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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문화

고구려 제왕들의 영욕

한국방정환재단 어린이·청소년 고구려 문화유적답사[4]

 

오명록

산성아래 고분


환도산성의 옛 이름은 위나암성이다. 국내성과 짝을 이루어 고구려 수도 방어의 최후 보루이자 피안처의 역할을 담당했던 성이 환도산성이다.

집안시의 국내성에서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앞으로 통구하가 천연 해자 노릇을 해 줄 뿐만 아니라 뒤편과 좌우가 가파른 산세를 이루고 있어 그야 말로 천연의 요새 위로 성을 둘러친 형국이다.

평지성인 국내성이 고구려 도읍으로서 일상의 무대였다면 환도산성은 전란의 시기를 대비한 비상의 도읍이었던 셈이다. 이곳에서 2대 유리왕으로부터 19대 광개토대왕에 이르는 시기의 고구려 영욕이 함께 하였으며 마침내 장수왕에 이르러 수도를 평양으로 옮겨가게 된다.

국내성에서 불과 5리 남짓 밖에 있는 환도산성을 오르내리며 고구려의 젊은이들은 대륙을 호령하는 꿈을 키우고, 광개토대왕의 정복전쟁 또한 이곳을 심장으로 지닌 강력한 기마군단에 의해 이루어진 천하경영이었으리라.

성곽은 허물어지고 일부 남은 형체 위에 어설픈 복원이 더해져 있다. 밖에서 보았을 때 쌓인 돌 모습이 단정한 품(品)자 모습이서 반갑고. 위로 올라서 보니 역시 고구려 성 쌓기의 전형인 옥수수 알맹이 모양을 지닌 성곽 돌 모습에서 옛 조상의 족보를 전하듯 흔적을 남기고 있어 안타깝다.

성안에서 전망대 위로 올라보기도 하고 숲길을 따라 편안한 언덕을 거닐며 과수원 밭과 옥수수 밭 사이에서 궁궐터로 추정되는 먼 발치의 옛 역사를 더듬어 본다. 우리 일행의 어린 학생들에게는 팀을 나누어 집안시의 유적 모형을 만들어 보라고 과제를 주었다.

오명록

유적모형만들기 경연대회를 하는 아이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갑자기 어린 시절 여름성경학교에서 배웠던 성경 한토막이 떠오른다. 소리 내어 읊조려 보았더니 우리 어린 일행들이 따라서 암송한다. 아이들이 과제물을 만드는 동안 기나긴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옛날에 아득한 옛날에….”

국내성 최후 방어선 환도산성

주몽(추모)이 홀승골성에 고구려를 세우고 그에 아들 유리왕은 국내성-위나암으로 천도하였고 유리왕의 아들 대무신왕은 정복전쟁을 본격화하였으며 동부여를 공격하여 대소왕을 죽이고 할아버지 주몽의 원수를 갚았으며 이 과정에서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왕자가 등장하고…. 대무신왕의 동생이 민중왕이었고 그는 조카인 대무신왕의 아들 모본왕에게 왕위를 넘겼으며, 모본왕은 사람을 깔고 앉을 정도로 횡포를 부리다 결국 시종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이어서 왕위에 오르는 이가 고구려 6대의 태조왕이라….

모를 일이다. 한 왕조를 세운 첫 임금을 일컬어 태조왕이라는 휘호를 사용하는데 유독 고구려의 태조왕은 여섯 번째 왕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제야 본격적인 국가 형태를 이루었다는 뜻일까. 아니면 이후 고구려 왕 들이 태조왕의 직계 후손이란 뜻일까?

의문을 뒤로하고 다시 환도산성-위나암성을 둘러싼 고구려의 영욕으로 돌아가 보자.

태조왕은 대단히 장수한 인물이다. 기록에 의하면 119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오직하면 그의 동생이 기다리다 지쳐 연로한 왕을 누르고 차대왕으로 왕권을 찬탈하였겠는가? 물론 차대왕은 재상 명림답부에게 목숨을 잃고 이어서 왕위를 계승하는 이가 신대왕이다. 3형제가 차례로 왕위에 오른 셈이다.

태조왕은 영토 확장에 있어서 동으로 동옥저를 정벌하여 창해(동해?)에 이르고 남으로는 살수(청천강?) 서로는 한나라와 각을 세워 요수현(황하유역?)까지 진출하였다고 하니 대단한 외연을 확보했던 듯하다. 그렇게 3형제의 왕위에 이어 신대왕의 둘째 아들인 고국천왕이 등장하는데 국상 을파소와 더불어 진대법, 왕위계승에 있어서 형제상속이 부자상속으로 전화 등으로 널리 알려진 왕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다음왕은 그의 동생인 산상왕이 등장한다.

남편 골라 왕위 결정한 우 씨

산상왕이 왕위에 오르기까지는 대단히 드센 성격의 소유자로 보이는 한 여인이 등장하는데 그녀가 바로 고국천왕의 왕비이자 산상왕의 형수이며 이후 산상왕의 왕비가 되는 우 씨 성의 여인이다.

우 씨 왕후를 둘러싼 이야기에서 몇 가지 재미있는 사연을 찾아볼 수 있다. 우선 산상왕의 왕위계승 자체가 우 씨에 의해 좌우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고국천왕이 죽자 왕의 죽음을 감추고 그의 바로 아래 동생인 발기와 왕권을 놓고 흥정하다가 여의치 않자 그 아래 동생인 연우를 왕위에 올려 남편을 삼았으니 그가 바로 산상왕인 것이다.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형이 죽으면 형수와 혼인하는 고구려의 풍습)의 전형이 나타나는 대목이다.

그리고 그녀는 발기와 싸워 그를 물리치고 왕권을 공고히 한다. 이후 산상왕은 우 씨 왕후에게 쥐어 사는 모습을 드러낸다. 후사가 없는 왕비 우 씨 몰래 돼지 몰러 나갔다(?) 만난 산상왕의 주통촌 처녀와의 사랑이 그것이다. 그렇게 태어나 훗날 동천왕이 되는 주통촌 처녀의 아들의 이름 교체(郊祭)가 이를 드러내고 있다. 물론 많은 이들은 여기에서 돼지를 상서로운 동물의 상징한다고 하나 한편으로는 돼지부족 내지는 돼지와 관련된 어떤 집단과의 조우를 상상해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는가? 우 씨는 주통촌 처녀를 시샘하여 죽이려 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인 동천왕에게도 옷에다 국물을 쏟는 등 괴롭힘을 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대단히 드센 성격의 소유자였던 듯하다.

또한 우 씨로 인하여 산상왕은 죽어서 자신의 형 고국천왕과 반목을 하게 되는데 이 이야기에도 당시 사람들의 풍습을 엿볼 수 있는 사연이 들어있다. 왕비 우 씨는 죽은 후에 산상왕과 함께 무덤에 묻힌다. 자신의 행실이 부끄러워 고국천왕의 곁으로 갈수가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무당의 꿈에 고국천왕이 나타나 죽어서 산상왕을 따라간 부인 우 씨를 꾸짖으며 더 이상 상종하지 않을 양으로 자신의 무덤과 산상왕의 무덤사이가 보이지 않게 소나무 일곱 그루를 심어달라고 했다는 이야기이다. 한 여인을 사이에 두고 그녀를 빼앗긴 왕이 삐진 모습을 보이는 꼴이니…. 그러나 이 이야기를 뒤집어보면 왕비 우 씨가 부끄러워 할 만큼 당시 사회에서 형사취수제는 점차 사라지는 시기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오명록

전망대. 이곳에서 전투를 지휘했다고 한다.


나아가 설령 형사취수제에 의해 시동생과 여생을 살았다 할지라도 죽은 후에는 애초의 남편 곁에 묻혔다는 점을 드러내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사후 세계관으로 죽은 후에도 무덤에서 일정하게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점이 ‘보이지 않게 나무를 심어 달라’는 주문이다. 그래서 고구려의 고분들에는 그토록 찬란한 벽화와 치장이 함께 했었나 보다.

잉어로 한나라 군사 격퇴

환도산성이 역사에 기록될 때는 재미있는 이야기보다는 고구려의 치욕을 더 많이 드러낸다. 고구려 대무신왕 때의 이야기 하나가 그중 재미있다고나 할까.

대무신왕 시절 요동태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침략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고구려 백성들은 환도산성으로 피신하여 성문을 굳게 걸고 대치해 난공불락의 상태를 유지하였던 모양이다. 이에 한나라 군대는 산성인지라 마실 물이 떨어지면 항복하고 나오겠거니 여겨 성을 포위하여 봉쇄작전을 취했는데 이런 한나라의 전술을 간파한 고구려 군에서는 잉어를 연잎에 싸서 한나라 군사에게 선물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한나라 군사들은 성안에 식수가 풍부하여 오래 버틸 것이고 그렇다고 공격해 들어갈 수도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인지라 스스로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이곳 환도산성에 얽힌 잉어의 이야기이다. 말에게 물을 먹였다는 음마지의 흔적이 남아있었다고 하며 을두지라는 신하가 음마지에서 잉어를 잡아 꾀를 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계곡으로 물이 흐른다.

동천왕 시절과 고국원왕 시절의 이야기는 대단히 서글픈 사연을 담고 있다. 원래 동천왕은 대단히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고구려 전형의 철기병이 그것이다. 중국대륙의 질서가 재편을 맞이하던 당대에서 고구려는 오나라와 위나라를 넘나들며 외교와 대립의 병렬 교차로 국위 운영을 한 가운데 오나라를 물리친 위나라와 피할 수없는 대결의 국면에 들어간다.

동천왕은 낙랑과의 교통 거점인 서안평을 공격한다. 위나라와의 첫 전투는 고구려의 승리였다. 비류수 강을 사이에 두고 강을 건너온 위나라 관구검의 군대를 고구려의 철기병은 적이 도강하여 진열을 가다듬기도 전에 들이쳐 격파하였고 도망가는 적을 뒤쫓아 3천명에 이어 다시 3천명의 적군을 도륙한다. 위나라 군대는 강가와 골짜기를 벗어나 평지로 도망친다. 고구려는 5천명 철기병을 앞세워 적군을 추격한다. 평지에 다다른 위나라 군사는 방진으로 맞선다. 동천왕은 너무도 쉽게 전면전을 펼치고자 했다. 평지에서의 방진은 당시 중국 대륙에서 쟁패를 가르던 군사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숙련된 전술이자 최고의 위력을 발휘하던 진형이었다.

장창으로 무장한 방진에 갇힌 고구려 철기병은 처참한 패배를 당하게 된다. 결코 뒤지지 않던 고구려의 막강한 군세가 자만에 찬 지휘에 의해 무너진 것이다. 국내성이 불타고 환도산성마저 무너진다. 무려 1만8천명의 군대를 잃어버린 것이다. 왕은 충성스러운 장수 유유와 밀우에 의해 겨우 목숨을 보전하고 남옥저까지 도망간 후에야 반격을 도모했다는 이야기이다. 전술운용에서 패배한 것이다.

환도산성의 무너진 성벽마다 그때의 고구려 군사가 흘린 핏물을 휘감아 오르듯 지금은 넝쿨식물과 잡목만 무성하다. 동천왕에 이어서 중천왕, 서천왕, 봉상왕까지 14명의 왕이 등장하고 사라진다.

비운의 고국원왕

드디어 15대 미천왕에 이르러 고구려는 또 한 번의 도약의 시기를 맞이한다. 미천왕은 소금장사 출신이다. 물론 왕족으로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왕이 되기 전까지 천한 신분으로 살았다고 하나 이는 결코 모를 일이다. 훗날에는 소금장수가 천한 신분이었을 수 있으나 고구려 당시에는 소금이 결코 만만치 않은 재물이었으며 유통을 통해 왕이 될 만큼의 물적 기반 조성을 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여튼 미천왕은 결국 서안평을 점령하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인 동천왕의 숙원을 이루어 낸다. 낙랑과 대방을 멸하여 국토의 주변을 정리한다.

뒤이어 왕위에 오른 고국원왕은 국내성과 환도산성을 다시 축조했다. 아버지에 이어 나라의 기틀을 다시 세우기에 동분서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국 세력 간의 대립을 초래하게 된다. 연나라 모용 씨와의 전쟁이 그것이다. 고국원왕은 처절하게 패배한다. 아버지 미천왕의 유골까지 빼앗기고 어머니는 물론 자신의 왕비마저 연나라에 잡혀가는 수모를 당했다. 어찌어찌하여 미천왕의 시신과 어머니를 비롯한 왕비를 되찾아오긴 하였으나 이번에는 평양성을 공격해온 백제의 근초고왕과 전쟁에서 전사하는 운명을 맞이한다.

그때 연나라와 치열했던 전쟁터가 바로 환도산성이다.

고국원왕의 아들 소수림왕이 왕위에 올랐다. 소수림왕의 동생이 뒤이은 고국양왕이고 소수림왕의 조카이자 고국양왕의 아들이 바로 19대 광개토대왕이다.

일찍이 동부여의 대소에게 쫓겼던 주몽을 대신하여 그의 손자 대무신왕이 대소를 죽였는데 전쟁에서 죽은 고국원왕에 이어 그의 손자 광개토대왕이 대륙을 재패하는 운명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모습은 역사의 또 다른 수레바퀴를 보는 듯하다. 그러나 광개토대왕의 이런 업적은 전쟁터에서 죽은 할아버지의 처절한 역사와 분노보다는 소수림왕과 고국양왕 대에 걸쳐서 이룩한 내치의 바탕위에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소수림왕은 전진의 순도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인다. 이는 국론 통일에 결정적인 힘이 되었을 것이다. 태학을 설립하고 율령을 반포하였다. 인재를 양성하고 나라의 질서를 바로잡은 것이다. 고국양왕은 무너진 종묘를 수리하고 국사(國社)를 세웠다. 왕조의 위엄을 높인 셈이다. 이런 바탕위에 태왕의 세계가 열렸으며 고구려를 세계의 중심에 둔 천하경영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태왕의 뒤를 이어 장수왕 시절 평양으로 천도하기까지 국내성 환도산성(위나암)의 역사는 그렇게 400여년 영욕의 세월을 담아냈다.

나뭇잎이며 잔돌맹이를 모아 아이들이 조성한 국내성 주변의 고구려유적 모형은 장난스럽기 그지없다. 애초에 제 모습을 갖추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런 행위를 통해 너무 멀리 있는 우리의 역사유적을 마음 가운데 새겨 넣기를 바라는 속내는 지니고 있었다. 그래도 돌아가며 설명하는 내용은 제법 열성이다. 내려오는 길에 환도산성 내에서 재배한 참외며 토마토를 사서 어린 친구들에게 상품을 대신하였다. 산성 아래 무더기로 흩어져있는 고구려 고분군들이 새삼 이 땅의 주인을 증명해주는 듯하다.

오명록 한국방정환재단 사무총장

 

제22호 14면 2007년 10월 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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