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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지구촌

차별과 헤어짐 '굴레'를 벗고싶다

피스&그린보트에서 만난 사람들[2]-‘사할린 잔류 한인동포들’

 

영주 귀국은 이산가족이 되는 길
사할린. 동토의 땅에서 기회의 땅으로

요란한 축제로 시작된 21세기도 7년이나 지난 지금. 우리에게 20세기는 무엇인가? 20세기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으며, 어떻게 정리해 왔는가? 지난 역사를 단순한 과거로 규정하고 켜켜이 쌓인 먼지를 털듯 일제히 지워버리려 한건 아니었는지 되짚어 볼 때이다. 사할린은 그 고통의 상징이며 외면으로 일관한 우리들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2007피스&그린보트 참가자 일행은 사할린동포들의 아픈 어제의 역사와 희망찬 내일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박해룡(69세) 사할린한인회장과 정순희(69세) 귀국동포를 만났다 /편집자


#1.사할린 한인회장과의 만남

-사할린동포사회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부탁한다.
△사할린동포사회의 구성은 역사적으로 크게 두 단계로 분류된다. 하나는 일제침략 후 1905년 1939년까지로 일제의 탄압과 가난을 피해 건너온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1939년 이후 전쟁 기간 중 강제로 끌려온 징용자들이다. 1939년 이전에 넘어 온 사람의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강제징용 등으로 끌려온 한인의 수는 약 15만 명 정도였다. 이들은 고국에 있는 가족과 떨어진 채 주로 탄광, 벌목, 도로 건설 현장 등지에서 중노동에 시달렸다. 특히 태평양전쟁 중에는 이중강제징용자들도 생겼다. 3천여 명이 사할린에서 다시 일본의 큐슈지역으로 강제징용 됐는데, 부족한 전쟁 물자를 대기 위해 이들은 폭탄이 떨어지는 곳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일 해야 했다. 그들은 대부분 해방 후 사할린이나 고국에 있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산가족이 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들을 위해 2007년 7월 이곳 사할린 한인문화센터 앞에 ‘이중징용 광부 피해자비’를 만들었다. 사할린 한인들은 종전 후 일부는 육로를 통해 탈출하고 일부는 송환선을 통해 귀국했다. 지금 현재 잔류한인동포는 약 4만 명 정도다.

-종전 후 왜 사할린을 떠나지 못했나.
△일본은 패전 후 46년부터 49년까지 사할린에 거주하고 있던 자국민 30만 명 이상을 귀국시켰다. 그러나 조선인의 귀국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았다. 사할린 억류자 인양에 관한 ‘미소 잠정협정’에 따른 것이었는데 귀환대상을 일본인으로 한정했기 때문이었다. 일례로 귀국선이 들어왔을 때 부둣가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일본인들을 먼저 승선시키고 조선인은 나중에 보내주겠다고 약속하고는 조선인만 남겨 놓은 채 떠나버렸다. 당시 조선인들도 일본이름으로 개명한 상황이어서 서류상으로는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분하기 어려웠으나 항구에 스파이가 있었다. 그들은 조선 사람인지 묻고 다녔고 조선인이라고 대답하면 따로 체크해 승선을 못하게 했다.

수완 있는 사람들은 육로로 탈출하거나 일본인으로 행세 해 넘어 갔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남게 된 것이다. 49년까지 사할린에 남은 조선인은 약 4만 5천명이었다. 이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일본인도, 조선인도 아닌 무국적자가 되어 더욱 고향땅으로 돌아가기 어려워졌다.

-이에 대한 일본정부의 입장은 무엇인가.
△우리는 일본정부에 의해 강제로 끌려와 일본인으로 살게끔 강요당했다. 그러나 송환에는 일본인과 조선인을 구분하여 조선인에 대해서는 책임을 회피했다. 따라서 잔류한인에 대해 당연히 일본정부가 책임져야 한다. 이에 사할린잔류한인에 대한 일본정부의 책임을 물으며 정부차원의 사과와 물질적 배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인도적 차원의 잘못은 시인하면서도 정부차원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사할린한인동포에 대한 지원도 극히 일부만 하고 있는데 주택 500채 제공, 1세대한인(45년 이전 출생자) 모국방문비 지원, 사할린한인문화센터 건립 지원이 전부다.

-일본정부에 구체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우리는 귀국하지 못하는 1세대를 위한 일본정부의 지원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첫째 고령의 1세대들에 대한 생활비(매월 300달러) 지원. 둘째 사할린 한인의 주거환경(1,000채) 개선, 사할린거주동포의 모국방문 지원(1년에 1회, 총 3회로 제한) 확대이다. 아울러 2, 3세대 문제도 일본정부가 책임져야 한다. 해방 직후 동포들을 모두 귀국시켰으면 2, 3세대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2, 3세대 문제는 근본적으로 일본정부에 책임이 있다.

-영주귀국의 길이 열렸으나 귀국하지 않고 사할린에 남겠다는 동포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한일 양국 정부는 동포 1세대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영주귀국도 1세대에 국한해 추진하고 있는데 아들, 손자들과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결론이다. 또 다시 이산가족이 되는 것이다. 영주귀국이 곧 이산가족이 되는 현실에서 1세대의 한국행 결심은 쉽지 않다. 한국정부는 영주귀국에 대한 제한을 풀고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

7월 24일 유즈노 사할린스크 주재 일본영사관 앞에서는 사할린 한인 동포의 지원에 대한 일본정부의 책임있는 자세를 촉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마지막으로 한국에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전후 참담한 상황 속에서도 한인 부모들은 사할린 곳곳에 조선인학교를 만들어 자녀교육에 헌신했다. 높은 지식수준을 갖는 것만이 한인들의 어려운 처지를 개선할 수 있는 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 때 구소련에서 차별받고 무시당했지만, 지금 러시아인들은 우리를 부러워한다. 비록 전체인구의 6% 밖에 안 되지만, 사할린 부자 상위 5%가 거의 한인이다. 많은 러시아인들이 실직과 알콜 중독으로 거리를 배회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한인들은 자리 잡았다. 770만 해외동포처럼 우리도 여기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으며 현지에서 대접받고 있다. 앞으로 다른 해외동포를 대하는 것처럼 사할린동포를 바라보는 시각이 개선되길 희망한다.

□ 박해룡 한인회장은 공산당원으로 30여 년간 활동을 했으며, 사할린 주정부 국장을 역임하였다. 구소련시절 조국이 없는 민족이 받는 사회적 차별과 억압에 분개해 사할린거주한인들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한 공동체 활동을 하고 있으며 세계한상대회 사할린 대표이기도하다.

#2. 정순희 사할린귀국동포와의 대화

사할린에 살고 있는 동포들의 실제 생활모습이 보고 싶었다. 피스&그린보트 일행은 사할린에서도 가장 번화한 유지노사할린스크에서 차로 10여분을 달려 자그마한 텃밭이 있는 목조 주택에 도착했다. 정순희(69세)할머니의 집이다. 몇 해 전 영주귀국 하기 전까지만 해도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살았다 한다. 곳곳에 칠이 벗겨지기는 했지만 단정하게 가꾸어진 집 안으로 들어가니 낯익은 제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에서 직접 가지고 왔다는 주방기기에서부터 가전제품까지. 생각을 되짚어보니 영주귀국하신 분 댁이었다. 이곳에서 정순희 귀국동포와 사할린한인동포들을 만났다.

-언제 영주귀국 했나, 한국에서의 생활은 어떤가.
△연로하신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2001년 어머니와 함께 영주귀국 했다. 한국 정부에서 마련해준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몇 해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지금은 혼자다. 정부에서 생활비를 지원해줘 생계에는 큰 걱정이 없지만 저녁때만 되면 사할린 생각이 부쩍 나고 마음이 아프다. 여동생과 아들 둘, 손자 둘이 사할린에 있다.

-사할린에 있는 가족들은 자주 만나나.
△일년에 한번 정도 와 만난다. 사할린 겨울이 춥고 길기 때문에 여름에 오는데 한번 오면 3개월씩 있을 수 있다. 지금은 비자만 받으면 마음껏 오갈 수 있지만 비행기 값이 비싸(약 85만원)자주 오지는 못한다. 일본 정부에서 일년에 한번 총 3회까지 지원하고 있다.

-처음 사할린엔 어떻게 오게 됐나.
△진주에서 태어나 7살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지금도 그 마을 기억이 생생하고 친척도 많이 있다. 7살 때 아버지가 사할린에 강제징용으로 끌려왔는데 어머니가 아버지 면회 온 것처럼 하고는 빼돌려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그게 잘 못돼 모두 이곳에 남게 됐다. 나는 그때 어머니와 함께 이곳에 왔으며 오빠는 마산 친척집에 맡겨졌다.

-댁에 한국 제품들이 많이 있는데.
△러시아에 올 때마다 하나 둘 사온 것들이다. 여기에서 구할 수 없는 물건도 있고 같은 제품이라도 한국산이 품질이 좋아 인기가 많다.

-사할린의 요즘 경기는 어떤가.
△사할린 경제가 좋아진다고들 하지만 직장 구하기 힘들다. 한 30% 정도만 잘살게 됐고 70%는 못살게 됐다는 말도 있다. 많은 공장들이 문을 닫았고 직장 없는 러시아 사람들이 대낮부터 술 마시고 돌아다닌다. 90년대 초반까지는 정부에서 병들면 무료로 치료해주고, 집도 줬는데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50(남자 55세)세가 넘고 20년(남자 25년) 이상 일한 사람들은 한국 돈으로 15만원 정도 연금을 주는데 지금은 물가가 올라 그 돈으로 생활하기 어렵다. 집을 사고파는 게 자유로워지면서 집을 여러 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집 팔아 술 먹고 길거리에서 사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도 한인들은 어려서부터 공부도 많이 시키고 생활 능력도 있어 낳은 편이다.

-한인들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인식은 어떤가. 차별이 있는가.
△올림픽 전까지만 해도 차별이 심했다. 한인들이 버스에 많이 타면 욕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 짐작처럼 취급받는 경우도 있었다. 가까운 곳에 바다가 있지만 마음 놓고 가지 못했다. 아파트를 줄때에도 한인들에게는 1층이나 5층을 줬다.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어 시끄럽고 엘리베이터가 없어 다니기 불편했기 때문이다. 북한이 못살았기 때문에 받은 차별이었다. 당시엔 한러 수교가 안 되었기 때문에 러시아인들이 한국을 몰랐다. 그러다가 올림픽 이후 러시아 사람들이 한국에 갔다 오고 나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지금은 러시아 사람들이 한인들을 부러워하고 한국드라마도 많이 보고 있다.

-러시아인의 생활이 궁금하다. 여기도 아파트가 인기 있나.
△젊은 사람들은 아파트를 좋아한다. 여기 아파트는 한국과 달리 대부분 5층짜리 건물이다. 편하다고들 하는데, 인천에 살고 있는 집에 비하면 그렇지도 않다. 지금 큰아들 내외가 살고 있는 이 집은 80년대에 지었는데 좀 낡기는 했어도 나이가 들어 그런지 이런 집이 좋다. 텃밭도 있고 문 열고 나가면 이웃들도 만날 수 있고, 아파트는 답답하다.

-한국드라마가 인기 있다고 하는데 어떤 드라마를 좋아하나.
△천국의 계단, 호텔리어를 제일 좋아한다. 한인들뿐 아니라 러시아인들도 한국 드라마를 아주 좋아하는데 겨울연가, 가을동화 같은 건 러시아어로 번역돼 TV에서 방영됐다. 얼마 전 장밋빛인생을 보면서 엄청 울었다.

-여행은 많이 다녔나.
△예전(90년 이전)엔 많이 다녔다. 그땐 일년에 한번 한 달간 여행 할 수 있었다. 이년 동안 모아 두 달간 여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비행기티켓이 국가에서 공짜로 나와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 같은 곳에 갔었다. 이태리, 일본, 북한도 다녀왔다.

-사할린에서 인기 있는 신랑감은.
△의사나 변호사는 인기 없다. 한국과 사정이 다르다. 사업 하는 사람들이 제일 인기 있고 공무원이나 큰 회사 다니는 사람도 일등 신랑감이다. 20대 중반쯤 결혼을 많이 하는데 철없는 애들은 일찍 결혼하고 헤어지기도 잘 한다. 내 작은아들 같은 경우 서른이 넘도록 장가도 못가고 있다.

-거리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보면 동양인이 많다. 한인들인가.
△중국 사람들하고 북한 사람들이 많다. 먹고 자는 것까지 다 포함해도 인건비가 싸기 때문에 특히 북한 사람들을 많이 고용한다. 대부분 보도블록 교체하는 일이나 막노동이다. 러시아 사람들은 막일을 잘 안하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일본에 의해 강제로 끌려와 고생만 하다가 여기 남게 됐다. 일본은 가족 중 한명이라도 일본인이면 가족 전체를 일본으로 데리고 가 집도 주고 직장도 주고 정착지원금도 준다. 한국은 1세대만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어있다. 우리는 다시는 이산가족이 되기 싫다. 이런 것들이 고쳐지기를 바란다.

※9명이 한 팀이 되어 사할린 한인동포 댁을 방문했다. 이 팀에 유일한 일본인이 동행했는데, 대화 초기 그는 사할린한인에 대해 왜 일본정부가 배상을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과거 한일간 아픈 역사를 배우지 못한 탓이었다. 대화가 진행되고 사할린한인이 겪었던 아픔을 들으며 그는 진심으로 아파했고 마음을 다해 사과했다. 이것이 개인적 차원에서 그치지 않기를 희망해 본다.

 

□정순희 사할린귀국동포는 2001년 어머니와 함께 영주귀국 했으며, 현재 한국 정부에서 마련해준 인천에 있는 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 사할린에 두고 온 자식들 생각에 일년에 한번 사할린을 찾아 그리운 정을 나누고 있다고 한다.

송성수 본지 기획실장

 

제17호 11면 2007년 8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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