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의 한국인 납치 사건에 대한 의견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포털사이트에 오르는 덧글에서는 비아냥과 피랍자 비난이 주를 이루는 듯 하다. 이와는 달리 진보적인 정치사회운동에서는 주로 ‘미국 책임론’을 내세우고 있다. 문제의 발단이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략에 있고, 인질의 안전 역시 미국의 태도에 달려 있으므로 아래와 같이 미국의 정책을 비판하는 것은 타당하다.
“부시와 카르자이의 정상회담은 21명의 목숨을 더 위험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피랍된 21명이 모두 죽어도 좋다고 천명한 것이나 다름없다. …만약 피랍 한국인들의 목숨이 위태로워진다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부시와 카르자이 그리고 이런 사태에서 무능하고 안일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노무현 정부에 있다.
민주노동당은 국제적 냉혈한들을 강력 규탄하며 피랍 한국인들이 무사귀환하고 즉각 철군과 점령종식이 되는 그 날까지 반전평화 정당으로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당력을 모아 싸워나갈 것이다.”(민주노동당 파병반대 대책위원회, ‘미-아프가니스탄 정상회담을 규탄하며’, 2007. 8. 7)
끔찍한 죽음의 그림자
그런데 한국 기독교가 나쁘다거나, 미국이 나쁘다는 의견에는 빠진 것이 있다. 바로 민간인을 납치 살해한 탈레반(Taliban)에 대한 태도다. 물론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탈레반을 자극해서는 안 되겠지만, 개신교와 미국에게만 비난을 모으는 것은 그 반대편인 탈레반이 선자(善者)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이번 민간인 납치 사건이 있지 않았더라도 탈레반의 활동에는 끔직한 죽음의 그림자가 뒤따랐음을 환기해야 한다. 샤리아(Shariah, 이슬람법)와 파슈튠와레이(Pashtunwali, 파슈튠 정신), 끝없이 이어지는 금지 목록, 여성의 취업 노동 금지, 여성의 교육 금지, 남자 의사에 의한 여성의 치료 금지, 텔레비전·스포츠·춤추기·음악·연날리기·박수 금지, 면도 금지, 정당과 선거 금지, 사진 촬영 금지, 남성 재단사가 만든 옷의 세탁 전 착용 금지, 창문 봉쇄, 구타와 사지절단과 공개 처형, 아동 학대, 문화 유적 파괴, 소수 민족 학살….
“이슬람 경전이 언명한 바를 엄격하게 현실에 적용하려고 한 ‘원리주의’의 선택이 나날이 확장되어 가는 물신주의 사회에 대한 당신들의 걱정과 고민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도 모르지 않습니다. …세속적 타락을 극복하고 신의 뜻을 현실에서 구현하려고 했던 당신들의 꿈이 어떻게 좌절되어 왔는지에 대해서도 모르지 않습니다.
서구의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것들을 야만으로 단죄하는 서구중심주의에 대해서는 저도 당신들과 마찬가지로 깊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공동체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당신들의 주장을 나는 전폭적으로 지지합니다.”(소설가 방현석, ‘탈레반에게 보내는 편지’, 2007. 7. 24)
이해와 공공선의 충돌
이슬람을 이해하고 존중하려는 방현석의 입장은 옳다. 하지만 그런 이해가 종교 암흑시대를 재현하려는 탈레반의 악행으로까지 연장되는 것은 곤란하다. 타 문화에 대한 이해와 존중, 문화상대주의가 인류의 공동선(共同善)과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
발목 정도가 드러났다고 종교경찰이 여성을 구타하거나 한 도시 전체를 도륙하여 개에게 먹이로 주는 짓은 “모든 공동체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권리”도 아니고, 이슬람 율법도 아니다. 야만스런 폭력일 뿐이다.
핍박받는 민중의 눈으로
탈레반이 이슬람 율법에 충실한가도 의문스럽다. 그들은 미국 같은 힘센 나라와는 밀고 당기는 협상을 하면서도 인도, 터키, 알바니아 같이 가난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는 주저 없이 살해했다. 이것이 평화와 정의, 관대함과 친절함을 강조한 무함마드의 가르침인가?
탈레반을 비난하는 것이 ‘민주주의 수출자’ 미국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미국도 탈레반도 아닌 우리의 눈이 필요하다. 핍박받는 이슬람 여성의 눈으로, 교육도 보살핌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의 눈으로, 학살당한 소수민족과 외국인 노동자의 눈으로, 그리고 평화가 깃든 알라의 눈으로 탈레반을 응시하자.
제15호 18면 2007년 8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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