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첫 수업[9]
83년에 국가가 먹여주고 재워주는 특별한 은총을 입은 바가 있다. 국가가 이런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준 사유는 “전두환 정권은 전 국민의 민주적 열망을 짓밟고 쿠데타를 일으키고 광주양민을 학살한 파쇼매판정권임으로 이를 타도하자”는 내용의 유인물을 300여장 만들어 시내버스 환기통에 몰래 올려놓는 일 때문이었다. 검사는 유인물을 달리는 버스에서 흩날리도록 함으로써 현저히 사회불안을 야기 시킬 우려가 있는 집회 또는 시위를 선동해 ‘불법집회시위 예비음모죄’를 범하였다고 주장하였고, 판사는 옳으신 주장이라고 동감했었다.
불법집회시위에 예비음모죄
그때 국가가 나를 거두어 주었던 거소는 대전교도소였는데 돌이켜 보며 매우 안락한 곳이었다. 안기부 지하실에서 십 수 일간 영장 없이 감금되어 친구들과 선배들이 사회불안의 공범이며 그 본질은 빨갱이라는 것을 교육 받고, 이 교육에 대해 공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매일 얻어맞는 고문의 일과로부터 벗어난 시간이 준 행복감을 경험한 분들은 아시리라.
내 인생의 첫 수업은 이 대전교도소에서 이루어진 것 같다. 이곳에서 다양한 이유로 국가의 은혜를 입고 있는 분들을 만났다. 오토바이의 기름을 빼다가 들켜서 잡혀온 열여섯의 아이, 술 먹고 다투다가 길이 10cm가 넘는 드라이버를 소지하였음으로 특가법으로 중범에 처하게 되었다는 20대 총각도 기억이 새롭다. 자기가 범한 절도는 딱 두건인데 경찰 고문 탓에 미해결 사건 30건을 받아먹고 왔다는 내 또래 친구도 있었다. 출소한지 이틀 만에 먹고 살 곳은 교도소 밖에 없다며 다시 절도로 돌아오신 할아버지도 만났고, 우체국 직원인데 횡령죄로 옥살이를 하며 모범수로 가출옥을 기다리며 소지(청소담장)로 자유로이 감옥 안을 돌아다녔던 분의 선한 눈길도 새롭다.
민중과 대전교도소
소년원 탈주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하였던 과거를 가진 어떤 이는 죽이는 춤 솜씨로 바람난 돈 많은 과부를 만났는데 이 과부와 인생의 행로를 할 것인지 아니면 조강지처에게 회개하고 돌아갈 것인지를 나에게 상담했다. 강제추행죄로 징역을 사는 기독교 집사는 전도하기 위해 밤낮 없이 일하는 가운데 내가 돌린 ‘역사적 예수’라는 책을 같은 방 식구들이 본 후 전도가 잘 안된다며 예수이야기 중에도 은혜가 안 되는 책이 있다고 하소연 했다.
탈춤반 출신 ROTC후보생이 기무사의 학생운동 프락치 강요를 못이겨 과음 끝에 싸움을 벌려 폭력범으로 들어와서는 맘이 편하다고 했다. 그 때 바쁘다 바뻐를 외치며 일을 잘 빠뜨리곤 해서 낭패를 겪곤 했던 교도관님도 정권의 앞잡이가 아니라 또 다른 생활인이라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국가의 특별한 은총을 받아 대전교도소로 제한된 동거를 했던 사람들 속에서 우리 사회의 축소판을 체험했던 셈이다. 힘없고 빽 없는 인생들의 고단한 정류장이었던 대전교도소에서 관념적으로 이해했던 민중 생활을 단면을 본 셈이다. 민중이 주인 되는 역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모순된 삶에 지쳐하는 이들이 민중이고 이들과 벗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해준 내 인생의 첫 수업은 그래서 대전교도소 수감생활이었다.
제11호 16면 2007년 7월 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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