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8일자 <국민일보>에는 놀라운 조사 결과가 보도되었다. 서울시가 2천500가구를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49.9%의 사람이 ‘가족’을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서로 도우며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 19.5%, ‘조상을 같이 하는 같은 피로 맺어진 사람들의 모임’이 17.4%로 그 뒤를 이었다고 한다.
서울시민들의 이런 인식은 우리가 초등학교 때부터 배워 왔던 ‘가족 = 혈연’이라는 공식과는 크게 다르다. 혼인과 혈연을 기본으로 한다는 사전적 정의나, 법률적 규정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서울시민들의 가족 의식을 연애소설이나 TV 드라마처럼 ‘사랑’으로 해석하는 것도 과히 나쁘지는 않겠지만, 이런 가족 의식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추리해보는 것도 나름 의미 있을 듯 하다.
왜 50%의 사람들이 가족을 비혈연적으로 인식하고 있을까? 이런 인식은 현재의 가족(가구) 구성과 대체로 일치한다. 3세대로 구성되었던 과거의 가족과 달리, 일반적인 현대 서울 가족은 부부와 미혼 자녀로 가족을 구성한다(79.8%,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보고서', 2001). 즉, 직계 존속과 동거하지 않는 현대 가족에서는 비혈연적인 부부 관계와 혈연적 자녀 관계가 가족 관계의 절반씩을 차지하고, 이런 구성비가 ‘가족 = 사랑’에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단지 2.5%의 가구만이 직계 존속과 동거하는 실태는 ‘동거’라는 의미에서의 3세대 가족이 거의 완벽하게 해체되었다고 할 수 있다(통계청, 2001). 동거하지 않는 것만이 아니다. 64.8%의 사람들이 노인에 대한 부양 책임이 가족에게 있다고 생각하지만, 자녀나 친척의 도움으로 생활비를 마련하는 60세 이상 노인은 37.2% 뿐이다(통계청, '사회통계조사', 2002). 노인을 부양하고 싶은 마음이야 있지만, 실제로 부양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1.13이라는 세계 최저의 출산율, 부부 당 한 명의 자녀로는 혈연 가족을 유지하거나 확대하기는커녕 한 세대마다 혈연 가족이 반 토막 날 수밖에 없다. 가족이 사회구성원 재생산의 역할을 이미 잃었거나 그 절반의 몫만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이런 지표는 아직도 강력한 가족주의와 지독한 자녀 사랑과 불일치한다. 따라서 이 문제는 주관적 혈연 욕구와 객관적 경제 현실의 괴리 문제이다.
가족 설문의 20%를 차지한 ‘서로 도우며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 의미하는 바도 명약관화하다. 소득 통합으로서의 ‘가족’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20%의 사람들이 ‘소득 통합’이나 ‘소득 부조’를 원하는 것일까? 서울시의 경제활동참여율은 63%(통계청, '경제활동인구연보', 2006)인데, 이 지표를 한 명의 자녀가 있는 평균적 가족으로 확대해보면 가족의 42%가 일하고 있는 것이고, 그 취업자 중에서 비정규 노동자와 영세 자영업자가 절반을 상회한다. 즉, 20% 가량의 서울시민이 다른 가족 구성원의 경제적 지원 없이는 자립적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근로빈곤이나 실업 상태에 빠져 있는 현실이 ‘가족 = 도움’에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취업하였거나 취업 의사가 있는 성인이 자신의 소득으로 생계를 영위하지 못하는 현상은 노인이나 자녀 문제에서와는 반대로 가족의 해체를 지연시키거나 비혈연 가족의 구성을 촉진한다. 한편 그 원인이 경제 조건임은 노인, 자녀 문제에서와 동일하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가족의 의미가 소득 통합으로 기우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지만, 세대나 이혼에 따른 자연스런 가족 분할을 막음으로써 가족과 사회의 불화를 부추기게 될 것이다. 또, 노동력이 없는 노인이나 자녀가 배제되는 가족과 인구사회적 구성이 사회 지속의 위기임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서울시민 가족 의식의 변화는 거의 전적으로 경제난에 따른 수동적 적응의 결과이다. 한국 가족이 직면하고 있는 것은 의식의 변화라기보다는 생활의 후퇴이고,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이상이 아니라 ‘생존’이라는 고단한 일상이이다. 이것은 가족의 승화가 아니라 가족의 위기이다.
전통 가족의 해체를 안타까워하지 않더라도, 경제난에 따른 가족 변형이 달갑지 않은 사회병리임은 분명하다. 공공복지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가족복지의 급속한 해체나 왜곡이 사회적 파국을 불러올 것은 너무도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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