중요하다. 나 역시 이를 뒤늦게서야 발견했다. 활동가일 때는 민주주의는 부르주아의 것이고 투표해봐야 바뀌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정치가들은 다 부패했고, 등등. 1994년 이전에는 선거하러 조차도 안나갔다, 외국에 살았고, 필요성도 못 느꼈다.

 

선거가 대단히 중요한 제도란 사실을 나는 이후 다른 지역을 여행하면서 알게 되었다. 자기가 나고자란 곳에만 박혀있으면 사실 우린 많은 걸 배우지 못한다. 처음 선거의 중요성을 알게 된 건 선거참관인으로서 네팔을 방문하면서였다. 아레나 코디네이터로서 네팔 친구들과 함께 인권과 민주주의와 관련된 프로그램을 하고 있을 때였다.

 

민주주의를 위해 일하는 모든 친구들이 다 옵저버로 네팔에 초청되어 갔다. 나는 네팔에서도 아주 후미진 지역으로 갔고, 거기서 나는 선거가 무엇인가를 봤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축제였다. 지식인들이 다 선거에 대해 당시 네팔의 그 보통사람들 같은 태도를 갖고 있었다면 민주주의는 훨씬 더 나은 어떤 것이 되었을 것이다. 굉장했다.

설탕 마피아가 좌초시킨 토지개혁, 필리핀

필리핀의 경우를 보자. 당시 나는 필리핀에 대해 그다지 잘 알고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저 몇 번 가봤고 여기저기 아는 이들이 몇 있는 정도였고, 홍콩 아레나에서 일할 때 그곳에 마르코스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공헌한 친구들이 와 있곤 했다.

 

필리핀이 1988년 민주화되었을 때, 필리핀사람들이 이제 그렇게 주어진 민주주의를 갖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많은 논의를 했다. 필리핀인들은 많은 걸 이루었고 또 많은 다른 일들을 이루지 못했다. 하여간 지난 5월에 선거감시단원으로 필리핀 네그로스(Negros) 섬으로 파견되서 갔다. 네그로스 섬은 사탕수수마피아가 지배하는 지역이다.

 

흥미로운 것은 사실상 세계 전체가 설탕마피아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 국제정치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봐야 할 책이 있다, 필리핀은 미국과 연결되어 있는 설탕마피아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데, 버소(Verso)에서 나온 <바카디의 정치학(Politics of Bacardi)>이라는 책이 그것이다.

바카디는 설탕마피아 일부를 이루는 이태리 마피아인데, 미국 선거 당시 부시 진영에 돈을 댔다. 설탕 정치는 필리핀이 애초에 설탕 때문에 미국 식민지가 됐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된다.

 

스페인이 필리핀을 몇 백만 페소에 미국에 팔았는데, 스페인도 처음 필리핀을 정복한 목적은 사탕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사탕수수를 얻을 다른 식민지(라틴 아메리카, 카리비안 지역 등)가 많았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미국에 팔았다.

 

그렇게 미국에 팔렸을 때 필리핀인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자유를 원한다며 들고 일어났고, 말로로스 반란(Malolos Rebellion)이 일어났고, 아시아 역사상 가장 최초의 민주주의적 헌법이 생겨났다.

 

그러나 독립운동세력은 미국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되었고, 필리핀은 1900년 이후 미국 식민지가 되었다. 그러다가 2차대전을 겪고 나서 해방되었다. 한국과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필리핀도 미국 냉전정치의 산물이다.

네그로스섬은 비참하도록 가난한 지역이다. 나도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많은 가난한 이들을 봐왔지만 그렇게까지 심한 경우는 처음 봤다.

 

왜 그렇게 가난한가? 토지개혁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다. 하시엔다(Haciendas)라 불리는 대농장은 만에이커, 2만에이커에 달한다. 이런 대농장체제가 어떻게 발생했는가.

 

스페인 식민지주의자들이 와서 필리핀여성과 결혼했는데, 떠나면서 그 자손들에게 마음대로 토지를 잘라서 나눠주었다. 이런 식으로 필리핀의 대지주 코후앙코(Eduardo Cojuangco) 가문이 생겨났다. 마르코스 독재체제도 코후앙코가 돈을 댔고, 그가 쫒겨났을 때 그를 하와이 섬까지 비행기로 ‘모셔’간 이도 그였다,

 

산구니엘 맥주회사도 코후앙코家 것이다. 코후앙코는 민주주의 체제가 성립된 이후 호주에 거주하면서 굉장히 큰 말 목장을 갖고 있었는데, 전용비행기로 네그로스 섬에 날아왔다. 필리핀 정부는 ‘그가 드나든 기록이 없다’고 했다. 지긴 했지만 선거에도 참여했고, 하여간 이런 이들이 섬에 와서 토지 개혁에 결사반대했다. 이것이 대략이나마 네그로스 섬이 가진 배경이다.

필리핀 선거시스템의 원시성 - 자유공정선거 조건의 부재

우리는 농민단체 ‘농지개혁을 위한 태스크포스(Task Force for Agrarian Reform)’를 방문했다. 필리핀에서 농지개혁법이 실제로 이행되게 해서 원래 자신들 소유였던 농지를 되찾고자 싸우는 농민들이었다.

 

농지개혁은 중요하다. 한국, 대만 등에서 일어났고, 인도나 스리랑카, 방글라데시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농지개혁은 코후앙코 같은 대토지소유자들에 의해 저지당해왔다. 코라손 아키노 남편도 코후앙코 가문 출신으로, 그녀 자신도 몇 천 에이커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

 

하여간 토지개혁운동을 하는 단체를 방문하면서 하시엔다 농장에 가봤는데, 조그만 소녀를 보고 학교 가냐고 물으니 너무 멀어서 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주변 관련자가 말하길, 학교는 공립학교였는데도 대지주 소유지 안에 있어서 토지개혁을 외치는 농민들의 자녀들은 갈 수 없다고 했다. 공립학교였는데도 말이다!

 

나는 이건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기본적인 인권(아동교육권)의 침해라고 대답했다. 선거가 끝나고 인도로 돌아와 이에 관련해서 글을 쓰고 있는데, 바로 그 농장의 소유주가 하수인을 보내 총으로 농민 네 명을 살해했다는 기사가 <필리핀 인콰이어러(The Philippine Inquirer)>에 나왔다. 굉장히 심란했다.

하여간 이래저래 필리핀 선거에  대해 좀 비판적으로 긴 글을 썼다. 필리핀인 민주주의와 민주주의 활동가들에 대해, 오만에 빠지지 말라고 말이다. 내 비판의 요지는 필리핀의 선거제도가 아주 원시적이라는 것이었다, 인도 시사지 <프론트라인(Frontline)>을 보면 사진도 실려 있다.

 

얼마나 원시적인가 하면, 투표가 끝난 후 한 달이 지나서야 그 결과를 알 수 있다. 한 달 동안 집계를 하기 때문이다. 왜 한 달이나 걸리나? 그만큼 시스템이 원시적이기 때문이다. 만약 아레나가 필리핀에 있다면 아레나 사무실도 투표장이 될 것이다.

 

그런 자잘한 장소에서 투표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개봉해버린다. 백 명이 투표했으면 그 자리에서 누가 누구한테 표를 줬는지가 바로 드러난다. 이것은 민주주의 자유선거의 중요 원칙인 비밀투표 원칙에 대한 위반이다.

우리는 예비선거, 선거, 선거 이후 과정을 지켜봤다. 예비선거, 특히 토지개혁이 중요 관건이 되어 있는 지역은 테러 조건이 완벽하게 조성되어 있고, 그런 조건 속에서 사람들은 제대로 투표할 수 없다. 다른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탈당파, 신인민군 등에 세력에 의해 살해당하는 것도 봤다. 나는 어떤 종류의 무장투쟁도 반대한다. 총은 민주주의를 지킬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80년대부터 이걸 놓고 필리핀 친구들과 늘 얘기해왔다. 필리핀에 갔을 때 왜 필리핀 민주주의가 아직도 그토록 문제 속에 놓여있는가, 이유 중 하나가 필리핀인들이 군부 존재를 어느 정도 허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임을 알았다, 스리랑카에서처럼. 네그로스 섬에 갔을 때도 지하 공산주의 운동그룹이 있었고, 보통 사람들은 친정부 그룹과 이 지하그룹 사이에서 충성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충성이 의심되면 죽여 버렸다.

 

더하여 민주주의에 대한 이런 식의 의식 때문에 사람들은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사무장조직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갔을 때도 네그로스 경찰서장이 무장을 원하냐고 물어왔고 경찰 호위를 대주겠다고도 했지만 나는 거부했다.

 

불상사가 생기면 불행이겠지만 하여간 경찰호위를 받으면서 선거가 공정히 이루어지고 있는지 ‘관찰’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거기서는 시장, 선거 관련자들, 모두가 사적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필리핀 선거는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첫 번째로, 사람들이 자유롭게 공장하게 투표할 수 있는 열린 환경이 없었다. 극심한 가난, 부자들의 권력, 부자들의 사무장 조직과 이들의 폭력 등으로 인해. 예를 들어 시장에 출마한 피냐라는 인물이 있다.

 

도시 빈민지역에서 도시거주권 위해 싸우고 있는 집단에 대해 가짜 사건을 만들어서 선거 직전에 근 2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잡아 가둔 그런 인물이다. 경찰서 유치장이 꽉 차서 사람들을 더 잡아들일 수 없자 경찰까지 기소한 그런 인간이다, 변호사였는데, 알다시피 변호사들은 위험한 인간들이다.

 

우리가 방문한 또 다른 투표소 한 곳은 학교 안에 있었고, 그 학교는 피냐씨 사유지 안에 있었다. 피냐씨가 고용한 개인보안요원들도 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정규 필리핀군도 있었다! 대체 어느 쪽을 ‘보안’하기 위해 거기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러한 사례로 볼 때 투명하고 공정한 선거가 아니었다. 개표기간이 한 달이나 되기 때문에 그 사이에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했다. 인도, 방글라데시, 미국 할 것 없이 민주주의 국가라면 어디에서나 캔버싱(canvassing)을 한다.

 

선거 득표를 위한 운동을 지칭하는 말인데, 보통 선거 전에 행해지는 일이다. 오직 필리핀에서만 희안하게도 투표 후에 캔버싱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바로 개표를 캔버싱이라 부르고 있었다. 어쩌면 마르코스 시절부터 그런 식으로 선거 결과가 죄 조작되어 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지점에서 민주주의 활동가들을 향한 내 두 번째 비판이 제기된다.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기제(mechanics)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를 위한 어떤 투쟁도 쓰잘 데 없는 것이다. 어디에나 선거 기제가 있다. 선거위원회 등. 한국에도 있는데, 내가 보기엔 너무 엄격한 것 같다.

 

1995년 선거를 옆에서 봤었는데, 법이 너무 엄격해서 민주주의 축제가 제대로 벌어지지 못했다. 필리핀은 정반대이다. 필리핀 선관위는 혼란스럽고 규칙도 없다.

또 다른 사례. 예전 같으면 워키토키를 썼겠지만 요새는 핸드폰을 쓰니까 하여간 핸드폰으로 급히 연락을 받았다, 800명의 젊은이들이 투표를 못하도록 잡혀있다는 것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투표를 하게 된 젊디젊은 그런 이들이 투표를 한다는 일이 기쁜 일이 되어야 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미국 민주주의가 왜 그렇게 타락했는가?

 

선거가 너무 조작되고 평판이 나빠서 젊은이들이 더 이상 투표소에 나오질 않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부시는 두 번이나 선거결과를 ‘조작’해서 대통령이 된 사람이다. 흑인을 비롯해서 유색인종에게서 교묘하게 선거권을 박탈하는 미국 선거시스템 문제를 다룬 책이 이미 여럿 나와 있다.

 

미국, 유럽, 기타 많은 나라에서 젊은이들은 선거를 하지 않는다, 선거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정 반대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800여명에 달하는 젊은이들이 선거를 하고 싶어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왠고하니 지방법원에서 이들이 제 시간에 선거인 등록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거를 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이들은 그래서 가톨릭 단체에 호소했고, 이들은 고등법원에 제소했다. 고등법원은 이들에게 선거할 권리가 있다고 판정 내렸지만, 선거관리위원회는 다시 지방법원의 판결을 따랐다. 투표에서 배제된 이 800여명의 젊은이들이 이후 반정부활동에 나서게 됐다 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내가 농부일도 겸하다보니까 어딜 가든 화초라든가 씨앗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인도 내 농장으로 때로는 몰래 들여오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법이 까다로와서 못하지만. 네그로스에서도 한 유치원에 갔는데, 거기 여성이 화초를 팔았다.

 

투표하지 않았다고 하길래 왜 안했느냐고 물었더니, 선거인으로 등록은 했지만 지난 11월에 등록한 직후 관할선거행정사무소가  큰 비로 물에 잠겨서 선거명부가 다 사라졌기 때문에 투표할 수 없었다고 얘기했다. 이것이 현재 필리핀의 거버넌스 수준이다.

민주주의 불신, 쿠데타 경향성, 민주주의 약화라는 악순환

그 다음엔 마닐라에 갔다. 마닐라는 서울 같은 곳이다, 민주주의 활동이 가장 활발하고 지식인들도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도 무성하다. 내가 이 모든 넌센스가 대체 뭐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필리핀 민주주의는 더 이상 믿을 게 못된다고 대답했다.

 

그럼 미래는 어떻게 되는가. 많은 이들이 군부 쿠데타라고 대답했다. 필리핀의 가장 저명한 학자 도동 네멘조(Francisco Dodong Nemenzo)도 그렇게 대답한다, 필리핀 민주주의의 앞날은 군부 쿠데타라고. 왜? 베네주엘라의 차베스도 쿠데타를 여러번 계획했다.

 

나는 다시 차베스는 쿠로 정권 잡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그는 다시, 그렇긴 하지만 쿠를 계획하면서 비로소 그는 시스템을 어떻게 개혁할지를 알았노라고 답했다. 비극적인 일이다. 다행하게도 아레나 펠로우들은 같은 생각이 아니었다, 군부 쿠데타를 그런 식으로 보는 것은 무조건 미친 짓이라는 믿음을 내게 불어넣어준 아레나 펠로우들, 그 네트워크에 감사할 일이다.

쿠데타에 대한 이 모든 논의가 함의하는 바는 무엇인가. 쿠를 실행했다고 기소당한 두 명의 장교가 있다,  그 중에서도 34살 난 해병장교 안토니오 트릴라니스(Antonio F. Trillanes IV)라는 이는 감옥에 있는 동안 행정학과 석사로 등록해서 필리핀 해군 내 부패상에 관한 논문을 썼는데, 지금까지도 아주 훌륭한 논문으로 남아있다.

 

필리핀 탐사저널리즘센터(Philippine Center for Investigative Journalism) 웹싸이트에 들어가면 다 찾아볼 수 있다, 한번 찾아 읽어보기 바란다.1) 도동 메멘조 같은 이들이 독려해서 필리핀선거에 나왔고, 결국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링고 호나센이라는 마르코스를 물러나게 한 쿠에 끼었던 군인이 있는데, 쿠는 그 후에도 서너번 더 일어났지만, 이 사람도 선거에 나가서 압승을 거두었다, 2천5백만, 3천만이 넘는 사람들이 표를 던졌다. 무슨 의미인가? 사람들이 정부보다는 오히려 쿠데타 지도자들을 더 신뢰하고 있다는 것이다.  

2004~5년도에 한국에서는 대통령을 탄핵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엄청나게 많은 민중이 거리로 나와 이 움직임을 저지하고자 노력했다. 당시 나는 그런 운동이 한국 민주주의의 성격을 참 잘 드러내주는 사례라 생각했다.

 

똑같은 시각, 필리핀에서는 에스트라다(Joseph Ejercito Estrada)대통령이 의회의 탄핵을 받아 감옥에 갇히는 일이 벌어졌다. 필리핀 친구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는데, 내 주장은 에스트라다를 탄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탄핵 방식도 어떠했던가?

 

2천5백만 내지 3백만 이상의 민중이 선거를 통해서 그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헌데 마닐라에 사는 80만 가량의 중산층은 그들 싫어했다, 부패했다면서. 그가 안부패했었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따르지 않으면 안되는 민주주의 규범이 있다는 말이다.

 

민주주의는 길거리 권력을 뜻하지는 않는다. 길거리 권력이 힘 있을 때는 민주주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을 때이다. 한국인들은 오랜 민주화 투쟁을 통해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일단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서면(이건 부르주아적 관점이 절대 아닌데)민중은 거기에 맞는 특정 법적 행위를 수행해야만 한다.

 

어떤 이슈에 대해 단지 도덕적인 우월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권력자, 정부를 뒤집어엎을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 필리핀인들은 다시 어떻게 하면 아로요 정부를 뒤집어엎을까, 그걸 논의하고들 있다. 필리핀 선거 전체가 탄핵에 관한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민주주의의 아이러니가 여기에 있다. 민주주의를 믿지 않기 때문에 선거에 참여하지 않고, 활동가들은 더 오만해지고, 선거체제 자체에 대해 도덕적 우월성을 갖고 그걸 실제로 길거리 권력을 통해 행사하려고 하기 때문에 결국 탄핵, 쿠에 몰두할 수밖에 없고, 결국 민주주의는 더더욱 약화되는 것이다.

■ 주제 2. 태국 선거

태국의 경우를 보면 쿠는 어디서든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는 게 더 분명해진다. 작년 9월 1월에 평화와 갈등을 주제로 스리랑카에서 강의를 열고 있었는데, 내 오랜 스리랑카 친구 아길란 카딜카말이 있다. 그는 아레나 펠로우 중 한 사람 스리란 카딜카말의 아들이었다.

 

내가 사람에 대한 얘길 자주 하는 이유는 사람에 대한 얘기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얘기를 통해서 우리가 진정으로 겸손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1983년 내가 홍콩에 살고 있을 때 스리란과 아길란은 콜롬보를 떠나 일본으로 갔다.

 

그리고 그들이 떠난 바로 그날 밤 스리랑카에서는 아시아에서도 최악의 유혈충돌이 벌어졌다. 엄청난 수의 타밀인 등, 많은 이가 학살당했다. 아길란 가족은 돌아갈 수가 없어서 홍콩으로 왔고, 아레나가 (아레나가 그점에서는 매우 훌륭한 역할을 해냈다) 피난처를 제공했다.

 

아길란은 당시 9살에 불과했다. 그들은 이후 일본에서 오래 살았고, 아길란은 여느 타밀 젊은이나 마찬가지로 군사적인 성향을 지니게 되었고 타밀반군(LTTE, 타밀 호랑이)을 지지했다.

아버지 스리란은 비폭력주의자로서 내게 아들과 얘기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타밀반군 지지 행위에 대해 특별히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는 지금은 모든 형태의 군사적 갈등과 폭력에 반대하면서 스리랑카의 민주주의를 위해 열심히 투쟁하고 있다.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아길란에게 예전에 내가 제의했다, 아시아 나라를 다니면서 스리랑카 현실에 대해 얘기하면 어떻겠냐고. 한번은 출라롱콘 대학에 가서 강연했다. 많은 태국 지식인들이 왔다. 민주주의는 끊임없는 방문(constant visit: 문제지역으로의 방문, 현장에서의 탐문과 실사)을 요한다, 집안에 가만 앉아서는 얻어질 수 없는 것이다.

 

한 태국 여성지식인이 오만하게 말했다, 이건 아시아 다른 나라 얘기일 수는 있어도 태국 얘기일 수는 없다고. 그 회의가 지난 9월 6일이었다. 난 집으로 돌아갔고, 그리고 정확히 9월 19일, 태국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다.

세계화 과정 속의 민주주의들 - 금권선거와 부패정치

쿠데타가 왜 일어났는가? 발단은 총리가 된 사람이 돈을 써서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선거는 어차피 돈으로 하는 것이다. 부자만이 선거에 나갈 수 있고, 등등. 필리핀도 그렇고 인도도 그렇다. 돈도 있고 유명하기도 해야 한다. 탁신(Taksin Shinawatra)도 그러니 다른 이들이나 똑같은 방식을 써서 당선된 인물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그가 돈을 어떻게 벌었던가?

 

1997년 IMF 때 돈을 오히려 번 사람이다. 1992년 5월 사태 와중에 그는 텔레콤 사업,  핸드폰 생산으로 뛰어들었고, 인공위성을  2개나 쏘아올렸다. 국가도 아니었고 일개 회사였는데 말이다, 하여간 오늘날 태국 통신네트워크를 다 장악했다.

 

캄보디아 네트워크도 다 장악했다, ‘해피’라 불리는 탁신폰을 누구나가 쓰고 있다. 마닐라의 부자 엘리트들은 다 우아해서, 길거리에서 뒹굴던 아무나가 대통령이 되는 건 싫어한다. 대단한 우월주의적인 계층이고, 이건 활동가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대단히 오만한 족속들이다. 하여간 필리핀들은 영화산업을 통해서(영화배우 출신이었으니까) 권력자 자리에 오른 보통사람 에스트라다를 탐탁지 않아 했다. 그래서 쿠를 했고 버려버렸다. 탁신 역시 경찰 출신이었고, 부패관리와 결탁해서 돈을 많이 벌었고, 정권과 결탁하느니 아예 정권을 잡을 생각을 했다, 그래서 총리가 되었다.

이런 유의 지도자는 전형적으로 세계화 과정 속의 민주주의가 낳은 인물이다. 이 문제는 내 오랜 학문적 탐구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아레나도 평화니 군사주의니 이라크에 대하서는 많이 떠들지만 이런 실질적인, 좀 더 우리 현실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거의 얘기한 적이 없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세계화로 인해 온갖 변화를 겪고 있다. 가령 방글라데시의 내란상황에 대해. 왜? 세계 지도자들이 혼란을 중지시키고 질서를 정착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왜? 시장이 평화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는 식민주의의 본래적 조건이기도 하다. 식민주의자들은 식민지 시장의 평화와 질서를 우선적으로 생각했다.

 

사람들이 평화를 원해서가 아니라 시장이 평화를 원해서 평화가 있는 것이다. 한반도 통일도 마찬가지 차원을 갖고 있다. 태국의 탁신은 이태리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처럼 기업지도자가 일국의 총리가 되는 이 새로운 현상의 가장 좋은 예이다. 이들이 게임 룰 자체를 바꿨다, 자신들이 총리가 아니라 CEO라고 표명하면서.

 

태국은 따라서 국가라기보다는 일종의 주식회사처럼 움직인다. 탁신은 4천만 달러‘밖에’ 안했기 때문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사기도 했는데 그 순간부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주가는 2배 이상 뛰었다, 그는 현재 맨체스터 시티(축구클럽)를 소유하고 있다. 쿠는 왕을 비롯해서 태국 엘리트들의 작품이었다.

내가 바로 지난 일요일 태국에 있었는데, 선거가 또 한 번 있었다. 군부 쿠데타나 민주주의가 지금 얼마나 변화했는가 좋은 예가 있다. 버마 같은 경우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어도 그로인해 그와 관련 맺은 주변 나라, 가령 한국 같은 나라가 어떤 심각한 영향도 받지 않았다.

 

한국 항공기도 매일 다니고, 기업들도 여전히 일하고, 한국 민주주의가 버마 상황에는 관심도 없다는 것을  버마 군부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애초에 쿠가 났던 것이다, 방글라데시 쿠데타도 마찬가지 맥락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 군부는 자기들이 어떤 형태의 정부 아래 놓일 것인가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태국은 흥미로운 경우이다. 태국 군부는 자기들의 쿠가 세계화 아래 나온 것이다, 민주주의는 전지구적 문제이고, 시장을 위해 중요하다고 변명했다. 사실상 금융시장은 민주정부를 뒤집어엎을 수도 있다.

 

 한국에서도 거의 그럴 뻔 했고, 스웨덴에서도 스웨덴 정부를 ‘손봄’으로써 그렇게 한 적이 있다. 그래서 태국 군부 쿠 지도자들은 쿠를 벌였을 뿐만이 아니라 과도 입법회의를 구성했다. 내가 아는 한 유수한 태국 학자도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아무도 그와 얘기하려들지 않았다. 젊은 태국 기자이자 아레나 펠로우인 한 친구가 있는데, 그 역시 사태를 흑백논리로 판단하고 있었다.

 

내가 의원으로 선출된 그 양반과 만나고 있냐고 했더니 아니라고 했는데, 쿠 회의에 가담하고 있어 후배가 연장자에게 당연 표해야만 하는 존경을 표하기가 어렵다는 게 이유였다. 그래서 내가 직접 만나러갔다. 왜 군부 쿠 회의에 협력하고 있냐고 물으니, 거의 눈물 흘릴 정도로 어려워하면서 말하길, 군부가 세운 회의에 자기가 들어가 있다는 것을 자신도 다음날 신문기사를 본 친구가 전화로 알려주어 알았다는 것이다.

 

누가 뽑았는가? 왕이 뽑았다는 것인데, 왕의 결정에 반대하기가 태국에서는 무척 어렵다. 하여간 쿠 다음에 입법회의가 구성되었고 헌법 초안이 작성되었다. 얼마 전 선거는 바로 이 헌법초안에 대한 국민투표였다. 왜? 군부마저도 쿠에 민주주의적 참여라는 얼굴을 부여하기 원하고, 일정 형태의 통치정당성을 원하기 때문이다. 내가 앞에서 말한바 선거의 세 차원을 다시 상기해보라.

민주주의를 구성하고 유지시키는 기제들에 주목해야

결론적으로 민주주의는 선거에 관한 것은 아니지만 선거는 민주주의를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헌법적 메카니즘은 매우 중요하다. 이 측면에서 한국은 대단히 잘 해왔다, 한국인들은 국가인권위원회, 선거위원회 등을 만들어냈다.

 

다음으로는 길거리 민주주의는 물론 중요하지만, 민주주의가 길거리 민주주의로 ‘환원’될 수는 없다, 민주적 민중의 법 없는 행동을 뜻하기 때문이다. 사회운동가 이름으로 도덕적 원칙들을 내세우면서 제대로 일(function)할 수는 없다.

 

도덕적 원칙들은 민중 일반의 합의에 의해서 그것도 삶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생계, 빵, 임금, 등등)에 한해서 만들어져야하는 것이다. 태국, 필리핀, 아시아 전체의 민주주의의 미래는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민주주의의 기본이 확실히 존중되도록 만드는가에 달려있다. 우리가 못하면 세계화 소용돌이 속에서 전지구적 경제세력이 우리가 민주주의를 어떻게 경영해야하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치게 될 것이다.

김레베카

로렌스씨와 성공회대 MAINS(아시아시민사회석사과정)에 방문교수로 와있는 모히유딘 아마드씨.


■ 질의/토론

Q. 필리핀의 이번 선거에서 월든 벨로(Walden Bello)는 왜 떨어졌는가?

필리핀 정당비례대표제의 맹점

A. 중요한 질문이다, 필리핀 민주주의와 직결되는 문제에 대한 견해를 피력할 기회를 덕분에 얻었다. 선거에 대해 말했을 때 두 번 째 차원이 바로 정당을 통한 사회 계급과 그룹들의 사회통합이었다, 이는 민주주의의 사회안정화 측면이라고 했다. 정당은 매우 중요한 기제이다, 특히 활동가들은 이점을 직시해야 한다. 불행하게도 필리핀에는 아직 정당문화가 정착되지 않았다.

 

필리핀 선거시스템이 정당기제가 잘 작동 안되도록 하고 있다. 때문에 정당도 점점 협소화되고 있다. 필리핀 민주주의는 너무 지나친 엔지오정치 때문에 고통 받고 있다. 말하자면 엔지오들은 자신들이 선하다고 생각하고 자신들의 행위를 선한, 이타적인 행위로 판단한다.

 

나는 농부고 또 환경경제학자이기 때문에 좋은 일들은 이기주의(self-interest)로 인해 일어난다는 것을 거의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자연은 이타주의로 인해 바뀌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자기 이해를 위한 이기적인 행위를 통해서만 바뀔 것이다.

필리핀인들은 헌법을 쓸 때, 그 안에 이런저런 많은 이타적인 생각을 집어넣었다. 그 중 하나가 필리핀 시민사회 대표자들이 적어도 의회 의석의 25%를 점유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이걸 썼을 때 이들은 시민사회만 생각했지 정당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월든 벨로의 악바얀(Akbayan, Citizen's Action)당을 비롯해서 모든 정당이 정당명부비례대표제(party list system)로 갔다. 정당비례대표제가 뭔가. 600만표를 받으면 3석 얻고, 최소 200만표를 얻으면 1석을 얻고, 등등이다.

 

그러나 필리핀 선거제도는 기본적인 산술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엉망이었다. 법에 의하면 의석의 25%는 시민사회단체를 위한 것이었고, 270석이 의석이라면 그 25%는 약 60석이다.2)

이건 이상한 제도였다. 많은 이에게 내가 물었다, 만약 270석의 25%가 60석이라면 그 60석은 시민사회대표에 있으니까 그 바깥 후보는 200여명만 나와야할 것 아닌가, 왜 270명이 다 후보로 나오나. 그들이 하는 말이 정당비례대표제라 그런다는 것이다.

 

270석은 처음부터 정해진 의석이고, 선거가 끝나면 최대 40석이 시민사회에 돌아가도록 했다. 그러니까 법이 정한 25%는 ‘대략’ 25%라는 말이었다. 40석민이 비례대표제 시민사회에 돌아갔다. 그럼 230석이 남는데, 여전히 후보는 270명이다.

 

최후까지 살아남는 사람은 어쨌거나 230명일 것이다, 40명은 시민사회에서 오고. 이론적으로는 월든 벨로의 정당이 3석을 얻게 되어있었기에 세 후보가 나왔고, 세 번째 후보가 월든 벨로였다.

그러나 필리핀 선거시스템의 엉터리 산술에 의해 3백만 표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당은 한 두석밖에 못얻었고, 결과적으로 월든 벨로는 당선되지 못했다.3) 나는 지금 악바얀 당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번에 옵저버로 그곳에 간 것도 부분적으로는 악바얀 때문이다.

 

TNI(Transnational Institute)가 불러서 갔는데, 악바얀 당의 월든 벨로도 TNI 회원이다. 헌데 선거 당일날 벨로는 필리핀에 안있고 상하이에 있었다, 난 그것만큼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악바얀 공동창립자이기도 한 내 친구 조엔에게도 늘 말한다. 표를 못얻겠다 생각되더라도 정당비례대표제로 가진 말라고, 민주주의의 근저를 붕괴시키는 기제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정당이 선거과정에 개입하는 것을 봉쇄하는 것을 통해서. 정당을 가져야만 한다. 세계화 아래의 민주주의는 어떻게든 정당을 피해가려고 한다. 방글라데시에서도, 스리랑카에서도 그랬다. 태국에서도 새 헌법은 정당이 너무 커지지 않도록 묶어두고 있다, 다수 정당은 불가능하고 오로지 연합정당만이 가능하도록. 월든 벨로의 당은 바로 이런 시스템으로 인해 패배한 것이다.

Q. 필리핀의 아레나 펠로우들이 ‘군부 쿠데타에 대한 그런(좋게 보는) 논의는 다 미친 짓’이라 말한 이유가 뭔가.  

민주주의 이후의 거버넌스는 국민 다수의 결의가 있어야

A. 그런 논의들이 전부 쿠데타를 무슨 민주적인 과정쯤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인민에게 좋은 일을 하면 어떤 종류의 정부나 괜찮다는 생각은 틀린 생각이다. 어떤 종류의 인민이 어떤 형태의 정부를 통해 좋은 대우를 받게될 것이냐가 문제이다.

 

굉장히 좋은 사람이 한국 대통령이 돼서 민주적으로 여성을 위해 이런저런 좋은 정책도 펼치고 성공회대에도 기부를 많이 하고, 등등 좋은 일을 할 것이라 치자, 헌데 그 사람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치자. 용인할 수 있겠는가? 민주주의의 세 차원이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민주주의 체제는 인민의 컨센서스, 사회연합체의 컨센서스, 국민 다수의 결의에 의해 그 자리에 들어서야 한다. 아니면 거버넌스 자체가 불가능하다.

 

왜? 태국에서처럼 어느날 우익이 들고 일어나서 이 좌파 대통령을 밀어내려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레나 펠로우 에드 타뎀이 얘기한 것처럼 어떤 방식으로든 하여간 좋은 정부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다. 간디도 이에 대해 많이 언급했지만, 방식 역시 목적이나 똑같이 중요한 것이다.  

민주주의와 사회보장은 같은 것

Q. 민주주의 질서는 시장이 평화를 원하기 때문이라는 표현이 특히 맘에 든다. 방글라데시는 1971년 이후 계속 사정이 좋았다 나빴다 하고 있는데, 결국 밑바닥 민중 생계가 나아지는 데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민주주의가 사회보장제와 함께 민중 삶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메카니즘에 대해 묻고 싶다.

A. 민주주의를 민중 생계를 보장하는 사회보장과 따로 떼어내서 사고할 수는 없다. 사회보장은 민주주의를 돌봤을 때만이 주어진다. 아시아 국가들의 경험이 그걸 말해준다. 방글라데시 경우, 종교근본주의자들의 활동이 왜 그렇게 활발해졌나?

 

민주주의가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떻게 일하나? 민주주의적 규범과 틀 바깥에서, 길거리에서 일한다. 근본주의자들은 민주적 틀도, 논의도 싫어한다.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이들을 자꾸 떼어내서 고립시킴으로써 약화시켜야 한다. 인도는 이점에서 조금 나은데, 여전히 민주주의의 제도적 틀을 강하게 신뢰하고 있다. 물론 최근 하이데라바드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하는 등 문제는 여전히 있다.

방글라데시의 문제: 민주주의 제도 바깥에서 일하는 엔지오들

방글라데시의 문제는 민주주의가 엔지오들을 통해 기능한다는 것이다. 엔지오들은 민주주의는 아니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견해들은 갖고 있다. 이들은 민주적인 방식으로가 아니라 군주처럼 그들 조직을 운영한다.

 

90년대 말에 UNDP가 그라민 은행(Grameen Bank)에 관해 비밀 연구를 수행한 바가 있는데, 아무래도 작년 노벨평화상은 잘못 돌아간 것 같다. 거기서는 사설 감옥까지 운영한다, 여성들이 돈을 못갚으면 집안에다 일주일씩 가둬놓는다! 이건 분명 비민주적인 테러 행위이다. 방글라데시인들은 이 양반이 워낙 큰 양반이라 뭐라 비판하지도 못한다. 방글라데시는 바로 그런 문화를 바꿔야 한다, 엔지오들이 민주주의 틀 바깥에서 일하는 문화 말이다.

인도에서는 다행히도 엔지오들이 민주주의의 큰 문제에 직접 뛰어들지 못하게 강한 통제 아래 있다. 예를 들어 ‘외국원조규제법(Foreign Contribution Regulation Act)’이 있는데, 이걸 너무 엄격하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꽤 있다. 난 글쎄, 그럴까?

 

일부는 훌륭하다. 그런 게 없다면 우린 엔지오가 거의 모든 일에 감놔라배추놔라 하는 걸 보게될 테니까. 필리핀의 경우는, 내가 글에도 썼지만, 사람들이 핸드폰과 텍스팅(문자메시지 보내기)으로 정부를 뒤집어엎는 나라에서는 똑같은 방식으로 정부를 제 자리에 올려놓지 못할 것이다. 핸드폰을 보통 누가 갖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라, 분명 가난한 이들은 아니다.

방글라데시 문제 또한 엔지오와 관련되어 있다, 물론 방글라데시는 엔지오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1971년 전쟁 이후 파키스탄군에 의해 사회기간은 철저히 파괴되었고 엔지오들의 구호가 사회생활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브락(BRAC, 방글라데시농촌진흥위원회), 프로쉬카(Proshika), 그라민 은행 등, 전부 구호로 자리잡은 엔지오들이다. BRAC 회장은 방글라데시의 대통령, 수상보다 훨씬 더 부자다. 지난번 방문했을 때 이들의 빌딩은 프로쉬카는 22층, 브락은 24층에 달했다. 이들은 대학도, 시장도 경영한다.

 

나는 차라리 성공회대나 아레나가 대학을 경영했으면 한다, 시민사회에는 시민사회만이 점유해야하는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지식으로 교회나 노조는 시민사회이다. 엔지오들은 시민사회가 아니다. 이들은 현대적 창조물(modern creatures)이고, 앞으로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Q. 민주주의라는 제도, 선거 제도 등등의 중요성을 많이 보고 잘 알고 있어 강조한 듯한데, 난 길거리 민주주의 경우도 많이 알고 있다.

운동은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내용을 강화하는 데 바쳐져야

A. 그래서 시민사회의 역할을 역으로 강조한 것이다. 민주주의는 선거만이 아니고  선거와 선거 사이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시민사회와 엔지오의 역할이기도 하다. 엔지오의 역할은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내용을 강화하는 데 있다, 임금보장 같은 문제들에 말이다.

 

요즘 누가 노동 문제를 제기하나, 아무도 없다, 아마 한국은 노동운동이 아직 강하니까 아닐지 모르지만. 노동자들의 자유결사, 집회자유 같은 것, 우리는 계속 제기하고 강화해야 한다. 인권이 무엇인가, 인권은 여러 가지 인권들의 연쇄(아동권, 여성권, 등등)이다. 인권은 서구적 의미에서의 시민권만이 아니라 정치권, 경제권, 문화권 등등 여러 가지 권리를 말한다.

 

실질적 권리는 바로 그런 범주 안에 있다. 우리는 끔찍한 폭력사태를 우리는 그동안 많이 보아왔다, 아삼(Assam) 주에서 벌어진 일처럼. 그런 문제를 무장그룹을 통해 풀 수는 없다. 민중의 권리가 길거리 민주주의를 통해서는 보장될 수 없다면, 이는 다시 우리 같은 지식인들의 문제이다. 우리가 그만큼 그동안 실질적 민주주의에 대해 주의를 덜 기울여왔기 때문이다.

Q. 때로는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A. 그래서 네그로스 섬 일을 얘기한 것이다. 내 요지는 민주주의의 조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가 가능한 조건 자체의 부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마니푸르(Manipur), 인도 동북부 전체가 단단히 무장되어 있다.

 

카슈미르(Kashmir)에는 이라크에 가있는 미군보다 더 많은 수의 군사가 있다. 그러나 지식인들은 이런 점들은 거의 전혀 얘기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실제로 선거장에 가지조차 못한다면, 그 조건 자체부터 변화시켜야 한다.

Q. 나도 도동 네멘조 등을 만난 적이 있는데, 지식인들은 민주주의의 역할에 대해서 회의하고 있는 듯하고, 그래선지 ‘좋은, 진보적인’ 군대라든가 군부 쿠데타를 믿는 듯하다. 이런 경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민주주의는 사회의 진보적 등록에 관한 것

A.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네멘조 같은 경우는 난 민주주의를 안믿으니 쿠를 지지하겠다, 정확이 이렇지는 않더라도 대충 이런 것 같고 태국의 내 다른 친구는 쿠 정부이긴 하지만 우리 중 일부는 어쨌거나 개입하긴 해야한다, 도덕적 태도는 버려야한다고 믿는 듯하다.

 

그에게도 동정이 가는 것이, 우리는 도덕적 우월주의자가 될 특권이 없다. 내게는 그럴 권리도, 가능성도 없다. 나 역시 일정 개입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한다, 아예 손 놓아버리고 도덕적 태도만 취하고 있을 ‘사치스런 여유’가 우리에겐 없다는 말이다, 어차피 그 상황 속에 이미 들어가 있는 이상 말이다. 의도가 좋은 쿠가 많았어도, 박정희 경우가 잘 보여주듯이 오래 좋게 갈 수는 없다.

 

다행히 민주화 운동이 그 ‘살해의 정치학’을 멈추게 했다. 필리핀에서는 상황이 더 악화되고 있다, 네트워크를 운용할 기술을 가진 계급만 계속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살아있는 것으로 만드는 일은 아직 길고도 험한 길이다.

 

필리핀 민주주의 활동가들은 또한  토지개혁 같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들을 잊고 있다. 민주주의는 선거만이 아니라 일련의 진보적인 등록(registration)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빈민을 위한 법이 필요하고, 사회보장도 필요하고, 경제적 평등도 필요하고, 토지개혁도 있어야하고, 인종 민족적 평등도 있어야 하고, 등등. 스리랑카에서는 싱할리(Sinhalese)가 다수라 권력을 잡고 있는데, 그렇다고 소수를 돌보지 않으면 안된다.

 

민주주의는 소수에 관한 것이다, 다수에 관한 것이 아니다. 다수는 다수로서 선출한 정부가 정당성을 갖고 소수를 위해 일하도록 할 뿐이다. 필리핀인들도 마찬가지 사고가 필요하다. 다수 정부가 소수를 돌보도록 만들어야지, 다수 정부가 소수를 안돌본다고 툭하면 소수가 쿠로 다수 정권을 뒤집어엎는다? 1980년에도, 탄핵 와중에도 마찬가지 논전을 벌였다. 나는 여전히 아니라고 보고, 여전히 무장투쟁에 반대한다.      

Q. 동티모르의 경우, 독립이후에도 상황이 여전히 좋지 않은데, 그래서 민주주의 이후에도 평화, 문화다양성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평화는 민주적 거버넌스가 있어야

A. 평화나 문화다양성만 얘기해서는 안된다. 인도는 다양성이 힘이라는 걸 역사를 통해 배웠다. 근대 국가 담론은 서구 국가 담론, 적을 만들어내야 하는 담론에 너무 많은 영향을 받았다. 문화, 인종다양성 담론도 마찬가지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우리와 ‘같지 않은’ 집단은 무조건 적대시한다.

 

인도네시아도 받아들이질 못했다. 그래서 동티모르의 길고긴 비극이 시작되었다. 두 다른 군사집단, 기독교인들과 무슬림들, 이런 집단들이 서로 간에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해 지금도 서로를 죽이고 있다. 인도네시아와의 오랜 전쟁으로 이미 현재 인구 80만에 달하는 인구가 살해당했는데도 말이다.

 

이런 식의 유혈사태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유일한 안전보장은 민주주의뿐이다. 민주주의를 통해서만이 스리랑카도 지금의 질곡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타밀 타이거도 같은 민족에게 엄청난 고통을 가하는 끔찍한 족속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또한 지방 거버넌스도 있어야 한다. 동티모르는 지방 정부가 없다. 필리핀도 지방정치 기반이 약하다, 국가지출 60% 이상이 마닐라에 집중되어있다. 방글라데시도 마찬가지다. 실질적 민주주의는 지방민주주의, 탈집중화이기도 하다. 태국도 마찬가지이다.

 

동북부 사람들 거의 전부가 지난 국민투표에 불참했다, 왜? 제일 가난한 지역이기 때문에. 그들은 탁신이 자신들을 위해 뭔가를 해줄 것이라 믿었고, 그래서 지지했었기 때문이다. 최근 UNDP 보고서를 보면 태국은 1980년이나 지금이나 별로 변한 것이 없다.

 

물론 전체 GDP는 늘었지만, 소득불균형은 더 심해졌다. 네멘조 같은 이들에게 내가 묻고 싶은 게 이것이다, 이 소득불균형은 어떻게 할 것이냐고. 쿠가 그걸 처리할 수 없다면 쿠를 지지하는 게 무슨 소용이냐고. 선거를 통해 동티모르 정부가 세워질 무렵 유엔 사람을 비롯해서 하여간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이 거기 가있었다.

 

그러나 정부가 세워진 다음엔 누구도 동티모르에 대해 더 이상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한국만 해도 가령 유네스코 아태국제이해교육원 같은 곳에 동티모르에 관한 프로그램을 만들라고, 사람 좀 보내라고 끊임없이 건의했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와 더 큰 문제가 계속 생기고 있다고 그들을 손가락질 할 수 있겠는가.  

■ 마무리 발언

왜 한국의 민주주의가 중요한가? 아시아 다른 나라를 위해서만 중요한 게 아니라 한국이 다른 민주주의들과 같이 하려면(to engage with) 중요하다. 한국이 가령 버마, 스리랑카, 동티모르 같은 ‘잊혀진’ 나라들과 같이 가려면 말이다. 이들 잊혀진 나라들을 한국 활동가들은 앞으로 반드시 그들 어젠다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

<주>

1) http://www.pcij.org/HotSeat/trillanes.html (영문) 참조.

2) 정당비례대표(Party List Representative)의 의석배분 방식은 정당비례대표에 투표한 전국의 모든 표들을 집계하여 각 그룹별로 획득한 득표비율(집계된 전체수의 몇 %)을 확정한다. 이후 각 그룹별로 순위를 정하고 매 2%의 득표율마다 1석을 배정한다. 즉 진입장벽(threshold)은 정당비례대표 전체표의 2%에 해당하며 각 그룹마다 최대 획득할 수 있는 의석수는 3석으로 한정한다. 필리핀의 정당비례대표제는 기존의 정당은 물론 각종의 사회단체들이 참여하여 경쟁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진 비례대표제와는 거리가 있다.― 김동엽, 「필리핀 선거제도의 내용과 평가: 민주주의 공고화의 관점에서」,『동남아시아연구 15권 2호(2005)』.

3) 필리핀에서 지난달 14일 실시된 중간선거는 역대 최악의 폭력·부정선거로 얼룩졌다. 이번 중간선거 과정에서 전국적으로 숨진 사람은 후보자를 포함해 130명이 넘는다. 부정선거 여부를 감시했던 아시아 자유선거네트워크(ANFE)는 9개 도시에서 협박과 공갈로 선거가 연기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고 밝혔다. 가톨릭 공명선거감시위원회는 이날 남부 2개 주에서 가명으로 된 투표지 4만5000여장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AP통신에 따르면 지난달 26일에도 필리핀 남부에서 폭력사태가 벌어져 선거 개표가 중단되는 일이 벌어졌다. 주민 대부분이 무슬림인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 섬의 라나오델수르주 13개 마을에서는 폭력 위협 때문에 개표가 중단됐다. 전국적으로 실시된 상·하원 의원 선거는 개표가 끝나지 않은 상황이어서 추가적인 폭력사태가 발생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필리핀의 중간선거는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 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 성격을 띤다. 출구조사에 따르면 상원 선거에서는 야당이 다수당을 유지하고, 하원에서는 아로요 대통령의 여당연합이 다수당을 유지할 것으로 분석됐다. 지난 2년 새 아로요 대통령 탄핵안이 2차례 발의됐지만 친아로요 세력이 장악한 하원에서 부결된 터라 이번 선거로 필리핀 정계에 지각변동이 일어나지는 않을 전망이다.―이보연 기자, 『세계일보』, 2007년 6월 4일자.

로렌스 수렌드라의 필리핀 선거 보고서(영문):  http://cpcabrisbane.org/Kasama/2007/V21n2/IOM-RotInTheSystem.htm

미군의 선거개입에 대한 악바얀당의 항의(영문): http://www.akbayan.org/index.php?option=com_content&task=view&id=20&Itemid=1

 

김레베카 민주주의와사회운동연구소 연구원

 

사업자 정보 표시
시민사회신문 | 설동본 | (121-865) 서울 마포구 연남동 240-6 504호 | 사업자 등록번호 : 105-20-38740 | TEL : 02-3143-4161 | Mail : ingopress@ingopress.com | 통신판매신고번호 : 서울아02638호 | 사이버몰의 이용약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