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81년 8월 어느 날, 나는 가톨릭농민회 교육을 받으러 광주로 가고 있었다. 이전에 한두 번인가 만났던 전남연합회 총무님으로부터 광주 모처에서 교육이 있으니 와 달라는 편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80년 광주학살 직후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내려와 세상의 고민을 혼자 다 걸머진 듯 술타령이나 일삼고 걸핏하면 경찰이나 면 직원들 하고 싸움이나 일삼던 때였다.
공용버스터미널에서 삼복염천의 땡볕이 쏟아지는 금남로를 지나 찾아간 곳은 호남동 천주교회의 신협 건물 2층이었다.
10평도 채 안되는 회의실에는 두어 대의 선풍기만 부지런히 돌아가고 있었고 교육생은 20여명 정도. 시간이 되자 간단한 개회식이 열렸고 서울에서 데모할 때 간간히 불렀던 농민가 제창이 끝나고는 이윽고 교육이 시작되었다.
주로 이 단체의 간부인 듯한 농민들이 나와서 ‘한국농업, 농촌의 현실’, ‘농협론’, ‘민주주의론’, '경제이론', ‘농촌문화’, ‘농지세’ 등에 대한 강의를 듣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교육을 받으면서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차츰 빠져들고 있었다.
말 한마디라도 잘못했다가는 누구한테 어떻게 붙들려가 곤경을 치러야 할지 모르던 세상인데 우선 텔레비젼이나 신문에서도 들어볼 수도 없는 이야기들을 농민들이 거침없이 정부를 비판하며 대학교수 뺨치게 하는데 대해 나는 우선 놀라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참석한 교육생들이 다 농사짓는 농민들이라는데 우선 그렇게 수준 높은 토론을 열심히 하는 것을 보면서 명색이 대학문턱에 까지 발을 디뎠다는 나는 정말 부끄러워지고 있었다.
그리고는 어줍지 않게 세상을 정작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제 멋대로 절망하고 흐트러진 자세로 어영부영 살고 있는 내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아무튼 이 2박 3일 동안의 감동적인 교육은 나로 하여금 어려운 농업, 농촌의 현실을 극복하고 세상을 바로잡는 대열에 작은 힘이라도 꼭 함께 하겠다는 결심을 바위같이 굳히게 하였고 난 이때부터 농민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하여, ‘그래도 배운 놈이니까 하다못해 5급 공무원시험이라도 봐서 면서기라도 해야 쓸 것 아니냐’ 는 부모님과 주위의 바램도 저버린 채 오히려 관과 경찰의 눈총과 감시를 받으면서 청년회를 꾸리고, 1985년에는 군내에서 처음으로 농민회분회조직을 만들었다. 이후 면, 군 농민회, 그리고 전국놈민회총연맹 창립에 앞장서고 시민운동에도 참여하는 등 아직까지 이른바 ‘운동’의 끝자리라도 지켜오고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에 신규교육생은 4~5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전남을 대표하던 쟁쟁한 지도자 내지는 활동가들이었다. 이른바 ‘물이 괜찮은 놈“들이 세상 물정을 모르고 교육을 받으러온 것을 눈치 챈 선배들이 ‘왠 떡이냐?’ 하고 반색을 하여 그 2박 3일 동안을 교육생처럼 위장하여 그토록 열심히 소위 ’밀봉교육(?)‘을 한 것이었다.
뒤에 같이 활동을 하면서 "내가 형님들 덕에 이 구렁텅이에 떨어져 이 모양 이 꼴로 고생하고 사요" 라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항의를 하면 그 선배들 왈 “교육은 원래 고도의 사기란 걸 인제 알았냐”하며 서로 박장대소하던 기억이 새롭다.
별 해 놓은 것도 없이 벌써 나이 오십이 되었지만 그 무더웠던 여름의 농민교육은 내 삶의 좌표를 바꾸어 버린 수업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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