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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人/오피니언

평화를 위한 개발도 있다

‘잘사는 평화’를 찾아서[1]

 

대선 예비주자들이 경쟁하듯 경제 관련 공약을 발표하고 있으나, 물량적인 경제성장·경제발전·개발론에서 맴돌고 있다. 아직도 GNP=민생, 신화·개발 지상주의에 매달리고 있는 이들의 경제정책에서 인간을 위한 경제발전론, 평화를 위한 개발론의 요소를 찾기 힘들다.

 

예비주자들 사이의 정치적 견해는 비교적 잘 구별되나, 경제정책의 구분선이 명확하지 않은 채 개발주의에 젖어 있다. 보수적인 주자일수록 개발 만능주의를 신봉하면서 자신이 개발연대·성장연대에 소속되어 있음을 은근히 과시한다. 그래야 보수지향적인 유권자의 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사회주의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민주노동당 예비주자들의 경제정책이, 무늬만 진보인 ‘또 다른 방식의 개발론’으로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 본질적으로 평화지향적인 개발론을 민주노동당 예비주자들마저 선보이지 못하는 답답함을 벗어나기 위하여, 필자 나름의 ‘평화를 위한 개발(발전)론’을 제시한다 /편집자


물량적 개발론 넘어 평화발전
진보진영 역시 대선시기 혼선

개발론의 대가들은 많지만 평화와 관련하여 설명한 학자들은 드물다. 개발과 평화의 관련성에 관하여 요한 갈퉁(Johan Galtung), 아마티아 센(Amartya Sen), 니시가와 쥰(西川 潤) 등이 주목할 만한 글을 발표했다. 이들의 저작을 중심으로 ‘평화를 위한 개발(발전)’의 논리를 펼쳐보자.
  
‘개발’의 개념

인류의 정신사에서 개발(development)이 시대의 과제가 된 때가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19세기 시민혁명의 시기로서, 이 시기에 ‘개발’, ‘발전’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이는 유럽언어로 development(영어), die Entwicklung(독일어), le d?veloppement(프랑스어)로 표기되는데, 타동사로서 ‘개발하다’와 자동사로서 ‘발전하다’는 양쪽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헤겔(Hegel)이다. 헤겔은 봉건사회 속에서 움츠렸던 시민사회가 혁명에 의해 자기발전하는 양상을 ‘Entwicklung’(이성의 자기전개)이라고 표현했다. 이성의 자기전개 그 자체를 역사의 진보로 나타낸 것이다. 18~19세기의 계몽철학은 Entwicklung에 의한 진보의 세기이었으며, Entwicklung에 의한 진보사상이 근현대사의 사상적인 기초가 되었다.

두 번째는, 제2차 대전의 참화로 황폐된 유럽의 부흥·개발이 과제가 되어 1945년에 국제부흥은행(IBRD)이 설립되었다. 이어 1951년에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공산주의의 아시아 제국에 대한 침투를 저지하기 위한 후진국 원조 계획인 ‘Point 4'를 발표했다. 냉전시대의 개발을 상징하는 Point 4는 경제적으로 뒤진 세계에 자유민주주의라는 복음을 불어넣어 공산주의화를 저지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선진국이 후진국을 끌어올리기 위해 ‘개발’하는 개발관의 토대가 여기에서 만들어졌다. 이 ‘개발’은 시민사회의 자기전개로서 즉 자동사로서의 발전이라는 의미가 약하다. 그 대신 국가가 특정한 목적을 갖고 사회의 발전방향에 개입하는 의미로서의 타동사 용법이 중심이다.

 

이렇게 제2차 대전 이후 선진공업국의 개발원조는 위로부터의 타동사형 개발체제로 드러났다. 개발은 동서 냉전체제의 맥락에서 국가 헤게모니 또는 (국가헤게모니와 연결된) 자본주의 체제를 강화하는 장치에 다름 아니었다.

김상택 기자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등 10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지난 9월 11일 제96차 미 대사관 앞 반미연대집회를 열었다.


위와 같이 ‘개발’ 개념은 용법, 정치·사회·경제적 맥락에 따라 자동사로서의 ‘발전’과 타동사로서의 ‘개발’로 나뉜다. ‘development'를 우리말로 옮길 때 발전과 개발을 혼용해도 무방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development'의 주체·객체를 고려할 때 양자의 범주가 다름을 알 수 있다.

 

스스로 발전하는 주체, 개발을 당하는 객체가 현실적으로 존재하므로 전자의 주체를 자동사로서의 발전 개념으로 포괄하고 후자의 객체를 개발 개념으로 설명하면 될 것이다. 이러한 구획에 따라 자동사로서의 발전-평화의 연관성을 먼저 설명한 다음에 타동사로서의 개발-평화의 관련을 뒤이어 기술한다.
  
자동사로서의 발전: 갈퉁의 관점

평화학의 관점에서 발전을 바라보는 갈퉁은 ‘발전학(development studies)과 평화학의 접맥’을 ‘Peace by Peaceful Means’(Oslo: PRIO, 1996)의 제3부(개발이론)에서 시도한다. 여기서 갈퉁이 제시한 ‘development'에 관한 15가지 명제와 절충적 개발 이론에 관한 명제는 다음과 같다.

갈퉁은 ‘development'의 다섯 번째 명제로 발전의 문법적 명제를 제시한다. “동사로서의 ‘발전하다’는 타동사가 아닌 오직 자동사나 재귀동사, 상호동사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발전은 본질적으로 자기 발전(Self-development)이다.

 

자아(Self)의 자율성을 손상함 없이 타자(Other)가 자아 발전의 원인이 될 수 없다. 자율은 발전의 모든 정의에서 목표이다. 내가 발전하고, 내가 나 자신을 발전시키고, 우리가 서로를 발전시킨다. 자신의 자아가(one's own Self)가 된다는 것은 주어(S)-술어(P)-목적어(O)의 문장에서 주어(S)가 되는 것이지 항상 목적어(O)로 있는 것이 아니다.”

갈퉁은 이와 같은 관점에 따라 발전에 관한 세 가지 정의를 내린다.

우선 문화적 정의(제1명제)다. “발전은 특정 문화의 펼쳐짐(unfolding)이다. 즉 그 문화의 부호(code)나 우주관을 구현하는 것이다.” 위의 ‘펼쳐짐’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독일어 ‘Entwicklung'에 아주 명확하게 반영되고, 또한 영어 ‘envelop'의 반의어 ‘develop'에도 잘 나타난다. 그 단어의 의미 파악을 위한 또 하나의 방법으로 꽃에 비유할 수도 있다. 즉 미리 정해진 씨 속의 유전 부호에 의해 결국 꽃이 피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어진 문화 부호나 우주관이 궁극적으로는 문명으로 펼쳐진다.

이어 욕구 중심적 정의(제2명제)다. “발전은 인간의 욕구와 자연의 욕구를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부터 순차적으로 만족시키는 것이다.” 인간은 욕구를 가진다. 만일 이 욕구가 만족되지 않으면 더 이상 인간(human being)일 수 없다. 보다 물질적이고 신체적인 욕구가 만족되지 않을 경우 더 이상 생명을 가진 존재(being)일 수 없고, 보다 비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욕구가 만족되지 않을 때 더 이상 인간적(human)일 수 없다는 뜻이다. 욕구의 박탈은 고통이다.

 

비참한 경제적 곤궁에는 욕구 박탈이 뒤따른다. 최소한으로 볼 때, 평화가 전쟁의 부재를 뜻하는 것처럼 발전은 경제적 곤궁의 부재를 뜻한다. 욕구 박탈에서 중요한 특징 하나를 규정해보자. 모든 수준의 발달에는 고통의 요소가 있다. 고통의 극단적 수준은 죽음, 즉 개체의 소멸로 이는 육체에 가해진 외상(직접적 폭력) 또는 공기, 음식 등의 필수품 투입의 부족(구조적 폭력)에 기인한다. 그러나 개인의 소멸(죽음) 이전에 착취라는 고통의 수준이 있는바, 이 개념은 발전의 이론과 실제에서 중심적 개념이다.

다음 성장 중심적 정의(제3명제)다. “발전은 경제 성장이지만 아무에게도 비용을 부담시키지 않는다."

이 정의는 상식적으로 인식되는 발전 개념에 가깝지만 비용을 부담시키지 않는다는 중요하고 어려운 단서조항이 달려 있다. 우리는 여러 비용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자연 공간에서는 고갈, 즉 생명체 및 비생명체의 소멸 그리고 (독성)오염이라는 비용이 나타나곤 한다. 인간 공간에서의 비용은 재생과 번식을 위협할 정도의 욕구 박탈에 나타날 수 있다. 인간간의 상호작용 체계인 사회 공간에는 다양성과 공생관계의 결핍이라는 비용이 야기될 수 있고, 이 점은 사회 간의 상호작용 체계인 세계 공간에서도 마찬가지다.

무엇이 진정한 개발문화?

위에서 설명한 발전의 세 정의-문화 중심적 정의, 욕구 중심적 정의, 성장 중심적 정의-는 분명히 상호 모순적이다. 어느 한 정의에 따를 때에 발전인 것이 다른 정의에 의하면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어떤 문화의 이면적 의제가 욕구와 성장을 내포하지 않거나, 그 중 하나는 있지만 다른 하나는 있지 않을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갖게 된다. 만약 존재한다면 어느 문화, 어느 문명이 진정한 개발 문화인가?

절충적 발전이론 명제

 

진정한 개발 문화를 설명하기 위해 갈퉁은 발전의 문화적 정의(발전은 특정 문화의 펼쳐짐이다)로 되돌아간다.

 

세상에는 복수의 문화가 있으니 그에 따라 복수의 발전이 있게 마련이라며 복수형의 발전(developments)을 중심으로 발전을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제4명제) 문화·문명의 차이에 따라 드러나는 발전들(developments)의 양상에 주목해야 한다는 뜻이다.

 

예컨대 서구문명을 도식화하면 ①발전=서구의 발전=근대화 ②발전=성장=경제 성장=GNP 성장인데, 이러한 서구의 발전논리가 구조적 폭력을 양산하여 전 세계에 비평화를 초래했다. 특히 근대화의 공식은 중앙집권적으로 조직된 국가의 논리이자 경제 성장을 수반하는 자본의 논리이므로, 자본의 논리로 발전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제6명제)

 

이러한 필요성에 따라 갈퉁은 여섯 가지 경제학파(청색학파, 적색학파, 녹색학파, 분홍색 학파, 황색학파, 절충학파)를 총체적으로 평가하면서 평화지향적인 발전을 위한 이론을 '절충적 발전이론에 관한 10가지 명제’이라는 이름으로 내놓는다.


 김승국 평화만들기 대표

 

제23호 14면 2007년 10월 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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