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의 독설'은 이재영 '레디앙' 기획위원의 날카로운 한국사회 비판을 접하실 수 있는 고정 칼럼입니다. 이재영 기획위원은 그동안 시민사회 내부 성찰과 진로 모색에 대해서도 해박한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경계를 넘나드는 고언을 던져왔습니다. 역설의 독설은 '이성의 비관, 의지의 낙관'을 함께 다져가는 공론장이 될 것입니다. 많은 관심과 의견을 기다립니다. /편집자 |
모든 게 정상이었다면 <시민사회신문>은 만들어지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시민사회신문>은 기쁜 시작이기 전에 아픈 끝이었고, 그 끝을 통해 비로소 태어났다. 그래서 <시민사회신문>에 기대할 수 있다. 실패와 상처야말로 성공에 이르는 가장 큰 자산일 테니까.
기억의 조건
하지만 실패가 곧 성공으로 연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실패의 경험이 성공으로 전화하기 위해서는 ‘기억’이라는 하나의 조건을 놓지 않아야 한다.
나의 첫 기억은 ‘사실’에 관련된 것이다. 시민의신문에 관련된 여러 추문을 오래 전부터 들어왔지만, 나는 그것에 침묵했다. 사실 확인이 어렵다는 그럴싸한 핑계거리가 있었으니까. 지금에 와 기억해보건대, 내가 알 수 있는 ‘사실’이라는 것이 내가 만들고자 하는 사실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사실’은 신문 기사의 미덕이지, 칼럼의 도덕률이 아니다. ‘사실’은 검찰이나 경찰의 업무이지, 사회운동가나 노동조합원의 자격 요건이 아니다. 요컨대 특정한 시점에서 특정한 개인이 ‘사실’에 접근하지 못했다는 것이 사실을 향한 항의나 도전을 장애해서는 안 된다.
대안의 덫
‘사실’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덫은 ‘대안’이다. 우리는 일터에서나 술자리에서나 “그래서 어쩔 건데?”라고 묻곤 한다. 시민의신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논리가 횡행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 문법에 따라 말과 행동을 조심했다. 문제는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하는 사람은 관찰자나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쩔 건데, 대안이 뭔데”가 나오면 대화는 끝난다. 따라서 이런 말 뒤에 어울리는 문장부호는 물음표가 아니라, 마침표다. 따라서 그런 논리는 기득권의 유지이고, 고작해야 작은 변화만을 낳을 뿐이며, 큰 변화의 가장 큰 적이다. ‘대안’은 문제제기자의 의무가 아니라, 집합적 노력의 결과물이어야 한다.
우리를 헤어나지 못하게 했던 가장 큰 덫은 ‘우리’라는 동류의식이었다. 나는, 이형모씨 사건에 관련하여 시민운동가니 여성운동가니 자처하는 사람들로부터 박정희 식의 ‘반공 논리’를 적지 않게 들었다. 작은 적과 큰 적, 소악과 대악을 나누고 양자 중 하나를 ‘차선 선택’하게 강요하는 전체주의적 폭력이었다.
인류사는, 어떤 국가든 사회든 집단이든 내부로부터 붕괴한다는 진실을 전한다. 도덕군자인 양 하던 노무현 정권이 가신들의 비리는 덮어주면서, 그 책임을 수구언론과 ‘머리 나쁜 국민’에게 뒤집어 씌우는 꼴을 시민운동은 되풀이 하지 않았는가? 자신에게 가혹하지 않고서는 남을 설득할 수 없고, 남을 설득하지 않고 이길 수는 없다. 따라서 매서운 칼날은 언제나 자신을 겨누어야 하는 법이다.
자신을 겨눈 칼
그래서 이런 기억을 간직하고 있을 <시민사회신문>에 기대한다. ‘사실’ 확인을 넘는 사실 추구, ‘대안’의 집단적 모색, 소아(小我)에서 대아(大我)로의 탈출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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