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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있어서 중요한 순간은 물리적 시간으로 따지면 잠시잠깐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하지만 물리적 개념으로는 짧은 시간일지 모르겠지만, 심리적 시간은 그 두 배, 세 배일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은 그 심리적 시간 안에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변화한다.
나에게는 2000년 당시 의약분업 제도 시행으로 인해 발생했던 의사 폐파업 사태의 순간들이 그러한 시간이다.
사실 나의 성격은 사회운동을 할 만한 것이 못되는 편이다. 소심한데다 붙임성도 없는 편이어서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생 때에 나는 운동의 언저리에서 ‘골수’ 운동권 선배나 동기들을 돕는 것으로 만족하곤 했다. 나의 전공이 ‘산업의학(노동자들의 직업병 예방과 평가를 주된 영역으로 하는 전문과목)’이고, 내가 현재 병원에 근무하지 않으면서 사회단체 일을 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내가 원래부터 투철한 운동권이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러한 나를 바꾼 것이 바로 2000년 그 시간이다. 당시 의사들은 정부가 추진하는 ‘의약분업’ 정책이 의사의 진료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주장하며, 두 번에 걸쳐 폐파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이하 인의협)은 의사들의 그러한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고 폐파업에도 동참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전공의 3년차로서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에서 편집홍보국 차장을 맡고 있었다. 중앙집행위원회의 말단 집행 간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때 인의협 중앙집행위원회는 당시 나에게 의과대학 학생들과 전공의들을 대상으로 하는 선전물을 발행하고, 그들을 우리 의견에 동조하는 제3의 그룹으로 재조직하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그것은 나에게 너무 벅찬 일이었다. 당시 의사 사회 내에서 실명으로 ‘내가 인의협 회원이오’라고 밝히는 것은 정치적 커밍아웃에 가까웠다. 모든 의사들이 인의협 회원을 욕했고, 인의협 회원으로 밝혀진 이들을 왕따시켰다. 기존 인의협 회원의 집단 탈퇴도 연이어졌다. 소심한 나로서는 내가 인의협 회원이라고 밝히는 것도 두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더 나아가 실명으로 의사 전용 게시판에 의사들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선전글을 올리라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많은 갈등을 했다. 무섭고 자신이 없었다. 왕따 당하는 것이 무서웠고, 전공의들과 의과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내 주장을 펼쳐 조직을 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선배들의 도움으로 그러한 일을 아주 부족하나마 해낼 수 있었다. 그 광기의 시간을 의지와 신념으로 버티는 것, 나는 그 경험으로부터 사회운동을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