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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풀뿌리

"손에 잡힐 듯 가물거리는 고향"

남한 땅 분단마을 죽변 아바이촌 르포

 

“서로 맘대로 고기잡고...그게 통일이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일정 마지막 날인 4일. 58년째 실향민으로 낯선 땅에 살면서 분단의 서러움을 온 몸으로 각인해 온 팔십 노인들이  ‘죽변 아바이촌’ 초입 구멍가게 평상에 걸터앉아 잔커니 권커니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다.

남효선

울진군 죽변면 죽변4리 '함경도 아바이촌' 마을 별칭에서 드러나듯 죽변 아바이촌은 전쟁과 냉전체제가 낳은 서러운 이름이다.


‘아바이촌’이라는 이름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북녘 땅에서 남녘 땅으로 내려온 사람들이 대거 정착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주로 함경도 지방 사람들이 집단이주촌을 형성하면서 아바이촌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마을이름에서부터 분단국가의 고통과 서러움이 듬뿍 배어나온다.    

마침 죽변 앞 바다에 땅거미가 슬슬 내려앉고 있다. 60년 가까이 홀몸으로 낯선 땅 죽변항에 닻을 내린 뒤 한시도 떠나본 적이 없는 팔순 노인들의 손등에도 땅거미가 슬슬 기어 오른다.

“어째 분단선이 뚫릴 것 같기도 하고 아인 것 같기도 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땅길로 건너갔으니 우리도 이번에는 고향 땅 밟을 수 있겠지비?”

다섯 형제 중 삼형제가 12톤짜리 범선에 의지해 함경남도 홍원군 삼호면 삼성리 고향 땅을 뒤로 하고 물설고 낯선 곳, 죽변항에 성긴 뿌리를 내린지 58년째. 황종덕(88, 울진군 죽변면 죽변4리) 할아버지는 그 동안 정부에서 틈만 나면 이산가족 상봉으로 호들갑을 떨었지만 한번도 그 대열에 끼지 못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1950년 7월, 범선에 의지해 망망대해를 떠돌며 이 곳 죽변항에 닻을 부린 가구는 모두 55가구. 그러나 이 곳 실향민 어느 누구도 이산가족상봉에 한 번도 선정된 적이 없다.

“숱하게 군청에 이산가족 상봉 접수했지비. 그란데 여지껏 한번도 안됐어. 여게 아비이촌 사는 피붙이들 한집도 안됐어. 왜 그란지 이유는 몰래.”

황 노인은 “이제는 체념했다”고 고개를 돌린다. 이들 아바이촌 실향민들에게 남북 두 정상이 만나는 것은 ‘그저 먼 산에 불 보듯’ 예사로운 일이 되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아주 희망을 닫은 것은 아니다.

“내 이제 구십 줄에 나이가 들어 다리도 제대로 못 움직이고 그래도 평생 꿈이 살아 생전에 고향 땅 한번 밟아 보는 기래. 고향 땅 가서 제일 먼저 조상님 산소부터 찾아보는 게 제일 꿈이래.”

돌아가지 못한 꿈...함경도 아바이의 서러운 한

황종덕 할아버지는 ‘태를 묻은’ 고향 땅을 떠나온 이래 지금까지 한 차례도 빼먹지 않고 조상 제사를 모셔왔다고 한다.

남효선

고향을 떠난지 58년째, 한번도 이산가족 상봉에 뽑히지 못했다는 황종덕 할아버지는 죽기전에 꼭 한번 고향 땅을 밟아보는 것이 꿈이라고 말한다.

“우리 형제가 모두 다섯 남맨데, 전쟁나서 고향 땅 떠나올직에 4형제가 무작정 남으로 내려왔어. 흥남부두에서 맏형님이랑 헤어졌뿌랬어. 바람이 얼매나 불었는지, 고만에 형님은 고향집으로 돌아가고 삼형제만 떨어져 내려와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갔지비. 거서(거기서) 부산으로 가 한 일년 살다가 범선끌고 죽빈항에 들어와 눌러 안잤어.”

아버지 기일은 고향 땅 떠나오기 전부터 알고 있는 터라 제 날에 제사를 지내지만 어머니와 맏형의 제사는 생일날에 제사를 올린다고 한다. 황종덕 할아버지는 자신의 나이가 팔십여덟살어서 어머니와 맏형은 모두 돌아가신 걸로 이미 다짐한 터였다.

행정구역으로 울진군 죽변면 죽변4리, 이른바 아바이 마을을 일군 사람들은 한국전쟁 직후에 삶의 보따리를 푼 70여명의 함경도 출신 피난민들이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남쪽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이 정착한 곳은 주로 연안 해촌이다. 그 중 동해안에서 이들 실향민들이 자리잡은 대표적인 곳이 이 곳 죽변4리 아바이촌과 강원도 속초시 청호동의 아바이촌이다.

대체적으로 북한지역을 세로로 갈라서 동쪽에 살던 사람들은 남한의 동쪽에, 북한의 서쪽에 살던 사람들은 남한의 서쪽에 편재하는 경향을 보인다. 곧 황해도, 평안도 일대의 피난민들은 경기도, 충청도 등 서해 연안에, 함경남북도와 강원 이북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동해연안 지방에 몰려있는 셈이다.

“죽변에 자리잡은 거는 한발자욱이라도 고향 가까이 있을라 하는게래. 그래야 한발자욱이라도 빨리 고향으로 갈수 있지비.”

전쟁이 끝나면 조금이라도 빨리 고향으로 되돌아가려는 마음이 속초와 죽변에 자리를 잡게 했다는 것이다.

한발자욱이라도 고향 가까이 


황종덕할아버지는 아바이촌에 터를 잡은 피난민들 대부분이 처음에는 집을 임시 막사처럼 꾸미고 살았다고 한다. 이렇게 천막이나 판자로 대충 집을 건사해 산 것도 임시로 거처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현재처럼 다잡고 집을 새롭게 건사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유신체제와 반공이데올로기가 강화되면서 고향으로 돌아갈 희망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을 때부터였다.

“죽변에 자리잡을 처음에는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나무판자로 대충 지붕을 얹어 살았어. 하루하루 배일하면서 농지 장만은 애초부터 생각이 없었지. 죽변에 자리잡은 지 7~8년이 지나서야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점점 알게되었지만, 그래도 한 20년 지나면 고향 땅으로 갈 수 있을거란 생각을 했어.”

한국전쟁이 끝나고 53년도에 정전협정이 맺어지면서 휴전선이 생기자 이들의 꿈은 바다 속을 자맥질하는 등대불처럼 종잡을 수 없는 것이 돼버렸다. 이들 피난민들은 ‘손에 잡힐 듯 가물거리는 고향’을 가슴에 담고 대신 낯선 곳에서 살아남을 궁리를 모색한다. 1956년도에 이들은 ‘월우친목회(越友親睦會)’를 만들었다. 피난민들끼리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낯선 땅에 삶의 터를 단단히 다지기 위해서였다.

월우친목회를 만든 56년도에 24명이던 회원은 1960년도에 50여명으로 불어났으며, 1983년도에는 66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1996년에 들어서서는 49명으로 줄었다. 그동안 세상을 버린 사람들도 늘어나고 또 장성한 자식을 따라 대처로 이주를 한 집도 하나 둘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피난민 1세대의 아들 딸들은 자기들끼리 ‘월우청년회’를 조직했다. 월우청년회의 주된 목적과 사업은 회원 경조사 때 상호부조를 하는 것과 세상을 버리는 부모님들을 모실 ‘묘역’을 조성하는 일이었다.

이들 월남 2세대들은 기금을 조성, 아바이촌에서 5리 가량 떨어진 죽변면 화성리에 묘역을 마련하고 ‘향원(망향동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묘역을 조성하던 첫 해에 ‘망향비’를 세우고 부모님들을 모시고 고향 땅을 향해 제사를 올린 뒤 서로가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며 실향의 서러움을 달랬다고 한다. 이들은 지금도 3년마다 한번씩 음력 10월에 날을 받아 망향제를 지내며 고향을 떠난 설움을 달랜다.

죽변항에 신 어로기술 전파

이들 피난민들이 죽변 아바이촌에 터를 잡으면서 죽변항에 일대 어업기술 혁명이 일어난다. 죽변 아바이촌에 정착한 이들은 함경남도 홍원군, 북청군 출신이거나 함경북도 어대진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의 고기잡이 기술, 특히 명태바리(바리는 원래 짐의 단위이나 동해연안에서는 ‘잡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기술은 죽변항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특히 함경도 아바이 1세대들이 죽변항에 선을 보인 ‘가이선’은 신 어로기술의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

남효선

죽변항 위판장의 경매 모습

가이선은 ‘뎃마’와 같은 소형 무동력선으로 ‘채(수)경선’이라고도 한다. 주로 한 명이 승선하여 한 손으로 노를 저으며 ‘체경(나무판자를 마름모형으로 붙여 앞 뒤에 거울을 단 수경)’을 수면 위에 놓고 들여다 보면서 문어나 전복, 해삼 따위를 잡았다.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난 고의숙 옹은 가이선 제작 명수로 이름이 높았다 한다.

죽변 아바이촌 사람들은 한국전쟁 이후 냉전체제가 굳어지면서 양쪽의 어느 정부로부터도 환대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남쪽은 이들이 언제라도 북쪽의 편을 들 수 있다는 의심에서, 또 북쪽은 이들이 체제를 버리고 이탈한 세력이라는 시각에서 이들은 늘 감시의 대상으로 숨 한번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살아왔다고 했다.

이들 아바이촌 사람들이 한번도 이산가족 상봉에 선정되지 못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분단 이주사 재해석은 민족사적 과제

이들 대부분은 한국전쟁 직후, 40여일간 북한을 점령했던 UN군의 소개령에 떼밀려 전쟁을 피해 남으로 내려온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냉전기류가 한반도를 휘감던 시절, ‘공산당이 싫어서’, 혹은 ‘자유를 찾아 넘어 온 사람들’이라는 선전은 사실상 이들과는 거리가 먼 정치적 선전에 불과했던 것이다.

당시 미군의 무차별한 폭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고 점령군의 ‘빨갱이’ 색출작업은 인민군이 남한 점령기간에 행한 반동분자 색출작업과 그 궤를 같이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제강점기의 친일청산 문제가 민족적 문제로 자리잡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의 분단 이주사의 이면 또한 통일로 가는 문턱에서 반드시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또 하나의 민족사적 과제로 남아 있는 셈이다.

“어느날이고 고향생각 아니 해본 적이 없어. 대통령이 걸어서 휴전선을 넘어 갔다 오면서 휴전이 아닌 종전을 얘기한 것은 참말로 잘한 일이래. 그란데 우째 서해안은 남북이 함께 고기잡도록 한다는데, 동해안에는 왜 아무 말이 없는지 몰래. 통일이 뭐 별건가. 이족 저쪽이 맘대로 가서 며칠씩 있다 오고, 이쪽 저쪽이 서로 배 끌고 가서 고기 맘대로 잡고, 그게 통일이지비.”

고향에 가면 제일 먼저 조상님 산소부터 찾겠다는 황종덕 할아버지 눈에 ‘반짝’ 눈물이 맺힌다.                            

남효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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