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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민족&평화

"평화공존과 통일의미 되새긴 평양길"

6.15민족통일대축전 참가기[1]

지난 6월 14일부터 17일까지 3박4일 동안 6·15공동선언 발표 7주년을 맞아 평양에서 열린 6·15민족통일대축전에 다녀왔다. 문화연대 대표자격으로 갔는데 뜻밖에 많은 경험을 했고 많이 배웠다. 지난 2005년 방북단 규모가 북측의 갑작스런 규모축소결정으로 한바탕 소동이 이는 것을 옆에서 지켜본 적이 있었지만 나에게 있어서 방북은 불가원 불가근으로 큰 관심사항은 아니었다. 나는 대북 포용정책인 햇볕정책을 긍정적으로 보고 통일은 언젠가 이루어져야하며 그전에 대화, 경제협력, 식량 지원 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북이 워낙 폐쇄적이고 남북이 서로 만만치 않은 정치체제, 주변국 부담을 안고 있어 남북관계가 냉온탕을 거듭하니 억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대세에 맡겨야한다는 생각했던 편이다.

그러나 막상 평양행을 결정하고 방북의 처음과 끝을 지켜보며 많은 생각들을 했다. ‘상대를 이해한다는 것, 상대체제를 받아들인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깊게 생각했다.

마침 우리 남측 대표단이 평양에 있는 기간 중 그동안 미국측과 갈등을 빚던 방코델타아시아(BDA) 문제가 해소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당시로는 낭보라고 생각했는데 미묘하고 조심스러운 남북관계에서는 행사진행상 결과적으로는 긍정적 작용을 미치지 못한 듯했다.  그동안 남북이 서로 만나거나 방문하는 일들이 정치적인 판단에 따라 워낙 조령모개식으로 이루어지는 관계로 이번 역시도 하루 전날 당국자들의 북측방문이 불허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전체 행사의 파행을 예고하듯이 출발 전 일정에도 급작스런 변화가 생겨 원래 6월 14일 오전 11시 김포공항에서 출발할 예정이었으나 출발시간이 앞당겨져지고 인천공항으로 출발지가 바뀌는 등 모든 것이 한치 앞도 예감하기 어려웠다.

#6·15 남측 위원회

6·15남측위원회(백낙청 상임대표)는 제7회 6·15민족통일대축전이 열리는 평양 방북을 주관하였다. 이번 행사와 관련해 북측과 이러저러한 조정 과정을 거치며 행사절차와 참가범위, 참가 인원 조정 문제 등에 이미 과부하가 걸려 있는 듯 보였다. 전체 방북인원은 286명으로 통일연대, 민화협, 범민련, 전국농민총연맹, 민주노총, 한국노총, 체육인, 언론인, 종교인, 정당, 시민단체 등 다양한 그룹에서 참가하였다. 남측의 경우 다양한 부문에서 방북 희망자는 많고 인원은 한정되어있어 대부분 참가 희망자가 넘치는 상황이었다. 반면 시민단체는 15명이 배정되었으나 금전적인 부담 때문에 인원을 채우지 못했다. 시민단체에서는 내가 속한 문화연대, 한국YMCA, 환경운동연합, 녹색연합, 환경정의,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 등에서 14명 참여하게 되었다.

#방북교육

방북교육은 출발 하루 전날 이루어졌다. 이 교육을 마쳐야만 통일원으로부터 방북증을 받을 수 있다. 내용은 인천 순안간 서해직항로를 이용한다는 것, 평양 도착 전 휴대폰을 회수한다는 것, 북한 주민의 생활양식이나 문화적 차이를 존중해야한다는 것 등의 이야기들이다.  대규모 교육이 늘 그렇듯이 어수선했고 실질적인 평양에 대한 내용들은 언급되지 않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평양에 도착해보니 ‘평양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이 왔구나’라는 아쉬움이 컸다. 평양인구를 물어보니 120만명이라는 대답부터 200만명이라는 대답까지 다양했다. 아차 싶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데 어쩌나?

#6월 14일 출국

출국 첫날이다. 아침 일찍 인천 공항으로 가서 기자회견을 마치고 출발하려는데 어딘지 모를 우익단체 사람들이 나와서 평양행 반대기자회견을 벌이고 있었다. 늘 겪는 일이지만 씁쓸했다. 교육운동을 하며 안면이 있던 국회교육 상임위 유기홍 의원, 안민석 의원, 전교조 정진후 부위원장이 동행하게된 것을 알게 되었다. 참가인원이 300명 대규모이다 보니 출발 전부터 내가 알던 분 30명, 앉은 자리가 바뀔 때 마다 열심히 인사 나누고 받은 명함이 30여장, 그러니 나머지 200분은 누가 참가했는지도 모르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실제 윤종건 교총회장과는 평양에서 3박4일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하다가 귀국 후 인천공항에서 첫인사를 나누고 헤어질 정도로 우리끼리도 접촉이 쉽지 않은 과정의 연속이었다.

6.15공동선언 7돌 기념 민족통일대축전 평양대회에 앞서 인천공항에서 출발인사를 하고 있다.


인천부터 평양까지의 거리가 220km, 내가 탄 비행기가 시속 800km, 계산상으로는 불과 30여분 미만에 도달할 만큼 가까운 거리다. 실제로는 50분이 걸려 평양순안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입국절차는 미리 자기 번호를 배정받아 미리 받은 방북증 사진과 북측에 보낸 사진을 대조하는 과정을 거쳤다. 노트북 컴퓨터를 등록 후 가져갔는데도 무선 랜 장치는 본체에서 분리해 이유 설명 없이 보관하겠다고 가져갔다. 출국 전 다시 찾는 절차를 거쳐야 했다. 공항 밖에 대기하고 있는 매연이 심한 버스, 유리창이 금이 간 채로 운행하는 버스는 한순간에 북의 경제난을 엿보게 했다.

난생 처음 본 평양거리는 웅장한 규모의 광장, 건물들, 고층 아파트가 즐비했다. 평양시내는 녹지가 충분하여 건물과 공간의 조화가 균형 잡혀 있었다. 그 사이를 흐르는 대동강도 운치를 더했다. 남측 대표단이 묵은 양각도 호텔은 대동강변 여의도 같은 지형에 새로 지은 호텔로서 47층엔 회전전망대가 있고 객실이 1천실인 대규모 호텔이었지만 호텔방은 한국의 평범한 모텔 방 수준이었다. 호텔 화장실의 수도배관은 벽 속에 묻힌 것이 아니라 타일 밖으로 설치되어 저간의 사정을 말해 주는 듯 했다. 호텔에서 사용하는 공식화폐는 유로였다. 구내 커피숍에서 유로를 내면 달러로 환산해 받고, 1달러 이하 잔돈은 중국 동전으로 거슬러 주기도 했다. 개성공단노동자들의 월급이 45달러인데 커피 한잔 값이 4달러라….  커피 리필은 불가능했다.

출발 전 서울에서 짐을 챙기며 3박4일 동안 입을 옷을 고르다가 여름 티셔츠 중 크든 작든 영문로고가 새겨진 옷들을 다 제외했다. 방북단원인 내가 영문로고가 있는 옷을 입으면 그들이 속으로 뭐라고 비난할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어서 였다. 그러나 왠 걸? 순안공항에서 우리를 맞은 수십 명의 북측안내원은 모두 흰색 폴리에스테르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그들 가슴포켓부분에 모두 ‘SPORT GOLF’라고 영문로고가 박혀 있었다. 완전한 나의 ‘오버’.

#개막식

개막식은 첫날 오후 대성산 남문에서 평양시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치뤘다. 남측 뿐 만아니라 고려호텔에 머물고 있는 150명 규모의 해외측도 함께 참여했다. 북측에서 주관하는 모든 행사에는 규모는 다르지만 평양시민이 수천 명 수준으로 미리 도열해 대기하고 있었다. 예전 TV 화면에서 보기로는 북측주민들이 울부짖거나 부자연스럽게 통일을 외치는 등 거부감을 주는 기억이 강했는데 이번엔 대체적으로 얼굴표정이 자연스러웠다. 식전 레퍼토리인 여성 고적단 연주는 인기가 많았다. 미인이고 신체가 늘씬했는데 이들은 북에서 인기가 높은지 호텔방에 걸어놓은 달력에 줄줄이 모델로 나와 있었다.  

#동평양 대극장

그날 오후 만수대예술단의 공연을 보았다. 평양거리의 건물은 대체적으로 규모가 컸는데 극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만수대 예술단의 공연수준은 뛰어났다. ‘아, 기쁨에 넘친 내나라’를 부른 조춘옥 씨 등 여자 가수들의 음색, 성량등도 뛰어났고 17인의 무용으로 이루어진 ‘눈이 내린다’ 등 은 내용이 북 체제미화적인 측면이 있었지만 관람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북한의 공연예술이 이렇게 뛰어난 것은 우수인재를 조기 발굴하여 이를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수월성교육을 시키기 때문인 것 같다. 이후 김원균(북의 국가를 작곡한 음악가)명칭 평양음악대학을 견학했을 때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곳에는 김일성주석이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교시를 패널 처리하여 복도에 일렬로 걸어 놓았는데 ‘교사들은 영재발굴의 과업에 힘써야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영재는 그렇게 키운다지만 나머지 학생들에게는 어떻게 교육과정과 교육 수준, 직업선택 문제를 풀어갈지 궁금하기도 했다.

호텔방에서 잠시 시청한 북한 TV 방송들은 노래를 많이 방송하고 있었다. 서정적인 멜로디에 ‘충성’과 ‘결의’를 담은 내용이 많았다. 소문에 들으니 남측 팀이 도착하기 전엔 한국 TV방송이 나왔다지만 내가 묵을 때는 BBC, 중국방송, 일본방송 등만 방송되었다.

#평양 음식

평양음식에 대한 기대는 컸다. 첫날 저녁 만찬은 남측 대표단을 비롯해 해외, 북측 민화협이 같은 테이블에 섞여 앉아 대화를 나누며 인민문화궁전 대연회실에서 정식코스요리를 먹게 되었다. 식사 도중 북측 민화협 분은 남측의 대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한나라당 유력 경선주자 이명박씨와 박근혜 씨 중 누가 대통령후보가 될 것 같으냐’는 질문도 스스럼없이 했다. 일본에서 온 해외측 인사는 ‘나는 국가보안법을 없애줄 대통령이면 누구든 환영이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야기가 잠시 빗나갔는데, 정식요리코스는 식빵, 쑥절편, 칠면조 꽃바구니, 왕새우찜 순대, 돼지쫑다리 랭찜, 청포종합랭채 등이 이미 테이블에 차려져있고 이를 서빙한 다음 닭인삼탕, 숭어단초튀김, 송이버섯 익힘, 평양 랭면, 과일, 케키, 레몬 크림이 차례로 나왔다. 김치는 국물이 자박자박했는데 물김치와 배추김치 사이의 형태로 맛이 있는 편이어서 여러 그릇을 비운 분들이 많았다. 대체적으로 조미료를 많이 넣고 김칠 맛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자연적인 맛을 살린 것이 특징인 것 같다. 오해인지는 모르나 물자부족과 기술부족 때문인지는 몰라도 닭곰탕도 기스면 스프처럼 묽고, 디저트로 제공하는 케익 류는 오래전 남측 제과점 빵 수준으로 맛이 많이 떨어졌다. 단물 쥬스는 분말 가루를 타서 만든 것 같기도 했다.

이번 민족통일대축전에는 시민단체인사 14명이 참여했다. 가운데가 필자다.


아침식사는 양각도 호텔에서 불고기 등 육류를 포함한 한식 뷔페식으로 제공되었는데 상추쌈과 쑥갓이 단연 인기였다. 산양우유로 만든 요구르트가 곁들어졌다. 냉면은 옥류관 냉면을 먹었는데  단백한 맛으로 인기를 끌었다. 동행한 안내원말로는 150원(2달러 정도) 수준이라고 하는데 자기 가족들도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냉면외식을 한다고 한다. 평양거리에는 차집, 국수집, 냉면, ‘짜짱집’ 등 음식점이 대체로 한데 몰려있었는데 최근 길거리에 차양을 친 노점상이 드문드문 생겨난다고 한다.

방북 중 평양명물이라는 단고기도 먹게 되었다. 안 먹겠다고 하면 내가 너무 유난떠는 것 같아서 굳게 마음먹고 시식하게 되었는데 결국 거의 못 먹고 말았다. 하지만 대부분 분들이 맛있게 시식하였다. 단고기 탕을 한 그릇 주는 것이 아니라  ‘통개’ 수준으로 찜, 수육 등 5~6가지 코스 요리로 개발해서 제공하였다. 음식점의 서빙을 하는 여성들은 20세 초반의 앳띤 여성들로 팁은 사양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일부 남측참가자들은 아는 척을 하느라고 ‘얼음 보숭이’를 달라고 했지만 남측사람들만 의미 있는 웃음을 짓고 정작 북측안내원들은 의아하다는 듯 알아듣지 못하다 ‘레몬크림’이라고 알려주었다. 영어사용이 점차 일상화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정명신 함께하는교육시민모임 공동회장

 

제9호 8면 2007년 6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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