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비정규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관심은 오히려 뒤늦은 감이 있는데 왜냐하면 2007년 3월 현재 비정규직이 정부 기준으로 577만명, 전체 근로자의 36.7%이며 노동계 기준으로는 875만 4천명, 55.6%라는 사실 즉 근로자 10명중 4~5명은 비정규 근로자라는 점 때문이다. 더군다나 올해 갑작스럽게 비정규직 쟁의가 많아진 것도 아니다.
2000년대 이후 비정규직 노동쟁의가 지속적으로 증가하였으며 기륭전자, KTX, 현대 및 기아자동차 사내하청, 건설플랜트, 하이닉스-매그나칩, 호텔롯데 등 짧게는 수개월에서 1년 혹은 2년 이상 장기화한 쟁의가 꽤 많고 앞으로도 장기쟁의가 반복될 가능성이 있다. 쟁의 형태 역시 파업, 점거 농성에서부터 분신 및 자살 등 매우 격렬한 양상을 띠어왔다. 비정규입법의 시행이나 최근 이랜드 사태는 그동안 별로 조명되지 못한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의 증가일 뿐 새로운 현상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왜 2000년대 이후 비정규직 문제가 심화되었을까? 물론 직접적인 이유는 비정규직의 증가 및 이들의 삶의 질의 악화에 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배경에는 효율성과 형평성 간의 딜레마, 자유와 평등 간의 불가피한 긴장이 있다. 비정규직을 사용할 ‘자유’와 비정규직이 되면서 발생하는 ‘불평등’, 비정규직 활용에 따른 ‘효율성’의 제고와 비정규직의 확산에 따른 ‘형평성’의 훼손은 동전의 양면이며 자본주의 사회가 갖고 있는 근원적인 긴장의 표출이라고도 할 수 있고 한국적인 현상만은 아니다. 다만 한국에서 보다 심각하게 나타나는 것은 외국의 비정규 현상과의 차이 때문이다. OECD 국가의 경우 비정규 근로는 주로 정규 근로를 ‘보완’하는 형태로 사용된다. 따라서 대부분 파트타임이며 여성인 경우가 많고 비정규 근로의 경력이 오히려 정규직으로의 전환에 유리하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의 비정규 근로는 정규 근로를 ‘대체’하는 형태이며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발견되고 파트타임은 거의 없고 근로시간이나 숙련의 차이도 그다지 크지 않다. 결국 한국의 비정규 근로가 외국과 다른 것은 효율성과 형평성의 양 축에서 지나치게 효율성의 축으로 노동시장이 이동되어왔다는 사실이다.
물론 여기에는 원인이 있다. 첫 번째로 외환위기의 사회적 충격이다. 외환위기의 여파로 인해 기업이나 근로자는 중장기적인 전망 보다는 단기적인 이해득실에 골몰하였다. 기업은 단기적인 이익최대화 및 주식배당이 보다 중요해졌고 정규직 근로자들은 언제 직장을 잃을지 모른다는 점에서 눈앞의 임금인상 및 고용안정에 더 매달리게 되었다.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느끼는 노사 양측의 단기적인 이익 전쟁 즉 효율성 최대화 추구로 인해 ‘비정규직’이라는 불가피한 희생이 초래된 것이다.
두 번째로 한국사회의 복지가 사회복지가 아닌 기업복지의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복지수혜에서 보편성의 원칙보다는 특수성의 원칙이 지배적이고 내부자(insider)와 외부자(outsider)의 경계가 뚜렷하다. 따라서 기업과 근로자 모두 기업의 효율성을 통한 부의 내부자 분배에 주력하게 되는 것이다. 한 기업의 효율성 추구가 사회 전체적으로는 비효율적일 수도 있는 소위 ‘죄수의 딜레마’ 현상이 구조적으로 반복되어 왔다 할 것이다.
세 번째로는 우리 사회에 효율성 이상으로 형평성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취약하다는 사실이다. 민주주의와 더불어 세계화가 시작되면서 민주주의적 가치가 충분히 이 사회에 뿌리내릴 시간이 없었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나 정치적 절차 수준에서만 정착되고 민주주의가 바로 자유만큼이나 평등의 문제와 연결된다는 생각이 확산되기 전에 세계화의 폭풍에 휩싸인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계속 이와 같은 사회현실을 용인할 것인가. 유사한 경제적 위기가 올 경우 다시 동료를 구조조정하여 내가 살 것인가. 20억원의 비용을 삭감하여야 할 경우 20억원 어치의 근로자를 줄여 기업의 기사회생을 도모할 것인가. 비정규직 문제를 통해 우리 사회가 직면한 질문은 바로 이것이며 지금 다른 방법 다른 길이 모색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터져나오고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 모두의 몫일 것이다. 87년 민주화를 이루어낸 노사 그리고 시민들이 민주화의 두 번째 단계를 현명하게 넘어서기를 희망한다.
제13호 14면 2007년 7월 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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