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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人/최종규ㅣ책이야기

책을 어떻게 읽을까

책으로 보는 눈 [16]

 

그제 뜻하지 않게 서울 나들이를 했습니다. 요즈음은 오른팔꿈치가 많이 저려서 자전거를 타지 못하고 전철과 버스로 움직입니다. 서울로 가는 전철은 몇 번씩 에어컨 고장으로 가다가 멈추며 점검을 합니다. 서울에 닿아 타는 시내버스는 눈물이 말라 눈이 따갑고 목이 컬컬하도록 에어컨을 신나게 틀어 줍니다.

길가에 수없이 함부로 세워진 자가용과 짐차에 막혀 버스는 가다서다를 되풀이하고, 건널목 신호에도 틈틈이 걸려서 멈추기를 자주. 이렇게 멈추어 있는 동안 버스 왼편으로 아슬아슬 바싹 붙는 오토바이가 씽씽 지나갑니다. 안전모자 안 쓴 오토바이꾼이 보이고, 피자를 나르는 고딩으로 보이는 아이가 보입니다. 피자 나르는 아이는 택트 오토바이로 묘기를 부리기까지. 퀵배달 오토바이도 차 사이로 오락가락. 버스 기사는 오토바이 생각만 하면 얼마나 골치가 아플까, 자전거 타는 사람도 저 오토바이와 마찬가지로 느끼지 않을까, 더욱이 자전거는 오토바이처럼 씽씽 지나가 버리지 못하니 뒤에 바싹 따라붙으며 괴롭히고픈 마음이 불쑥불쑥 들지 않을까….

홍익대 앞 만화가게에서 만화책 세 권 고릅니다. 마포도서관을 지나 헌책방 ‘온고당’에서 사진책 몇 가지와 이야기책 몇 가지를 고릅니다. 걸어온 길을 거슬러 전철역으로 갑니다. 젊음이 넘친다는 대학교 앞 길거리에는 아리땁게 꾸민 아가씨들과 멋들어지게 꾸민 남정네들이 가득합니다. 이들을 부르는 술집과 밥집 불빛은 대낮만큼까지는 아니지만 무척 환합니다. 출출해서 닭집 한 군데에 들어가 튀김닭을 먹습니다. 닭집은 자리가 없을 만큼 북적입니다. 맛은 있었지만 인천보다 2000원 비싼 값.
 
사진기와 책으로 묵직한 가방을 추스르고 조금 걷다가 전철을 탑니다. 가방에서 책 하나 꺼내어 읽습니다. 조금 앞서 헌책방에서 산 ‘녹색평론’ 1992년 7∼8월호(5호) 잡지. 녹색평론이 나온 지 어느덧 열다섯 해가 넘었군요. 고등학교 다닐 때 읽은 생각이 어렴풋하지만 다시 들춥니다. 다시 들추니 ‘지금 생각하면 어설프고 모자란 이야기’가 보이는 한편 ‘그때나 이제나 마음에 뭉클하게 다가오는 이야기’가 보입니다. 잡지는 갓 나올 때보다 몇 달, 또는 몇 해 묵힌 뒤 보면 더 맛깔나다고 새삼스레 느낍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먼 길, 녹색평론은 1/3쯤 읽다가 가방에 넣고 다른 책을 하나 꺼냅니다. ‘지는 꽃도 아름답다’(달팽이). 일흔 할머니가 꾸려온 삶 이야기가 마치 시 한 편처럼 조곤조곤 다가옵니다. 당신 세월을 흐트러짐 없이 살아오셨고 그 흐트러짐 없는 삶을 꾸밈이나 겉발림 없이 담아내면 ‘시라고 추켜세우는 평론가가 없어도’ 시가 되는군요.

그러나 하루 내내 땡볕을 먹고 맥주 석 잔을 마신 탓인지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책을 덮습니다. 몸이 힘들어도 뒷꼭지와 눈 둘레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가며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몸이 힘들기에 책을 덮고 자리에 눕거나 찬물로 멱감고 쉴 수 있습니다. 눈으로 읽은 줄거리는 머리를 거쳐 마음에서 삭인 뒤 몸으로 받아들이거든요. 눈과 머리와 마음과 몸 모두를 써서.


최종규 우리 말과 헌책방 지킴이

 

제17호 13면 2007년 8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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